2011.04.28 08:37




누가 그러더라, "어떤 사람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직 그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내 육신의 죽음과 너의 영혼의 죽음이 시작되었던 그 날 2006년 3월 15일,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순간 후회했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몸이 허공을 향해 튀어 올랐지...
장미꽃을 들고 망연자실 내가 사고가 난 자리에서 얼어버린 너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어.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송이경. 넌 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던 거야... 그로부터 5년 너는 그렇게 피를 흘리고 있었어. 나를 잊기 위해, 그게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스케줄러(우리동네에서 요즘은 저승사자를 이렇게 불러)를 만난 나는 저승행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겠다고 버텼지. 꼭 한가지만 하고 갈 수 있게 해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며 애원했지. 그리고 난 5년임기 스케줄러가 되었어. 이제 내 임기도 다 끝나가니, 이제는 내가 이승에 남겨둔 간절한 일을 하고 갈 수 있을 거야. 이경이 너를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말이지...
그런데 벌써부터 널 만나는 것이 두렵고 겁이 난다. 아니 설레이고 떨려. 처음 너에게 설레임을 느꼈던 날부터 사고가 있던 그날까지, 한순간도 널 볼때마다 설레이지 않은 적이 없었어. 내가 너의 전부였듯이, 너는 나의 전부였으니까. 아흔아홉살 생일까지 축하해 줄 단 한사람이었으니까.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춘천의 한 고아원에 버려지고, 우린 그렇게 만났고 가난한 연인으로 사랑을 했고, 같은 꿈을 꾸었어. 예쁜 펜션을 지어, 장미도 심고 담장대신 벚꽃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너 닮은 딸, 나 닮은 아들 낳고 천년만년 변치않고 사랑하며 살자고 약속했지. 너는 나고 나는 너였기에 사랑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너의 생각에도 나의 생각에도 없었던 단어였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린 우리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같은 대학에 들어갔고, 어렵게 공부를 마칠 수 있었지. 그런데 내가 변해가기 시작했어. 그래, 솔직히 조금은 답답했어. 고아로 자라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 음악, 그것은 내게 한줄기 빛과 같은 새로운 즐거움이었어.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모든 것을 가진 것같이 행복했어. 난 세상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으니까. 그런 나를 너는 이해하지 못했어. 내가 변했다고, 송이수가 변했다고,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우린 싸우기 시작했어. 그날, 내가 죽은 날도 그렇게 우리는 싸웠고, 화해하지도 못하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어.
스케줄러가 되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죽어도 쌀 인간들, 죽기에 아까운 인간들, 살려주고 싶은 인간들, 죽이고 싶은 인간들까지도...그래도 절대로 표를 내서는 안돼. 그게 우리동네 규칙이거든. 난 스케줄에 따라 윗분 지시를 수행하는 냉혈한 스케줄러일뿐이고, 내게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바꿔줄 수 있는 권한같은 것도, 눈꼽만큼의 동정심도 허락되지 않았지.

그런데 병장제대 말년에 골치아픈 애를 만났는데, 얘가 내 인생을, 아니 스케줄을 천년 묵은 칡넝쿨처럼 질기게 얽혀들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1주일 임기연장이라는 벌칙까지 받게 되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지만, 그래도 그 애의 사정이 너무 딱해서 눈감을 수가 없더라. 내가 살아있을 때도 매너남에다, 인간성이 나쁘지는 않았잖아...
내가 사는 세계에서 우연이 벌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더라고. 고등학교때 진안의 벚꽃축제에서 타로점을 봐줬던 착한 여고생이 신지현일 줄이야. 몇년을 되물림해서 입었는지도 모를 내 너덜더널한 교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아이, 그러면서도 내가 자존심 상할까봐 받고 싶지 않은 타로점값을 받아주던 아이. 너도 이제는 어렴풋이 눈치를 챘을 것 같다. 맞아, 하루 절반을 네몸을 빌려 살고 있는 너 안의 다른 사람 신지현이야.
신지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내 고객은 아니었어. 아주 훗날 다른 스케줄러가 맡게 돼 있었는데, 억울하게 영혼이탈 사고를 당한 케이스지. 이승에서의 용어로는 뇌사상태, 우리 동네에서는 관리대상, 내게는 트러블메이커지. 이 세계에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피도 눈물도 없이 저승행 엘리베이터에 태우는 파렴치한 법만 있는 것은 아니야. 예외적이고 돌발상황에서는 구제방법도 주거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순도 100%눈물 세방울을 받으면, 살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재도전 패자부활전인데, 아무튼 신지현이 그 케이스가 되었고, 불행히도 사고가 내 담당구역에서 발생해서 내가 처리를 맡게 되었어.
어떤 여자가 넋놓고 도로 한폭판을 가로질러 자살시도를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 여자때문에 임시죽음 상태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지. 그 여자 이름이 송이경이었어. 그때도 난 그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어. 송이경은 내 기억과 함께 봉인된 이름이었거든.
시도 때도 없이 호출을 해대고 사고치는 신지현때문에, 내가 스케줄러 임기를 마칠 수나 있을지 모를 정도로 골치덩어리였지만, 49일 공동운명체로 묶이다보니, 정이라는 것도 생기게 되나 보더라. 그래서 인간들은 오래 자주 만나면 안되는 건데, 암튼 어쩔 수 없는 내 팔자지.
신지현이 빌려사는 송이경의 방에 처음 들어간 날, 뭔지 모를 오싹함과 찜찜함에 기분이 영 별로였어. 더 오래있으면 울 것같은 슬픔, 고통, 분노, 그리움, 미안함, 이런 것들이 느껴지더라고. 그리고 표현을 잘 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송곳으로 찔러대는 것같이 아파왔어...
그리고 이상한 느낌을 또 가지게 됐지. 송이경이 일하는 카페에서 얼굴을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에 그 여자가 다가오자, 인간의 감정이 느껴졌지. 애틋하고 만지고 싶고, 말하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그러면서 미안해지고...아무튼 잘 모르겠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진안에서,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을 때 알았어. 그 눈물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 스케줄러인 내가 슬픔을 느낄 이유도, 그 눈물을 내가 닦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겠지... 더 강하게 느껴졌어, 송곳으로 찔러대는 아픔이..
신지현이 우리들의 졸업앨범을 가져와서 내 사진을 보여주는 순간, 난 충격으로 두번 죽을 뻔했어. 사진속 사람은 송이수 나였고, 그 옆에 여자는 너였어, 내 봉인된 기억과 함께 아픔과 그리움, 미안함, 설레임이고 전부였던 내 사랑 송이경, 바로 너... 내가 사랑한,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오직 한 여자 송이경, 우리들의 펜션 '이월애(이월의 사랑)'의 안주인이 될 내 운명의 연인...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날, "너란 애 지긋지긋해"라며 너를 떠나 버린 것, 나도 그것이 우리들의 마지막이 될 지 몰랐어. 너는 나를 꿈에서라도 만나기 싫다하지만, 난 너를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어. 하루하루 시체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나때문이라는 것, 내가 준 상처때문인데, 이렇게 죽음보다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사는 너를 두고 어떻게 내가 편하게 죽을 수가 있겠니. 난 죽어도 죽을 수가 없어. 아니 못 죽어...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너는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앞으로도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겠지. 
나는 너의 과거였고, 현재였고, 미래였어. 그런데 내가 너의 미래를 짓밟아 버렸어. 알량한 내 영혼의 자유를 위해, 사람 마음도 변하는 거라면서... 너의 미래는 깨져버렸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너는 컵라면에 겨우 생명을 유지해 가면서, 너의 영혼과 육체를 죽여가고 있는 거지. 
이경아, 안돼 그러지마. 살아줘. 천천히 조금씩 나도 잊어가면서 살아줘. 죽어서야 알았어. 삶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쉬고 눈을 마주칠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를,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축복이라는 것인지...

이경아, 디킨슨이라는 시인이 쓴 시야.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시라 들려주고 싶었어.
"만약 내가 어떤 이의 가슴이 부서지는 것을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I shall not live in vain
만약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덜어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라도 가라앉게 할 수 있다면          or cool one pain
혹은 실낱같이 가녀린 숨을 쉬는 울새 한마리를   Or help one fainting robin
둥지로 돌아가게 도울 수 있다면                          Unto his nest again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I shall not live in vain.
내가 스케줄러가 된 이유야. 너의 가슴이 부서지는 것을 멈추게 하고 싶었어. 너의 아픔을, 내가 준 상처를 사과하고 싶었어. 그리고 이제야 알았어. 이 모든 것이 예정된 우리들의 운명이었음을... 꺼져가는 생명 가녀린 새 한마리 신지현을 그녀의 둥지로 돌려보내는 일이, 너에게 내 말을 전하는 길이기도 했던 거야. 이렇게 우리 네사람은 인연으로 묶여있었던 거야.
23살에 죽어 버린 나, 아쉬웠어.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렇게 죽어버린 것이 너무도 억울했어. 하지만 지금은 억울하지 않아. 이경이 너를 만나고 함께 했던 23년이 내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복했다. 나처럼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있음 나와보라고 해.
이경아, 그때 그말 내 진심아냐. 사랑해, 죽어서도 사랑해. 나중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너는 너에게 주어진 시간을 행복하게 살다 와. 내 몫까지 행복하게... 내 가장 소중한 사람아...

---이상, 송이수가 송이경에게 전하고 싶은 봉인된 기억 속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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