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결말'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1.12.27 '뿌리깊은 나무 해례본' 뿌리가 된 세종, 드라마에서 놓쳤던 부분 (6)
  2. 2011.12.23 '뿌리깊은 나무' 시청자 울리고 감동시킨 최고의 명장면 (36)
  3. 2011.12.22 '뿌리깊은 나무' 반전의 열쇠 연두, 광화문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29)
  4. 2011.12.17 '뿌리깊은 나무' 결말반전, 세종과 정기준은 화해할 수 있을까? (5)
  5. 2011.12.16 '뿌리깊은 나무' 화끈한 세종, 너털웃음 속에 감춘 무서운 한 수 (5)
2011.12.27 13:39




한글 그 위대함과 세종대왕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남겼던 뿌리깊은 나무, 한석규의 명품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간었지요. 스페셜로 편성된 해례본을 보면서 한가지 놓쳤던 부분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드라마가 끝나고서도 그 긴 여운은 아마도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때문이었을 겁니다. 고독한 세종, 향원정을 거니는 쓸쓸한 세종만을 남긴 제작진의 인정머리없음이 못내 서운하면서도, 그럴 수 있었겠다고 제작진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저희집에서는 여전이 설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장치로서 소이 채윤 무휼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희생하고 버려야 했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이었기에 죽음을 죽음으로 보는 것보다는 세종의 건강, 편안함, 인간관계 등을 상징했다고 보니, 드라마 결말이 가슴에 구멍이 뚫릴 정도의 슬픔으로 자리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한글과 세종대왕을 재조명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는 점에서 드라마사에 길이 남기고 싶은 마음이 크고요. 
아무리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도 스페셜은 관심도가 떨어지는데, 저는 오히려 드라마에서 놓쳤던 중요한 것을 되짚어 생각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장성수 학사의 주검과 함께 밀본 수장 정기준이 세종에게 보낸 짧은 협박의 문구가 그것입니다. 화시화이이의(花是花而已矣) 불가이위근(不可以爲根)-꽃은 꽃일 뿐 뿌리가 될 수 없다-.
드라마에서 뿌리는 백성을 의미했고, 강하고 튼튼한 백성이 나라를 튼튼하게 지탱하는 근본이며, 글을 깨우친 백성의 힘, 백성에게 권력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글자를 통해 주려했던 세종의 거시적인 역사관과 애민정신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였지요.
그런데 압축된 스페셜편을 보다보니 밀본의 시작이며 세종과 대립했던 이 짧은 문구에서 놓쳤던 것이 비로소 보였습니다. 세종은 뿌리가 되었는가? 다시 말해 세종은 백성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상한 질문이 그것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을 백성이라는 집단 속에 넣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나더라는 것이죠. 왕은 지배계층의 최정점이기에, 백성이라는 피지배층과는 물과 기름처럼 다른 계급인데 말입니다.
조선을 이끌고 지배하는 중심이 왕이냐 사대부냐로 놓고 본다면, 조선을 지탱하는 뿌리 싸움에 대한 세종과 밀본의 대립은 성사되지만, 정도전과 정기준의 논점대로라면, 왕은 뿌리가 될 수 없다는 말에서 이상한 싸움논리가 발견되더라는 겁니다. 밀본은 왕이라는 권력이 조선을 독단적으로 운영할 수 없게 해야 한다는 논지에서, 조선을 운영하는 체계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재상총재제를 내세웠죠.
그런데 세종은 백성이 그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방법으로 글자를 제시했습니다. 뭔가 모르게 앞뒤가 맞지 않는 싸움이지요. 즉 사대부는 왕이 뿌리가 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즉 왕권견제의 카드로 재상총재제를 내세웠는데, 세종은 백성으로 뿌리에 대한 답을 냈다는 겁니다. 그럼 밀본에서 말하는 꽃(임금)은 어떻게 된 걸까요? 뿌리가 된 걸까요? 아니면 꽃인 채로 남았을까요?
밀본이 우려한 대로 뿌리가 되었다면, 세종과 백성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에 대한 질문이 제 속에서 나왔고, 한참동안 그 답을 찾기 위해 여러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백성과 함께 하는 임금이라는 생각도 했고, 왕도 한나라의 구성원인 백성이다라는 원론적인 생각도 해봤는데 이도저도 맞다 싶은 게 없더라죠.
그리고서야 세종과 정기준의 정륜암에서의 끝장토론을 떠올렸습니다. 세종은 글자를 만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지요. "임금은 늘 견제당하는 존재이기에 한계가 있다. 하여 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역할을 하게 하려 한다. 백성이 힘을 가지고 그 권력을 나눠 가지게 되는 새로운 균형, 새로운 질서, 새로운 조화다. 나의 글자는 그런 새로운 세상의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
세종의 말에 정기준은 반박했죠. "권력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백성의 욕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세종을 몰아세웠고, 정기준의 말에 세종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요. 광평을 잃고, 반포식에서 무휼과 채윤, 소이마저 잃은 세종은 처참한 모습으로 용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정기준에게 대답을 할 수 있었지요. "너 때문에 백성을 사랑하게 됐다. 여기가 이렇게 아픈데 그것이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가 있겠느냐, 그것이 바로 사랑이야".
'꽃은 꽃일 뿐 뿌리가 될 수 없다'에 대한 기나긴 세월의 고뇌와 싸움 속에서 얻은 답이었습니다. 소이와 채윤은 백성이었습니다. 소이와 채윤을 드라마에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세종의 마음 속에서 생각했던 백성이라고 생각하면, 좀더 분명해지지요. 억압받고 고통받으면서도 그 몫을 지고 있던 백성들, 그들의 고통이 아팠던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며, 사랑하기에 고통의 짐을 나눠지려고 했던 세종이라고 생각하면, 채윤과 소이는 세종의 마음 속 고통받는 백성의 모습으로 치환되지요. 소이와 채윤의 죽음이 결말의 완성도를 해치지 않았고, 죽음과 백성의 고통을 대치하는 장치였을 뿐이라고 생각된 순간, 소이와 채윤의 죽음이 큰 슬픔이 되지 않았던 이유였습니다. 
무휼의 죽음은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슬펐고 안타까웠지요. 마지막까지 세종을 지켰던 호위무사, 무휼은 세종의 육체를 상징하는 장치였기 때문이에요. 글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세종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당뇨의 합병증으로 시력까지 극도로 나빠졌고, 육체적으로 고통도 심했습니다. 무휼의 죽음은 그런 세종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 나온 글자라는 의미로 풀어봤거든요.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 역시 하루 두 시각밖에 잠을 자지 않고 책과 연구에 씨름했던 세종의 고단함을 상징하기도 했고 말이지요.
드라마에서 허구의 가상인물들은 모두 죽음으로 끝났던 이유, 결말반전에 대한 제작진의 집착이라기 보다는 그 모든 가상 인물들은 세종의 건강, 인간적인 욕망, 반대세력, 우리 글자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들로 상징화시켰던 것이기에, 마지막 그 모든 희생과 반대들이 한글반포와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 소이, 채윤, 무휼, 광평 등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야 했습니다. 드라마속에서 잃은 세종의 소중한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고통과 노력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세종의 위대함과 노력을 다 보여주기에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종은 기꺼이 백성이 되었습니다. 밀본이 우려했던 뿌리가 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백성과 함께 하는 뿌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백성 위에 사랑과 애민으로 군림하는 군주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군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우연히 제작진의 인터뷰를 읽어봤는데, 뿌리깊은 나무는 백성에 대한 세종의 멜로물이었다고 하더군요. 세종이 사랑한 대상은 여인 소이가 아니라, 글자가 진정으로 필요했던 소이라는 백성이었고, 백성의 어버이로서의 자격과 의무를 묻고 신뢰했던 강채윤이라는 백성이었던 것이지요. 가상 속의 소이와 채윤이라는 백성은 세종이 글자를 창제해야만 하는 이유를 부여한 가엾고 고통받는 백성들이었고, 반포식 이후 향원정을 거닐며 세종은 다른 모습의 백성들을 상상해 보지요.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하루 하루 생생지락을 누리는 백성들의 행복한 미소를 말입니다.
사체해부를 한 것을 두고 성삼문과 박팽년의 반발에 세종이 말했지요. "이 글자들은 내 혀를 닮았다. 내 목구멍을 닮았다. 백성들의 것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종은 자신을 백성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의 혀가 금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임금의 목구멍이 옥으로 세공된 것도 더더구나 아니었지요. 백성과 똑같았습니다. 내 혀를, 내 목구멍을 닮았다는 말에서 세종이 얼마나 백성과 자신을 같은 자리에 두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었죠. 
여기서 세종이 뿌리가 되었느냐?에 대한 답이 나온 것이지요. 밀본이 견제하던 뿌리가 되었기에 그 권력을 나누고자 했고, 함께 책임지고자 했던 세종이었지요. 드라마를 통해 세종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혹은 정확하게 알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좋았던 메시지는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 더불어 살고자 했던 한 위대한 지도자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절실히 원하는 그런 모습이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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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3 10:42




누구의 죽음부터 정리해 가야할 지, 마지막회는 선혈이 낭자한 죽음들이 이어져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값진 죽음, 개죽음, 죽어야 마땅할 죽음 등이 뒤범벅이 되었지요. 그중 개죽음 1순위에 꼽을 인물은 돌궐족 대적불가 개파이의 죽음이겠죠. 정기준과 어떤 연유로 함께 했는지 조선에 온 이유조차 모르고, 마지막은 변발로 두발단장까지 깔끔(?)하게 하고 죽은 놈이죠. 무휼과 강채윤을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정기준 따라 남의 나라와서 그야말로 살인병기로 이용당하다 죽은 개죽음.
반쪼가리 윤평의 죽음도 그리 아름답지 않았으나 평생 모시는 주군을 지키기 위해 죽었으니, 아무도 원망마라 네 팔자다 싶고...도담댁은 반촌의 행수로 왜 정기준과 밀본에 충성하는지, 대의보다는 정도광 어른에 대한 노예의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대를 이어 충성한 뼈대있는(?) 천민의 죽음 정도되겠습니다. 
마지막 반전은 한가놈(조희봉)이 한명회라는 것, 이 또한 오래전부터 짐작했던 일이었기에 그의 입으로 본명을 말할 때 잠깐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과 부딪칠 때는 몇년 후에 벌어질 참혹함이 떠올라 치를 떨게 했지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고 순진무구하게 지나치는 성삼문과 박팽년의 얼굴이 아른거려, 곧 닥칠 슬픔이 오버랩되는 장면이었지요.
정기준은, 음 마지막까지 쥐새끼같은 행동을 하더군요. 청계천 비밀통로를 따라 경성전에 잠입해서 감히 용상에 앉아 죽었으니, 마지막 길이 호사스럽기는 했으나 끝까지 발칙한 놈이었습니다. 제작진이 정기준의 마지막을 용상에 앉혀 죽이는 것에 당혹스럽고 화까지 나더군요. 용상에서 피까지 꿀럭꿀럭 흘리는 것을 보고는 더럽혀진 용상을 어이할꼬 걱정스럽기 까지 했네요. 풍자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 청계천을 복구한 인물이 옛말로 치면 지금 용상에 앉아 죽을 쑤고 있다죠. 
소이가 해례임을 알게된 정기준은 소이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고, 때마침 현장에 당도한 강채윤과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정기준의 목을 겨냥한 채윤, 소이를 풀어주라고 하고 다행스럽게 도망을 치는데는 성공했지만, 개파이의 독화살을 맞고 소이가 벼랑아래로 떨어져 버리지요.
동이 터오자 의식을 회복한 소이는 독이 퍼져감을 알고 동굴에 몸을 숨겨 제자해를 적어가기 시작합니다. 속치마를 찢어 해례본을 작성한 소이, 소이의 마지막을 보는 시청자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지요. 소이를 찾은 채윤에게 제자해를 반포식에 맞춰 가져가라 이르고는,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게 한 소이였지요. 오라버니 만나서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꿀맛같은 잠을 잘 수 있었노라, 그래서 행복했노라 고백하는 소이, "우리 글자자가 성공적으로 반포되는 모습, 백성들이 그 글자를 읽는 모습, 오라버니 눈을 통해서 꼭 볼거야. 오라버니가 반드시 봐야 돼. 가서 내게 보여줘".
채윤의 품에서 긴 잠에 빠져든 소이였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야 된다는 어명을 지키지 못한 소이였습니다. 언제 누가 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이의 머리맡에 다정하게 놓여있는 목기러기 한쌍에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던지요.
"백성은 고통으로 책임지고 있다고 오라버니가 그랬잖아. 무서워 할 것도 두려워 할 것도 없어. 우리 아버지 석삼이 아재 다 그렇게 죽었잖아", 윗것들 싸움에 머리통 깨지고 밥그릇 빼앗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랫것들의 삶인지, 고통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절실하게 와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이의 제자해를 들고 광화문을 향해 뛰어가는 강채윤의 동공은 풀어졌고, 그의 허망한 눈빛을 통해 삶과 죽음이 부질없음이 느껴졌습니다.
백성들 틈에 쥐새끼처럼 숨어든 정기준은 살인병기 개파이에 의해 세종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지요. 변발로 멋을 낸 개파이는 복싱선수들이 입장을 하듯이 머리까지 시꺼면 옷을 뒤집어쓴 채 세종을 향해 걸어갔고, 금위군의 방어는 속수무책으로 뚫려버리지요. 비호처럼 날아오는 무휼, 몇합을 겨루면서 서로 찌르고 찔리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지만, 개파이 앞에 무릎을 꿇고 만 조선제일검 무휼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주군을 지키기 위해 개파이의 바지를 움켜잡는 무휼의 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가장 슬픈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세종을 향해 하늘을 나는 개파이, 절체절명의 시간에 독수리처럼 하늘을 가르는 이가 있었으니, 소이를 잃은 슬픔조차 가누지 못하고 반포식장으로 해례를 가지고 온 채윤이었습니다. 채윤이 옷이 찢어지며 흩날리는 제자해들은 소이의 눈이었고, 소이의 귀였고, 소이의 입이었고, 소이의 손이었습니다. 소이(해례)는 그렇게 만백성들에게 희망의 씨앗처럼, 바람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지요. 멋드러진 영상미이기도 했지만, 글자가 그렇게 퍼져나감을 의미하는 상징성까지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세종을 지키는 개파이의 바지를 움켜 쥔 무휼, 공중에서 소이(해례)를 가슴에 안고 떨어지는 강채윤의 모습 두 장면은 제가 마지막회에서 가장 가슴아파했고, 의미를 주고 싶은 명장면입니다. 또한 채윤이 소이에게 지어주던 마지막 웃음, "보고 있니 담아, 글자가 반포되었다" 라고 전하는 장면에서 장혁의 표정은 예술이었죠.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 원망도 없었고, 희망의 씨앗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여주고 마지막 임무를 다했다는 듯, 편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백성은 고통으로 책임져 왔다는 똘복이의 말처럼, 이런 고통이라면 행복하였노라고 고백하는 장면처럼도 보였고 말입니다. 죽음도 아깝지 않게 지킬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우리의 글자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의 손에 들린 제자해는 연두의 노력으로 읽히고 있었고, 이미 역병처럼 번져버린 글자를 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정기준은 칼을 거두고 말지요. 조말생의 눈에 걸려 추적을 당해 현장을 뜨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세종과의 마지막 인사가 있었기에 피투성이인 채로 궁으로 잠입하게 하더군요.
무휼과의 일전에서 이미 중상을 입은 개파이였지만, 대적불가 개파이는 채윤에게 버거운 상대였습니다. 베고 베이고 피가 튀는 현장, 끝내 개파이는 채윤의 일격을 받고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지요. 잘가라 퉷! 정말 이놈은 왜 조선에 왔는지 모르겠네요. 견적희마저 짐보따리 싸서 도망쳤다고 하니, 명나라 왈짜패들을 고향으로 퇴출시켜줬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무휼, 채윤을 죽인 너에겐 심히 유감이 많다!
무휼도 채윤도 세종에게 왕의 길을 가라고 했지요. "무휼에겐 무사의 길이 있고, 전하에게는 전하의 길이 있사옵니다",  소이의 행방을 묻는 세종에게 채윤이 눈물로 대답하지요. "어서 가셔야지요. 반포하셔야지요. 담이가 보고 있잖습니까 전하.", 그리고는 가슴에 품고 온 소이를 건네는 채윤이었지요. 무휼과 채윤은 늘 그랬습니다. 언제나 세종이 가는 길을 믿어주고 힘을 주었던, 그의 손과 발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이의 죽음을 예상하는 세종, 왈칵 쏟아지려고 하는 눈물, 그러나 왕은 울 수가 없습니다. 우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 자리가 왕의 자리였습니다. 울컥하는 마음을 주위를 돌아보며 삼키는 세종이었지요. 한석규의 섬세한 감정선에 감탄사 연발하며 울었네요.
제자해를 모아 반포식을 다시 시작하는 세종,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일러 말하고 싶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아, 내 이를 위하여..." 미처 완성하지 못한 서문은 즉석에서 잇는 세종이었습니다. "내 이를 위하여 백성들을 어엿삐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이 씀에 있어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글이 길어져도 세종대왕의 뜻과 백성에 대한 사랑에 감사를 드리고자 훈민정음 서문을 그대로 썼습니다. 소이가 적은 피묻은 제자해를 읽으며, 소이와 글자를 만들던 과정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스물여덟자 해례를 읽어내려가는 세종이었지요.
안간힘으로 글자가 반포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채윤은 쓰러지고 맙니다. "백성은 늘 고통으로 책임진다 하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담이 똘복이처럼...". 소이가 전해달라고 했다는 말을 끝으로 세종의 품에서 눈을 감은 세종의 첫백성 똘복이였습니다. 
풀어진 눈으로 하늘을 향해 담이에게 웃음짓던 채윤의 모습이 머리에서 사라지지가 않네요. 담이에게 그렇게 지켜보았노라고, 너의 눈으로, 또한 나의 눈으로 너의 글자가, 우리의 글자가 반포되는 것을 보았노라고, 그리고 너의 곁으로 가겠노라고 미소짓는 채윤이 모습이 말입니다. 여기서 분위기 확깨는 쓸데없는 말 덧붙이면 혼날텐데, 암튼 요런 것 쓰면 안되는데, 분위기 침울해서 웃음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세종의 품에 안겨 죽은 채윤, 이상한 포즈로 안기다보니 단발머리가 되었더라는;;

무휼과 채윤, 소이의 죽음은 세종을 서있을 힘도 없게 합니다. 그런데 뜨헉, 이게 뉘신가? 정기준이 비밀통로를 통해 쥐새끼처럼 경성전 용상에 떡 하니 앉아있습니다. 피를 질질 흘리면서 말입니다. "니 꼬라지가 이게 뭐냐? 정기준!". 욕도 안나오고 화도 나지 않은 세종, 그만큼 허탈하고 슬펐고, 그만큼 그의 사람을 잃은 허망함이 커서였을 겁니다.
"당신의 글자는 위정자와 지배층에 그렇게 이용될지도 모른다", 정기준이 세종과의 토론을 이었지요. 아주 오래전 성균관의 사당에서 정도전의 치국사상을 놓고 벌였던 논쟁의 일부였지요. 조선경국전 정보위의 내용입니다.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보이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했다. 허나 그 말은 어쩌면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헌데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되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
정기준은 말귀를 알아듣는 백성이기에 위정자들이 더 속이려 들을 지 모른다는 경고를 하지요. 말귀 못알아듣는 개나 산, 바위는 그냥 무시를 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알아듣기에 더 교묘한 수로 속이려 들것이라는 것입니다. 정기준의 말은 여전히 칼처럼 예리합니다. 언론을 통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을 세뇌시키고 있으며, 간교하기 그지없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은 정교하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세종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으로 정기준에게 답하지요. "그들은 그들의 지혜로 지혜를 모색해 갈 것이다. 그리고 매번 싸우고 또 싸우려 할 것이다. 어떤 때는 이기고 어떨 때는 속기도 하고...지더라도 괜찮다. 수많은 왕족과 지배층이 명멸했으나, 백성들은 이땅에서 수만년 동안 살아왔으니까...또 싸우면 되니까".
죽은 정기준을 향해 세종이 울부짖지요.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헌데 이제는 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야. 여기가 이렇게 아픈데, 그것이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가 있겠느냐. 고맙구나 정기준". 세종은 오랜 시간 스스로 고민하고 절망하고 고뇌하며 얻고자 했던 답을 찾았습니다. 백성이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이었지요. 사랑이라고...
희미하게 웃는 정기준은 처음으로 세종을 인정하더군요. 주상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이제 주상의 말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백성의 힘을 믿어보고 싶다는 정기준의 항복과도 같은 인정이었고, 또한 바람이었습니다.
무심하게 흘러버린 시간은 1년후의 향원정에서 멈췄지요. 차디찬 겨울흙을 뚫고 나온 노란 꽃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이 세종의 눈을 붙들었지요. "이 꽃이 원래 여기 있었더냐? 수십년동안 수천번을 바라보았을텐데 저런 꽃이 있는 줄도 몰랐다. 궁의 하늘이 저렇게 파랗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청와대 뒷산을 오르며 같은 말을 했던 분도 있었지요. 참 많은 것들이 겹쳐 보입니다.
아무도 없이 홀로 남은 세종의 주위에는 스산한 바람만이 불고 있었지요. 너무나 고독했고, 너무나 쓸쓸해 보였고, 임금의 길을 두고 오랜 시간 고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길을 가기 위해 밤잠을 포기한 수십년의 시간, 글자를 백성들에게 주고, 세종은 더 고독하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를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던 열정이 사라진 듯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반전처럼 그에게 노란 꽃을 보게 하더군요.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 색의 꽃, 그것은 세종이 만든 글자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글자는 세상의 것이고, 저들의 것이다. 그 글자가 어떤 세상을 만들지도 저들의 책임이다".
일이 없을 때는 향원정에서 그 꽃을 본다는 마지막 대사는 희망을 보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습니다. 수십년동안 피고 지고 반복했을 이름모를 들꽃, 백성은 그렇게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눈길과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보기에는 약하고 여리지만, 추위를 뚫고 나온 인동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말입니다. 세종이 보고 있던 들꽃은 똘복이와 담이였습니다. 글자가 뿌린 씨앗은 또다른 똘복이와 담이, 또 그 아이들이 배우고 익히는 그들의 역사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우리말  우리글자인 한글, 너무나 익숙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쓰고 있지요. 수만번을 봐왔을 꽃인데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문득 한글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음에 놀랍니다. 밀본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한글이 퍼지지 못하도록 천시하고, 천대해야 한다는 새 강령을 마련해 지하로 꽁꽁 숨어들었고, 한명회라는 걸물(?)이 전면에 나서 집현전을 박살내 주겠다며, 다가올 비극들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그후로도 500여년을 한글은 밀본과 싸워온 셈이고, 그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에, 지금은 영어가 대세인 시대가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예언처럼 이도의 길은 훨씬 더 참혹하고 힘든 길인가 봅니다. 그러나 이도는 성공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거의 모든 국민이 문맹을 벗은 오늘, 한글은 이름없는 들꽃처럼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공기와도 같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정기준과의 토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우리는 희망의 이름이 될 것인가? 한글이라는 위대한 글자를 만들어 주신 세종대왕에게, 희망이라 확신시켜 줄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이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세종의 말대로 때로는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항상 싸워왔듯이, 앞으로도 싸울 것이라는 겁니다. 지치지 않고 피어나는 들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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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2 10:47




마지막회를 남겨두고 결말에 있을 반전이 최고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그 중심인물이 연두와 개파이가 될 것이라는 것은 많은 분들이 예상하고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성공적인 반포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아 해례인 소이는 무사히 궁으로 돌아올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을 피했을 지가 궁금한데요, 애타게 담이를 부르며 쫓아간 강채윤에 의해 구해질 확률이 높겠지요.
소이를 죽일 정기준의 수하는 대적불가 개파이의 손까지 빌 필요는 없을테고, 밀본원 중의 한사람일테지요. 정기준은 개파이를 데리고 쑥대밭이 된 산채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은신해, 정기준은 반포식에 맞춰 이도를 죽이라는 마지막 명을 내리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채윤과 개파이, 혹은 무휼과 개파이의 한 판 대결은 어쩌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희생과 피가 따랐던 글자창제와 반포가 마지막까지 피비린 내 나는 속에서 이뤄지지는 않았으면 싶네요. 
견적희가 개파이의 얼굴을 본 순간 경기를 일으키듯 벌벌 떠는 모습만으로도 개파이의 무공이 어느 정도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었지만, 원의 복위조직에 가담한 돌궐족 카르페이 테무칸이라...칸이라는 칭호를 보아하니 그쪽에서는 꽤나 명망있는 후예인데, 정기준을 따라 조선까지 흘러 들어 온 이유가 무엇인지, 두 사람의 관계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개파이가 아무 연고도 없는 조선에 들어와서 한글을 깨친 외국인 1호가 되었으니, 재미있는 설정이죠.

교활한 세종, 인자한 보살미소 뒤에 감춘 무서움
여하튼 밀본의 조직은 산산히 와해되기 일보 직전이고, 계산에 능한 우상 이신적은 세종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3정승의 재가를 얻어 반포의 절차를 합법화시키는 세종의 교활한(?) 수가 빛났지요. 인자한 미소 뒤에 감춰진 세종의 무서움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무휼이 왜 심종수가 아니라 이신적이냐고 물었지요. "심종수는 이신적에 비해 술수가 모자라다. 정치력말이다. 조정신하들은 각각의 과오가 있을 지언정 멍청한 자들은 없다. 모두가 무서운 자들이다. 3정승에 올랐다는 건 그런 무서운 자들 중 가장 정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신적이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은 황희대감보다 더 크다".
세종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과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지요. "왕의 일이란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능력이 백성들을 위해 쓰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무휼은 이런 세종의 용인술을 태종보다 교활하다고 고백하게 하지만, 세종의 교활함은 이해를 넘어 존경의 리더십으로 칭송받게 합니다. 그 목적이 백성을 위함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지옥에 사는데 내가 보살일 줄 알았냐?"는 세종의 웃음 뒤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까지 엿보게 하지요. 나라고 항상 허허할 수 만은 없지 않느냐? 보이지 않게 갚아주는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고백과도 같았으니 말입니다.  

과정이 중요한 일이 있고, 결과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세종의 말은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글자를 만들기 까지의 과정이 중요하지만, 반포를 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기에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세종, 글자의 반포로 비로소 새역사는 시작될 것이기에, 세종의 글자반포에 대한 의지는 천명과도 같았습니다. 반포가 되어야만 백성들을 위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세종의 비장한 표정에는 백성들에 대한 믿음과 희망마저 일렁이고 있었지요. 새로 쓰이게 될 역사에 대한 설레임과도 같은 흥분도 엿보였고 말입니다.

정기준, 열등감은 극복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정기준의 고백은, 설득력과 명분마저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밀본이라는 비밀조직의 수장, 그의 그릇이 이것밖에 안되었나 심히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겠더군요. 소이에게 왜 주상을 돕느냐고 물었지요. 세종으로 인해 아비를 잃고, 자책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말이지요. 정기준은 스스로 세종에 대한 열등감으로 피해의식이 있었다는 것도 고백했지요. 백정으로 신분을 숨기고 20년이 넘도록 살아온 동안, 이도는 그 사이에 세상이 칭송하는 성군이 되어 있는 것을 보는 심정, 그 열등감이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노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정기준은 피해의식과 열등감을 극복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오히려 열폭하는 정기준만이 보이더군요. 정기준은 세종의 글자를 다른 누구보다 칭송하지요. "이도가 만든 글자는 너무나 훌륭한 글자다. 저 훌륭하기 짝이 없는 글자를 막아내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천명임을 깨달았다. 제아무리 왕이어도, 그 무엇이라도 천년의 역사를 시험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난 기필고 그것을 막아낼 것이다".
정기준...이렇게 무너지나요? 참으로 찌질하게 변해가는 정기준때문에 그간 정기준에게 가졌던 그의 대의에 대한 일말의 이해심마저 무너지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기준은 결국 세종에 대한 개인적인 열폭감으로 밀본이니 성리학의 이상이니, 역사니, 백성에 대한 사대부의 책임이니 하는 것들을 떠들고 있었다는 건지, 정기준의 몰락이 초라하기 그지 없네요. 작가가 좀 그럴 듯하게 그려줬으면 좋았겠다는 동정심마저 들게 하더라지요;;. 그래도 20여년이나 와신상담했던 인물인데 말이죠.

똑같은 대사를 통해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이 나오기도 했지요. 유포임무를 수행하러 떠나는 소이가 해례를 옮겨두고 떠나려 하자 세종은 이를 극구 말렸더군요. 그것은 소이에게 반드시 살아돌아오라는 간절함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글자를 만드는 과정부터 지금까지 함께 한 소이에게 세종은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로 소이에 대한 애정을 전했지요. 강채윤이 밥을 굶기지 말아야 할텐데 라는 장난기 섞인 농도 던지면서 말이지요. "하루하루를 즐거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강채윤과 약조하거라". 요즘말로 하면 성혼선서와도 같은 것이었지요. 주례선생님이 약조를 받는 것처럼 말이지요. 채윤과 소이의 행복한 생활이 언급될 때마다 불길한 예감이 들게 하지만, 저는 제작진의 낚시라고 굳게 믿을 거외다!! 
한 사람은 반드시 살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고맙고 미안하다는데, 한 사람은 죽여야 하니 고맙고 미안하다고 똑같은 말을 했지요. 어린 연두마저 글자를 안다는 이유로 죽이라는 명을 내리는 정기준, 그의 눈에도 인간적인 연민은 있기에 눈물이 맺히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죽이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지만, 글자를 막기 위해 무자비하게 백성을 해하는 모습에서 이미 그는 사대부의 갓에 담긴 고고한 이상을 버린 살인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반포식에 독으로 무장한 살수를 풀어 막으려고 까지 하는 그의 광기를 막을 사람은 개파이가 될 듯하지만, 그가 끝까지 세종과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극과 극인 천명과 천명의 싸움, 둘 다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는 기치를 걸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죠.

세종과 이신적의 눈싸움, 명장면 만든 심리전
세종과 이신적의 팽팽한 신경전은 경연장에서도 극에 달했지요. 그 심리싸움의 향방을 가름할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종과 이신적은 서로의 수를 읽느라 눈동자 하나도 놓치려 하지 않는 모습이었죠. 세종의 영리한 선방은 감탄사가 나오게 했지요. 결코 한 마디의 말실수도 하지 않은 치밀함으로 말이지요. 조정 앞마당에 밀본원임을 떳떳이 밝히고 나와 토론하자고 했건만, 쥐새끼 한마리 나오지 않았다며 말문을 연 세종, 마지막 제안을 하겠다고 하지요. "9월 상한날 만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글자반포를 하려하오. 이조는 정음청을 설치하고, 예조는 이 글자를 시험과목으로 도입할 수 있는 시행안을 마련하시오".
아니나다를까 최만리 영감 울그락불그락 아니되옵니다가 이어지지요. 대신들이 어떤 반발을 할지 이미 그 수를 다 읽고 있는 세종, 고단수로 찍소리 못하게끔 해버리지요. "조선이 임금이 독단적으로 밀어부쳐 엄포를 하면 무조건 행하고 따르는 나라요? 조선은 엄연히 의정부 서사제라는 체제하에 있소이다. 과인의 제안을 의정부에서 결정하면 될 일, 의정부 3정승이 논의하고 가부를 결정하면, 그 결정에 따라 교지를 내릴 것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3정승의 재가가 될 것이오".
침묵속에 미주치는 세종과 이신적의 눈빛은 설전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했던 명장면이었습니다. 최만리의 계속되는 반대를 3정승의 논의로 결정하라는 하명을 듣지 못하였느냐며 일축해 버린 이신적, 그의 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요. 황희정승은 찬성, 우상은 일단 반대, 좌상은 분위기 봐서..그 표의 향방이 우상 이신적의 결정에 달린 것이기에 이신적의 한표는 그야말로 역사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제밤의 대답인 것이냐?",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옵니다. 노력을 해보겠다는 뜻이지요". 
세종의 물밑작업은 황희와 조말생을 통해서도 보였습니다. 오락가락 좌상의 한표를 황희와 조말생이 보이지 않게 도우면서 2:1로 우세를 점칠 수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이신적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술이 보통이 아니어서 안심할 상황은 못되지요. 심종수를 요리하는 이신적은 교활을 넘어 노련한 정치9단의 수를 읽게도 했지요. 심종수를 적당히 얼래고 달래며,-물론 이과정에서 주상이 이간질을 했다는 식으로 믿음도 주면서 말이죠,-정기준의 동태를 파악하고 견적희를 보내 끝까지 저울질을 하는 이신적이었기에 말이지요.

반전의 열쇠 연두와 개파이, 광화문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채윤의 연통으로 내금위의 습격을 받은 밀본의 산채, 다행히 연두(정다빈)는 채윤에 의해 구해졌지만, 소이와 강채윤의 생명이 위험상황입니다. 소이가 해례라는 것을 알게 된 정기준이 소이를 죽이라 명하고, 소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강채윤과 한판대결을 벌일 것이 자명하기에 말이지요.
예상상황은 개파이와 정기준은 함께 자리를 뜨고, 채윤보다 무공이 낮은 밀본똘마니와 싸워 강채윤이 무사히 소이를 구할 것이라 저는 예상하고 있는데요, 문제는 반포식 당일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겠지요. 이도를 죽이라는 마지막 명을 받은 개파이가 칼을 마주하는 모습도 나와서, 대적불가 개파이의 선택에 따라 광화문이 피바다가 될지, 성공적인 반포가 이뤄질 지가 결정되겠지요. 
개파이는 아직 연두의 생사를 모르고 있는데, 정기준이 연두를 이용할 것이라 보여지네요. 산채의 습격에도 이렇다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개파이는 오로지 연두가 없어졌다는 말만 했을 뿐이었지요. 그러니 연두라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드는 개파이에게 정기준은 연두가 내금위에 잡혀있다는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있지요. 허나 정기준이 연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 개파이는 정기준을 단칼에 버릴 것입니다.
이도를 죽이라는 명을 받고 광화문에 개파이가 나갈지 안나갈지는 모르지만, 개파이가 정기준에게 칼을 돌릴 것이라는 암시가 예고편에 나왔지요. "그동안 즐거웠다, 본원" 이라는 개파이의 말은 왠지 정기준에 대한 예의를 갖춘 살해암시가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정기준이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제작진의 예고편으로 오히려 머리가 뒤죽박죽된 느낌입니다.
다만 한가지 광화문에서 살아있는 연두를 본 개파이가 정기준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세종의 시해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예상되는 시나리오입니다. 강채윤이 세종대신 독화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피흘리는 장면도 상상되고, 세종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휼이 세종을 온몸으로 막고 죽는 모습도 상상되고 여러가지로 마음이 복잡스럽습니다.
중요한 점은 광화문에 연두가 힘께 있을 거라는 것이죠. 개파이가 연두를 구하기 위해 살수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오히려 성공적인 반포를 돕게 되는 결말도 상상되네요.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다 보니ㅎㅎ. 그래도 훈민정음 반포라는 역사적인 현장에 피바람은 불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봅니다.
사람도 잃고, 대의도 상실하고, 이도에 대한 열등감에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정기준, 결국 훈민정음 반포는 성공하고 정기준이 말했듯이 그와 이도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도 끝을 맺을 것입니다. 세종의 말이 이 대목에서 결말을 암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자를 만들기 까지의 과정이 중요하지만, 반포를 한다는 것은 결과가 중요하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겨야만 일이 시작되니까. 이겨야만 백성들을 위해 일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정기준과 세종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일지 모릅니다. 글자가 반포에서 그치지 않고 널리 유포되어 만백성이 읽고 쓰고 제 뜻을 펼치는 그날까지, 누군가는 백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치열하게 싸울 것이고, 누군가는 백성의 커지는 힘을 막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죠. 백성이 권력을 가지는 세상을 막기 위해, 말로는 혼돈을 피하고 역사를 위해서라지만, 백성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제2의 정기준은 얼굴과 이름만 달리할 뿐 계속해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싸움이죠. 비록 드라마지만 백성이 주체가 되는 세상의 시작을 백성의 글자, 한글을 통해 열어 준 세종대왕, 그 싸움의 결과는 세종에게도 집현전 학사들에게도 사대부들의 손에도 달려있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달려있죠. 세종과 정기준이 남겨둔 토론의 마지막 주제, 백성의 책임, 몫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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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7 09:04




뿌리깊은 나무에서 간댕이가 배밖으로 나오다 못해 심지어 마당까지 쓸고 있는 인물이 둘 있었죠. 감히 임금의 이름자를 부르는 대역죄인들로 그 자리에서 목을 뎅강 잘라버려도 할말없을 강채윤과 정기준입니다. 유일하게 세종을 이도라고 칭하며 어금니를 갈던 인물들이죠. 세종과는 개인적인 원한과 사상적 이념적 대립으로 얽혀 드라마의 대립축을 형성했던 인물들입니다. 강채윤은 드라마 중반까지도 세종과 화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원수 이도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고, 정기준은 세종의 권력을 무력화시켜 상징적인 꽃으로 남겨두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큰 변수가 생겼지요. 세종이 만든 글자때문입니다. 세종의 글자는 강채윤에게는 생생지락의 희망이 되게 했고, 전장을 누비며 갈아왔던 복수심을 내려놓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백성도 대의라는 것을 가져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설레이게 합니다. 소이와의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그의 아들 딸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또 그 아들 딸의 아들 딸들이 글자를 익혀, 지금보다는 삶이 덜 고달파질 것을 꿈꾸게 하죠.

정기준에게 글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게 하는 것이 세종의 글자였고, 혁명과도 같은 글자, 역병과도 같은 무서운 파급력을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분산, 그것도 백성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무지몽매한 군중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것이었으니, 정기준은 혼돈에 빠질 조선의 미래를 염려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도의 무책임한 책임 떠넘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성리학보다, 사대부의 임무보다, 정도전의 밀본지서보다, 글자를 막는 것이 그의 시대적 사명이 된 것은, 어찌보면 백성에게 권력을 나눠주려는 세종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해, 백성의 미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정륜암에서의 끝장토론은 무승부였고, 어느쪽도 설득하지 못하고 설득당하지도 못했지요. 책임부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들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세종도 정기준을 만나고 와서 흔들렸고, 정기준 역시 사대부가 백성을 교화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고요.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화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채 서로의 길을 더 치열하게 가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불씨일대기를 펴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버린 정기준이었고, 글자로 인해 벌어질 미래가 혼돈일 지, 희망일 지는 그들의 몫으로 두겠다며, 현재의 백성을 위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겠다는 세종이었지요.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글자를 쓰면서 맨 마지막으로 바를 정(正)자를 썼던 것은, 백성에게 글자를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그가 내린 결론이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정기준을 어떻게 처리할까는 제작진 뿐만이 아니라, 시청자에게도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2회만을 남겨두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 어떤 결말이 될지, 아니 누가 죽게 될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두고 지켜보겠지만, 저는 정기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더 무게를 두고 생각중입니다. 작가는 아니지만;;
정기준과 강채윤은 세종에게는 임금으로서 어떤 일을 할 것이며, 어떤 군왕이 될 것인가에 대한 아킬레스건이자 트라우마였고, 과제였습니다. 세종이 강채윤을 두번째 판관이라면서, "가장 멀리있는 자이니 가장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더냐" 라고 했었지요. 강채윤과 정기준의 공통점은 세종에 대해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 혹은 그 아들이라는 복수심과 분노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세종이 하는 일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인간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기에, 가장 멀리있을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그들이 세종의 글자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다른 누구의 판단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채윤과 정기준이 원한과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한다는 것이야 말로 글자의 성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두 사람 모두 세종의 글자를 보았고, 강채윤은 머리를 조아려 완전히 세종에게 감복하고 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처음으로 뱉은 강채윤의 인사는 판관으로서 글자에 대한 그의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정기준도 세종의 글자를 판단했고, 놀라운 글자, 훌륭한 글자라고 인정했지요. 그러나 글자가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세종의 뜻에 동의하지 못하는 정기준이지요.
정기준은 세종에 대한 글자를 보고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글자를 알게 된 백성이 지혜를 가지게 되고, 들끓는 군중의 욕망이 정치를 향하게 될 때의 혼돈에 대한 공포입니다. 백성의 욕망에 대한 경계이지만, 정기준의 생각을 사대부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정륜암에서 세종은 정기준에게 핵심적인 말을 했었습니다. 정기준이 경계하고 걱정하는, 백성이 힘을 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에 대해서 말입니다. 정기준은 백성의 들끓는 거대한 욕망을 만나면 공포에 질리게 된다고 했죠. 그 욕망들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요. 욕망들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백성의 욕망은 정치를 향하게 돼 있으며, 나아가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려 들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까지 했지요. 백성들이 뽑은 지도자가 실정을 하면, 그 백성들을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냐며, 세종이 글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려고 하는 본심은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지요. 자신이 백성으로 살았기에 백성들에게 희망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책임을 질 수 있는 몇몇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라면서 말이지요.
그 때 세종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대체 너는 백성에 대한 신뢰가 어찌 그리도 없단 말이냐? 정말 측은한 일이다".
세종은 울부짖고 분노하는 백성을 통해, 힘없는 백성과 무서운 백성을 동시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랜시간 참고 인내하며 설득해왔죠. 강채윤을 설득한 것이 그 예지요. 그 진심이 전해졌을 때 강채윤은 완전한 세종의 백성으로 거듭났고, 누구보다 강하게 신뢰할 수 있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힘이 아닌 말로 설득했고, 취함이 아니라 베품으로 설득했고, 명령이 아니라 허락으로 설득했고, 고기를 잡아 먹여주지 않고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쳤고, 고기가 아닌 그물을 주었습니다.
강채윤은 여전히 감시자입니다. 왕의 가장 강한 견제자입니다. 윗것들 싸움이 아랫것들을 살리는지 죽이는지를 두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그래서 죽이면 안되욤!!!

중요한 정기준을 어떻게 처리할까의 문제입니다. 세종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뒀습니다. 그를 이도라고 부르는 가장 멀리있는 자 중 한사람만을 설득했으니 말입니다. 정기준과의 화해, 혹은 정기준을 설득해야 만이 세종의 대의가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의에 대한 평가는 말 그대로 후세의 몫일지라도 말이지요. 
여기서 강채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강채윤은 백성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소이와 나인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들은 한글창제에 동참하고 유포라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일이라고 신명나게 합니다. 명령을 받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 일을 합니다. 강채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멀리있는 자가 가장 가까이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주인의식이었습니다. 희망에 대한 설레임때문이었습니다. 
정륜암에서 정기준은 칼을 겨누고 있던 강채윤을 천 것이라는 말로 자극하려 했지요. 어찌 아비를 죽은 원수인 임금의 편에 설 수 있느냐며, 그것을 천한 노예근성이라고 채윤의 감정을 자극하려 했었지요. 그때 채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칼로 대답하려는 것을 소이가 말려 상황을 정리시켜 버렸고요.
세종과 정기준이 남겨둔 토론의 결말은 강채윤과 정기준이 해결지어야 할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백성의 책임, 백성의 욕망에 대한 답이 바로 강채윤이기 때문입니다. 강채윤이라는 인물은 드라마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캐릭터입니다. 처음 강채윤이 등장했을때 깨방정을 떨며 사기꾼처럼 위장했던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겸사복이 되어서는 원수 이도를 죽일 기회가 가까워졌음에 오직 어사주를 받는 날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고 수사에 뛰어드는 수사관으로 진중해져 갔지요. 세종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이후 강채윤은 가치관의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글자가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글자를 백성들을 위해 주네마네 하는 임금도 웃겼고, 백성들이 글자 좀 익히는 것이 뭐 대수라고 성균관 유생이 투신자살까지 하는지 한마디로 꼴갑들이었지요.
윗것들의 싸움이 윗것들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글자가 줄 희망때문이었습니다. 아랫것들이 똑똑하지 못하면 윗것들의 싸움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희망을 가지고 주체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에 대한 욕망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기준이 간과한 것은 이것입니다.

강채윤은 세번에 걸쳐 세종을 잡아주는 백성 역할을 충실히 했지요. 집현전 학사의 죽음이 연이어 벌어졌을때, 흔들리는 세종은 강채윤의 "결심이 왜 결심이겠느냐"는 말에 너는 너의 길을 계속 가거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라고 의지를 세웠지요. 광평대군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세종에게 강채윤은 한발짝 더 나와 힐난하기 까지 했습니다. "전하는 한방울의 눈물을 흘리실 자격이 없으십니다" 라고요. 위험에 처한 소이때문에 또 세종은 흔들렸지요. 그때도 강채윤은 백성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또 흔들리고 계십니까? 흔들림없지 전하의 길을 가십시오".
정기준은 왜 강채윤이 세종의 일에 함께 하는지 그것을 욕망때문이라고, 이도가 심어준 거짓 사탕발림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백성에 대한 신뢰가 없는 그이기에 말이지요. 세종을 가장 신뢰한 것은 결국 백성이었습니다. 백성이 신뢰하는 것은 세종이 아닙니다. 세종의 뜻이며, 백성에게 향하려 한 세종의 진심입니다. 백성은 정기준의 우려처럼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해서 정치에 관여할 여력이 없는 것이 백성입니다. 백성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잡초처럼 스스로 자생하고 커갑니다. 강채윤을 변화시킨 것은 세종이 아니라, 세종이 뿌리내려 주려한 희망때문이었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세종을 세워줬던 것은 백성 강채윤이었지요. 백성을 위한다고 말로만 성리학의 나라, 사대부 선비입네 하면서, 진정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왜 반대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인물은 세종이 아닌, 백성 강채윤입니다. 그가 임금이나 사대부나 그토록 강조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정기준의 우려처럼 백성은 무지몽매하지만은 않지요. 스스로 판단하고 자각하고 커가는 것이 백성입니다. 글자는, 세종의 글자는 이런 백성들을 더 많이 만들 것이며, 이렇게 자각하는 백성이 많아지면 사대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어있는 백성은 사대부를 깨어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똑똑한 국민은 결코 멍청한 정치인을 용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똑똑하고 강한 백성이 있는 한, 나라는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왕조의 이름이나 지배세력은 달라지겠지만, 백성은 결코 뿌리가 잘려나가지 않습니다. 정기준이 이 부분에서 세종과 화해했으면 싶군요.
결말에 반전이 있을 거라는 예상도 되고, 정기준의 자결과 밀본의 와해를 다룰 가능성이 크지만, 저는 왠지 세종이 정기준을 살릴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세종이 반쪼가리 윤평에게 했던 말이 있었지요. "나는 피로써 갚지 않겠다. 다만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네 놈들이 어떻게 실패하는지". 세종의 치세에 사사시킨 예가 없다는 점에서도, 정기준이 잡힌다면 사형을 시킬 세종은 아닐 듯합니다. 물론 정기준의 최후는 배신한 밀본원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광평대군에게 사과하며 했던 말처럼, 깔끔하게 자결로 마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저는 혼자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키득거린답니다. 세종이 정기준을 산골오지니 섬에 귀양을 보내 숨어살게 하면서, 그곳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훈장을 하라는 것으로 벌을 내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정도전의 후손에 대한 세종의 마지막 예우로도 말입니다.

무엇보다 정기준과 세종이 화해해야 하는 이유는 세종이 꿈꿨던, 모두를 품는 마방진이 진정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입니다. 정기준은 세종이 마지막까지 참고 인내하며 설득해야 할 마지막 조각이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글자가 백성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역사를 어떻게 다르게 했을 지, 세종도 정기준도 모르는 일입니다. 희망의 씨앗일지, 지옥문을 여는 시작일지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성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살기와 원한을 버리고 글자를 지키려는 강채윤, 목숨을 걸고 글자를 유포시키려는 소이와 같은 나인들의 설레임, 그것은 역사의 주체가 되어가는 작은 시작이었을 겁니다.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갈 때 힘이 되어 움직입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을 믿는 것이며, 미래를 믿는 것이기에 희망이라 하는 것이겠지요. 씨를 뿌리는 농부가 수확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씨를 뿌릴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백성들에게 일렁이고 있는 희망을 정기준이 마지막까지 외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기준 그 역시도 백성에게 이로운 것을 고민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을 거라 믿기에 말입니다. 정기준이 죽음을 맞이하든, 제가 생각하는 한글훈장님이 되라는 벌((ㅎㅎ)을 받든, 마지막에 한가지는 꼭 했으면 합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까지는 아니어도, 이도가 아니라 '전하'라고 진심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제가 바라는 해피엔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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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6 10:41




소이, 덕금, 목야가 납치되었음을 알고 고심하는 세종, 글자로 인해 또다시 자신의 사람들이 위험에 처한 것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세종을 잡아준 이는 채윤이었지요. 누구보다 소이의 안위에 애간장이 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채윤이지만 세종을 탓하지 않지요. 소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때문이라며, 세종에게 전하의 길을 계속 가라는 채윤이었습니다. 혁명과도 같은 글자는 강채윤에게도 목숨을 걸고 지킬 그 무엇이었습니다. 소이가 원하는 길이라는 것, 또한 강채윤이 처음으로 가져 본 대의라는 것,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거지들을 죽여버리고, 아이들에게 죽음을 부르는 노래라고 글자가 퍼져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 살인병기 윤평, 글자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수거하고 나인들을 납치해 밀본산채로 데려갔지요. 소이가 해례라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는 정기준은, 글자의 유포를 막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러나 밀본내에 불고 있는 배신의 그림자는 피바람을 예고하며 밀본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심종수와 이신적의 동상이몽은 정기준을 몰아내고 밀본의 수장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각각의 명분으로 등을 지고 맙니다. 삼봉 정도전의 유지를 이어가겠다며 밀본의 차기 수장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심종수, 밀본이라는 붕당의 수장이 되어 재상총재제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라는 제안을 받은 이신적, 대의와 명분은 욕망이라는 덫에 걸린 채 서로를 향해 칼부리를 겨누고 있으니, 이 상황을 지켜보는 정기준이야말로 가장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밀본과 글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도담댁과 한가놈(조희봉)의 충정어린 호소는, 정기준으로 하여금 큰 결심을 하게 할 듯 보이더군요.
재상총재제의 구현이 조선 정치체제의 안정을 위한 삼봉 정도전의 이상이고, 한 사람의 왕에 의해 나라의 명운이 좌지우지되는 것보다는, 현명한 다수의 사대부들이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더 이로울 것이라는 삼봉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지만, 정기준은 기필코 글자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글자는 말이다, 이도와 내가 서로의 생각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난 역사를 놓고 벌이는 이도의 이 위험천만한 장난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정치를 하는 자가 백성을 두고 어찌 될지도 모르고, 자신이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시험을 해보려 하다니, 기껏해야 50년도 다스리지 못하는 일개 왕따위가!!!".

정기준의 말은 현재의 우리가 듣기에는 한참이나 잘못된 생각이지만, 당시로서는 지식인의 고민이었고, 무게였을 겁니다. 정기준에게는 글자를 막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백성과 역사에 대한 책임이었습니다. 글자로 인해 벌어질 혼돈을 방지하자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백성에 대한 걱정이었고, 역사에 대한 책임부분이었지요. 글자가 무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글자도 일종의 체제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고관이지요. 글자에도 하늘과 땅, 상하 질서계급을 부여한 철저한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었죠. 
정기준이 말은 다른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이 국민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그 역사적, 정치적 책임부분에서 진지한 고민보다는, 특히 실적위주의 정치를 펴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말입니다.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려는 분들보다는 정기준의 고민이 오히려 진지하게 들리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정기준과 이도는 글자가 가질 역사적 가치와 백성의 희망이라는 부분에서 생각의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지만, 백성에게 이로운 것에 대해 같은 무게로 고민하는 지식인들이라는 점에서는 화해의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심종수의 하극상의 칼 역시 정기준에게 충격이었겠지만, 심종수의 말은 정기준이 글자를 막는 것에 급급해 간과한 것을 곱씹어 볼 여지를 주기도 했지요. 
밀본은 말 그대로 하극상으로 칼부림이 나기 일보직전입니다. 예고편을 보며 심종수가 조선의 선비다 라는 말로 비장한 결심을 하는 장면이 보였는데요, 정기준을 치기 위해 칼을 드는 것 같더군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게 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정기준은 세종에게 백성의 욕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글자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정작 정기준은 권력의 욕망 앞에 부서지고 배신하는 밀본원들을 보게 되지요. 박쥐형 이신적의 욕망, 사대부의 대의라는 말로 명분을 세웠지만 심종수 역시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인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이 누구를 위해 쓰이는가 겠지요. 대의와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눈가림한 사대부 기득권층을 위한 욕망인지, 진심으로 백성을 향하는 욕망인지 말입니다.
정기준이 하극상의 칼을 받고 경악하는 시각, 세종은 이신적을 만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적 담판에 나섰지요. 노련한 정치 100단들의 허허실실 대화는 소름끼치게 흥미로웠던 장면이었습니다. 안석환이라는 중견배우의 내공과 한석규의 미친연기력이 추위도 녹여버릴만큼 숨막히게 하더군요. 본심들을 감춘 웃음이 서로 어떤 의미인지를 다 알면서도, 내숭으로 눙을 치는 두 사람의 독대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겪은 고수들의 한판이었죠.
전하의 길을 가라는 채윤의 응원에 탄력받은 세종, 이신적을 쥐도새로 모르게 가마에 태워 와 술상앞에 마주합니다. 세종에게도 이신적에게도 철저한 보완이 필요했기에, 007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으로 말이지요. 초반에는 쓸데없는 말로 분위기에 흥을 돋구지요. "내 치세를 어떻게 보시오?", 이런 것을 질문이라고, "태평성대지요...". 다 신료들 덕분이오, 우상도 고생많으셨소. 술한잔 기꺼이 하사하는 세종, 우상이 술을 마시기도 전에 간이 콩알만해지는 질문을 던지지요.
 "밀본이시오?". 세종 정말 화끈하십니다! 우상 이신적 속에서는 간이 철렁 소리를 냈지만, "소신이 어찌..", 애매모호한 답을 하지요. "아이고, 농이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이신적을 가지고 노는 세종, 밀당의 고수였죠. 얼랬다 달랬다 사탕물리고 옆구리 차고, 아무튼 세종대왕 짖궂기도 하셔라~

그리고는 강도높은 질문에 들어가지요. "밀본의 가장 큰 대의가 재상총재제인데 어찌 그걸 거부하셨소?". 집현전과 글자를 두고 거래를 했다가 협상당일 결렬되고 말았던 일을 끄집어내는 세종이었지요. 영리하게 세종은 우상이 빠져나갈 쥐구멍 하나는 만들어 줍니다. "아, 우상이 밀본이라는 가정하에 말이오". 일종의 오프 더 레코드에 해당되는 세종의 영리한 수였지요.
이신적도 세종이 자신이 밀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듯 보였지만 능란하게 받아 치지요. 밀본이라고 가정하고 답을 올리겠다고 말이지요. "그것은 내부에 의견을 달리한 자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는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끙끙 앓던 속풀이까지 하지요. "소신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무엇이 재상총재제보다 우선할 수 있겠습니까? 어쩔 줄 몰라 미치겠습니다". 이신적의 말에는 글자반포를 양보해 주고 재상총재제를 관철시켜, 재상의 자리에 앉겠다는 야무진 꿈을 깨버린 정기준에 대한 원망이 들어있었지요. 밀본에 분열이 생긴 거냐고 묻는 세종, 이신적 아차 걸렸구나 싶어 또 안절부절 눈이 팽글팽글 튀어나올 지경입니다. 요럴 때는 웃어주는 것이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특효약이죠. 우상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 몰랐다고 세종 껄껄껄 웃어보이지요.
세종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지요. 밀본에게 자복하고 나와서 토론하자고 했는데, 왜 우상은 자수를 안했냐며, 아~주 부드럽게 물어 주시지요. "믿음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전하를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을까? 무인정사때 삼봉선생이 참혹하게 죽은 후 역당으로 낙인 찍힌 세월이 수십년입니다. 그 긴 세월의 기억을 하루 아침에 잊고, '소신이 밀본입니다' 라고 나서기에는 불안한 것이겠지요".
"경연장에서 광평을 죽인 것에 대한 죄를 묻지 않겠다, 또 밀본을 붕당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보다 더 믿음을 줄 수는 없소이다", 요지는 이렇게 많이 양보하고 참아줬는데 뭘 더 내놓으라는 것이냐고 돌려말하는 세종이었습니다. 이신적의 대답도 만만치 않았지요. 전하는 최선을 다했지만, 인간의 뿌리깊은 불안을 달래주지는 못하셨다고 받아치지요. 그 불안감을 달래줄 수는 없으니, 그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떠보는 세종이었지요.
세종도 영리하지만 이신적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또 쥐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이신적이었지요. "소신 멍청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못알아 듣겠습니다". "이런 답답한..." 세종의 너털웃음 웃음 뒤에는 이런 마음을 숨겨버리더군요(허, 요놈 봐라, 목숨줄 길게 붙들고 살고 싶다 이거지?). 짧은 순간 일그러지는 입모양이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더군요. 한석규의 세심한 연기는 입술이라고 예외가 없더라고요. 입속의 혀까지도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하는 듯 보였고 말이지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싹하게 무섭기까지 한 입모양에서는, 이신적을 한 대 치고 싶어하는 세종의 심정마저도 느껴졌으니 말입니다. 
의미없는 헛웃음으로 대화를 정리하는 세종, 그러면서 한말씀 콕 찔러 오줌 잘금거리게 만들어 버리지요. "우상께서 이리 그럴 듯하게 얘기하시니, 내 우상대감이 밀본인 줄 알겠소". 하하하. 이신적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몰랐을 겁니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냐', 뭐 이런 심정이었겠죠.
밀담은 끝났고 먼저 나가는 우상, 그냥 돌려보낼 세종이 아니었지요. 진짜 본론이 남았는데 말입니다. 이신적에게 빼도박도 못하게 세종이 쐐기를 박아버리지요. "정기준을 넘기시오". 크헉...심장이 쪼그라지게 하는 세종의 말에 이신적의 눈이 튀어 나오더라죠. 세종의 말인즉슨 정기준을 넘기고, 스스로 밀본임을 자복해서 밀본의 수장이 되어 조정에서 재상총재제를 주장하라는 폭탄제안이었습니다. 불안해서 믿지 못하겠다면, 스스로 그 믿음을 만들어 보라는 말이 이것이었죠. 붕당의 수장이 되어 과연 세종이 어떻게 나오는지 직접 경험하고 믿어보라고 말입니다.
다른 의견이라 하여 대역으로 몰지 않겠다, 자신과는 다른 정치관을 가진 붕당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세종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밀본입니다. 개미새끼 한마리도 조정 앞마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세종이 대역조직인 밀본마저 품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죠. 이신적에게 붕당의 깃발을 들고 나오라고 제안한 것은 두가지의 노림수가 있었죠. 하나는 정기준의 소재를 알아 정기준과 담판을 하고, 소이를 구하기 위해서 였지요. 또 하나는 밀본이 스스로 와해되든지, 명분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커가는 기회를 갖든지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와해되는 밀본, 배신에 배신이 겹치는 상황에서 정기준의 생각은 어떻게 변할까가 가장 궁금한 대목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상상해 왔던 시나리오를 내일 올릴 예정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

오늘의 보너스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정인지가 최만리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마구마구 웃었답니다. 정인지와 최만리가 동갑이라죠. 일찍 곰삭아 버린 최만리가 놀림받을 때마다 자네 편들어줬다고 생색내는 정인지가 웃음 하나 터뜨려 주지요. 자기가 동안인 것이지 최만리가 노안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말이죠. 최강의 동안 정인지, 최강의 노안 최만리 두 동기동창생의 대화가 은근 웃겼습니다.
워낙 근엄한 최만리대감, 생전에 웃어는 봤을까 싶은 표정인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결국 웃음을 터뜨리시기는 하더라죠. 그것도 근엄한 웃음이기는 했습니다만.ㅎㅎ 물론 역사에도 나와있듯이 최만리는 끝까지 한글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최만리의 생각을 고집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당시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깨지기는 쉽지 않았겠죠. 생각의 틀을 깬다는 것, 그게 항아리 깨듯 쉬운 것이라면, 역사는 수백번도 하루아침에 바뀌고 새로 쓰이고 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딘 걸음일지라도 역사는 바뀌어 왔고, 새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가 새로 쓰이는 그 순간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소이와 강채윤, 그리고 세종이라는 위대한 인물처럼 말입니다. 국가적으로 큰 일들을 앞두고 있는 지금, 어쩌면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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