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22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12.17 '뿌리깊은 나무' 결말반전, 세종과 정기준은 화해할 수 있을까? (5)
  2. 2011.12.16 '뿌리깊은 나무' 화끈한 세종, 너털웃음 속에 감춘 무서운 한 수 (5)
2011.12.17 09:04




뿌리깊은 나무에서 간댕이가 배밖으로 나오다 못해 심지어 마당까지 쓸고 있는 인물이 둘 있었죠. 감히 임금의 이름자를 부르는 대역죄인들로 그 자리에서 목을 뎅강 잘라버려도 할말없을 강채윤과 정기준입니다. 유일하게 세종을 이도라고 칭하며 어금니를 갈던 인물들이죠. 세종과는 개인적인 원한과 사상적 이념적 대립으로 얽혀 드라마의 대립축을 형성했던 인물들입니다. 강채윤은 드라마 중반까지도 세종과 화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원수 이도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고, 정기준은 세종의 권력을 무력화시켜 상징적인 꽃으로 남겨두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큰 변수가 생겼지요. 세종이 만든 글자때문입니다. 세종의 글자는 강채윤에게는 생생지락의 희망이 되게 했고, 전장을 누비며 갈아왔던 복수심을 내려놓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백성도 대의라는 것을 가져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설레이게 합니다. 소이와의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그의 아들 딸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또 그 아들 딸의 아들 딸들이 글자를 익혀, 지금보다는 삶이 덜 고달파질 것을 꿈꾸게 하죠.

정기준에게 글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게 하는 것이 세종의 글자였고, 혁명과도 같은 글자, 역병과도 같은 무서운 파급력을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분산, 그것도 백성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무지몽매한 군중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것이었으니, 정기준은 혼돈에 빠질 조선의 미래를 염려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도의 무책임한 책임 떠넘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성리학보다, 사대부의 임무보다, 정도전의 밀본지서보다, 글자를 막는 것이 그의 시대적 사명이 된 것은, 어찌보면 백성에게 권력을 나눠주려는 세종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해, 백성의 미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정륜암에서의 끝장토론은 무승부였고, 어느쪽도 설득하지 못하고 설득당하지도 못했지요. 책임부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들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세종도 정기준을 만나고 와서 흔들렸고, 정기준 역시 사대부가 백성을 교화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고요.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화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채 서로의 길을 더 치열하게 가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불씨일대기를 펴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버린 정기준이었고, 글자로 인해 벌어질 미래가 혼돈일 지, 희망일 지는 그들의 몫으로 두겠다며, 현재의 백성을 위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겠다는 세종이었지요.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글자를 쓰면서 맨 마지막으로 바를 정(正)자를 썼던 것은, 백성에게 글자를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그가 내린 결론이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정기준을 어떻게 처리할까는 제작진 뿐만이 아니라, 시청자에게도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2회만을 남겨두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 어떤 결말이 될지, 아니 누가 죽게 될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두고 지켜보겠지만, 저는 정기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더 무게를 두고 생각중입니다. 작가는 아니지만;;
정기준과 강채윤은 세종에게는 임금으로서 어떤 일을 할 것이며, 어떤 군왕이 될 것인가에 대한 아킬레스건이자 트라우마였고, 과제였습니다. 세종이 강채윤을 두번째 판관이라면서, "가장 멀리있는 자이니 가장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더냐" 라고 했었지요. 강채윤과 정기준의 공통점은 세종에 대해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 혹은 그 아들이라는 복수심과 분노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세종이 하는 일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인간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기에, 가장 멀리있을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그들이 세종의 글자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다른 누구의 판단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채윤과 정기준이 원한과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한다는 것이야 말로 글자의 성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두 사람 모두 세종의 글자를 보았고, 강채윤은 머리를 조아려 완전히 세종에게 감복하고 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처음으로 뱉은 강채윤의 인사는 판관으로서 글자에 대한 그의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정기준도 세종의 글자를 판단했고, 놀라운 글자, 훌륭한 글자라고 인정했지요. 그러나 글자가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세종의 뜻에 동의하지 못하는 정기준이지요.
정기준은 세종에 대한 글자를 보고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글자를 알게 된 백성이 지혜를 가지게 되고, 들끓는 군중의 욕망이 정치를 향하게 될 때의 혼돈에 대한 공포입니다. 백성의 욕망에 대한 경계이지만, 정기준의 생각을 사대부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정륜암에서 세종은 정기준에게 핵심적인 말을 했었습니다. 정기준이 경계하고 걱정하는, 백성이 힘을 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에 대해서 말입니다. 정기준은 백성의 들끓는 거대한 욕망을 만나면 공포에 질리게 된다고 했죠. 그 욕망들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요. 욕망들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백성의 욕망은 정치를 향하게 돼 있으며, 나아가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려 들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까지 했지요. 백성들이 뽑은 지도자가 실정을 하면, 그 백성들을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냐며, 세종이 글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려고 하는 본심은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지요. 자신이 백성으로 살았기에 백성들에게 희망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책임을 질 수 있는 몇몇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라면서 말이지요.
그 때 세종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대체 너는 백성에 대한 신뢰가 어찌 그리도 없단 말이냐? 정말 측은한 일이다".
세종은 울부짖고 분노하는 백성을 통해, 힘없는 백성과 무서운 백성을 동시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랜시간 참고 인내하며 설득해왔죠. 강채윤을 설득한 것이 그 예지요. 그 진심이 전해졌을 때 강채윤은 완전한 세종의 백성으로 거듭났고, 누구보다 강하게 신뢰할 수 있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힘이 아닌 말로 설득했고, 취함이 아니라 베품으로 설득했고, 명령이 아니라 허락으로 설득했고, 고기를 잡아 먹여주지 않고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쳤고, 고기가 아닌 그물을 주었습니다.
강채윤은 여전히 감시자입니다. 왕의 가장 강한 견제자입니다. 윗것들 싸움이 아랫것들을 살리는지 죽이는지를 두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그래서 죽이면 안되욤!!!

중요한 정기준을 어떻게 처리할까의 문제입니다. 세종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뒀습니다. 그를 이도라고 부르는 가장 멀리있는 자 중 한사람만을 설득했으니 말입니다. 정기준과의 화해, 혹은 정기준을 설득해야 만이 세종의 대의가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의에 대한 평가는 말 그대로 후세의 몫일지라도 말이지요. 
여기서 강채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강채윤은 백성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소이와 나인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들은 한글창제에 동참하고 유포라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일이라고 신명나게 합니다. 명령을 받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 일을 합니다. 강채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멀리있는 자가 가장 가까이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주인의식이었습니다. 희망에 대한 설레임때문이었습니다. 
정륜암에서 정기준은 칼을 겨누고 있던 강채윤을 천 것이라는 말로 자극하려 했지요. 어찌 아비를 죽은 원수인 임금의 편에 설 수 있느냐며, 그것을 천한 노예근성이라고 채윤의 감정을 자극하려 했었지요. 그때 채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칼로 대답하려는 것을 소이가 말려 상황을 정리시켜 버렸고요.
세종과 정기준이 남겨둔 토론의 결말은 강채윤과 정기준이 해결지어야 할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백성의 책임, 백성의 욕망에 대한 답이 바로 강채윤이기 때문입니다. 강채윤이라는 인물은 드라마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캐릭터입니다. 처음 강채윤이 등장했을때 깨방정을 떨며 사기꾼처럼 위장했던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겸사복이 되어서는 원수 이도를 죽일 기회가 가까워졌음에 오직 어사주를 받는 날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고 수사에 뛰어드는 수사관으로 진중해져 갔지요. 세종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이후 강채윤은 가치관의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글자가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글자를 백성들을 위해 주네마네 하는 임금도 웃겼고, 백성들이 글자 좀 익히는 것이 뭐 대수라고 성균관 유생이 투신자살까지 하는지 한마디로 꼴갑들이었지요.
윗것들의 싸움이 윗것들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글자가 줄 희망때문이었습니다. 아랫것들이 똑똑하지 못하면 윗것들의 싸움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희망을 가지고 주체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에 대한 욕망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기준이 간과한 것은 이것입니다.

강채윤은 세번에 걸쳐 세종을 잡아주는 백성 역할을 충실히 했지요. 집현전 학사의 죽음이 연이어 벌어졌을때, 흔들리는 세종은 강채윤의 "결심이 왜 결심이겠느냐"는 말에 너는 너의 길을 계속 가거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라고 의지를 세웠지요. 광평대군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세종에게 강채윤은 한발짝 더 나와 힐난하기 까지 했습니다. "전하는 한방울의 눈물을 흘리실 자격이 없으십니다" 라고요. 위험에 처한 소이때문에 또 세종은 흔들렸지요. 그때도 강채윤은 백성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또 흔들리고 계십니까? 흔들림없지 전하의 길을 가십시오".
정기준은 왜 강채윤이 세종의 일에 함께 하는지 그것을 욕망때문이라고, 이도가 심어준 거짓 사탕발림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백성에 대한 신뢰가 없는 그이기에 말이지요. 세종을 가장 신뢰한 것은 결국 백성이었습니다. 백성이 신뢰하는 것은 세종이 아닙니다. 세종의 뜻이며, 백성에게 향하려 한 세종의 진심입니다. 백성은 정기준의 우려처럼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해서 정치에 관여할 여력이 없는 것이 백성입니다. 백성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잡초처럼 스스로 자생하고 커갑니다. 강채윤을 변화시킨 것은 세종이 아니라, 세종이 뿌리내려 주려한 희망때문이었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세종을 세워줬던 것은 백성 강채윤이었지요. 백성을 위한다고 말로만 성리학의 나라, 사대부 선비입네 하면서, 진정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왜 반대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인물은 세종이 아닌, 백성 강채윤입니다. 그가 임금이나 사대부나 그토록 강조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정기준의 우려처럼 백성은 무지몽매하지만은 않지요. 스스로 판단하고 자각하고 커가는 것이 백성입니다. 글자는, 세종의 글자는 이런 백성들을 더 많이 만들 것이며, 이렇게 자각하는 백성이 많아지면 사대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어있는 백성은 사대부를 깨어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똑똑한 국민은 결코 멍청한 정치인을 용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똑똑하고 강한 백성이 있는 한, 나라는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왕조의 이름이나 지배세력은 달라지겠지만, 백성은 결코 뿌리가 잘려나가지 않습니다. 정기준이 이 부분에서 세종과 화해했으면 싶군요.
결말에 반전이 있을 거라는 예상도 되고, 정기준의 자결과 밀본의 와해를 다룰 가능성이 크지만, 저는 왠지 세종이 정기준을 살릴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세종이 반쪼가리 윤평에게 했던 말이 있었지요. "나는 피로써 갚지 않겠다. 다만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네 놈들이 어떻게 실패하는지". 세종의 치세에 사사시킨 예가 없다는 점에서도, 정기준이 잡힌다면 사형을 시킬 세종은 아닐 듯합니다. 물론 정기준의 최후는 배신한 밀본원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광평대군에게 사과하며 했던 말처럼, 깔끔하게 자결로 마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저는 혼자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키득거린답니다. 세종이 정기준을 산골오지니 섬에 귀양을 보내 숨어살게 하면서, 그곳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훈장을 하라는 것으로 벌을 내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정도전의 후손에 대한 세종의 마지막 예우로도 말입니다.

무엇보다 정기준과 세종이 화해해야 하는 이유는 세종이 꿈꿨던, 모두를 품는 마방진이 진정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입니다. 정기준은 세종이 마지막까지 참고 인내하며 설득해야 할 마지막 조각이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글자가 백성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역사를 어떻게 다르게 했을 지, 세종도 정기준도 모르는 일입니다. 희망의 씨앗일지, 지옥문을 여는 시작일지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성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살기와 원한을 버리고 글자를 지키려는 강채윤, 목숨을 걸고 글자를 유포시키려는 소이와 같은 나인들의 설레임, 그것은 역사의 주체가 되어가는 작은 시작이었을 겁니다.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갈 때 힘이 되어 움직입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을 믿는 것이며, 미래를 믿는 것이기에 희망이라 하는 것이겠지요. 씨를 뿌리는 농부가 수확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씨를 뿌릴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백성들에게 일렁이고 있는 희망을 정기준이 마지막까지 외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기준 그 역시도 백성에게 이로운 것을 고민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을 거라 믿기에 말입니다. 정기준이 죽음을 맞이하든, 제가 생각하는 한글훈장님이 되라는 벌((ㅎㅎ)을 받든, 마지막에 한가지는 꼭 했으면 합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까지는 아니어도, 이도가 아니라 '전하'라고 진심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제가 바라는 해피엔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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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6 10:41




소이, 덕금, 목야가 납치되었음을 알고 고심하는 세종, 글자로 인해 또다시 자신의 사람들이 위험에 처한 것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세종을 잡아준 이는 채윤이었지요. 누구보다 소이의 안위에 애간장이 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채윤이지만 세종을 탓하지 않지요. 소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때문이라며, 세종에게 전하의 길을 계속 가라는 채윤이었습니다. 혁명과도 같은 글자는 강채윤에게도 목숨을 걸고 지킬 그 무엇이었습니다. 소이가 원하는 길이라는 것, 또한 강채윤이 처음으로 가져 본 대의라는 것,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거지들을 죽여버리고, 아이들에게 죽음을 부르는 노래라고 글자가 퍼져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 살인병기 윤평, 글자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수거하고 나인들을 납치해 밀본산채로 데려갔지요. 소이가 해례라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는 정기준은, 글자의 유포를 막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러나 밀본내에 불고 있는 배신의 그림자는 피바람을 예고하며 밀본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심종수와 이신적의 동상이몽은 정기준을 몰아내고 밀본의 수장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각각의 명분으로 등을 지고 맙니다. 삼봉 정도전의 유지를 이어가겠다며 밀본의 차기 수장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심종수, 밀본이라는 붕당의 수장이 되어 재상총재제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라는 제안을 받은 이신적, 대의와 명분은 욕망이라는 덫에 걸린 채 서로를 향해 칼부리를 겨누고 있으니, 이 상황을 지켜보는 정기준이야말로 가장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밀본과 글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도담댁과 한가놈(조희봉)의 충정어린 호소는, 정기준으로 하여금 큰 결심을 하게 할 듯 보이더군요.
재상총재제의 구현이 조선 정치체제의 안정을 위한 삼봉 정도전의 이상이고, 한 사람의 왕에 의해 나라의 명운이 좌지우지되는 것보다는, 현명한 다수의 사대부들이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더 이로울 것이라는 삼봉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지만, 정기준은 기필코 글자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글자는 말이다, 이도와 내가 서로의 생각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난 역사를 놓고 벌이는 이도의 이 위험천만한 장난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정치를 하는 자가 백성을 두고 어찌 될지도 모르고, 자신이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시험을 해보려 하다니, 기껏해야 50년도 다스리지 못하는 일개 왕따위가!!!".

정기준의 말은 현재의 우리가 듣기에는 한참이나 잘못된 생각이지만, 당시로서는 지식인의 고민이었고, 무게였을 겁니다. 정기준에게는 글자를 막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백성과 역사에 대한 책임이었습니다. 글자로 인해 벌어질 혼돈을 방지하자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백성에 대한 걱정이었고, 역사에 대한 책임부분이었지요. 글자가 무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글자도 일종의 체제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고관이지요. 글자에도 하늘과 땅, 상하 질서계급을 부여한 철저한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었죠. 
정기준이 말은 다른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이 국민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그 역사적, 정치적 책임부분에서 진지한 고민보다는, 특히 실적위주의 정치를 펴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말입니다.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려는 분들보다는 정기준의 고민이 오히려 진지하게 들리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정기준과 이도는 글자가 가질 역사적 가치와 백성의 희망이라는 부분에서 생각의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지만, 백성에게 이로운 것에 대해 같은 무게로 고민하는 지식인들이라는 점에서는 화해의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심종수의 하극상의 칼 역시 정기준에게 충격이었겠지만, 심종수의 말은 정기준이 글자를 막는 것에 급급해 간과한 것을 곱씹어 볼 여지를 주기도 했지요. 
밀본은 말 그대로 하극상으로 칼부림이 나기 일보직전입니다. 예고편을 보며 심종수가 조선의 선비다 라는 말로 비장한 결심을 하는 장면이 보였는데요, 정기준을 치기 위해 칼을 드는 것 같더군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게 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정기준은 세종에게 백성의 욕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글자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정작 정기준은 권력의 욕망 앞에 부서지고 배신하는 밀본원들을 보게 되지요. 박쥐형 이신적의 욕망, 사대부의 대의라는 말로 명분을 세웠지만 심종수 역시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인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이 누구를 위해 쓰이는가 겠지요. 대의와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눈가림한 사대부 기득권층을 위한 욕망인지, 진심으로 백성을 향하는 욕망인지 말입니다.
정기준이 하극상의 칼을 받고 경악하는 시각, 세종은 이신적을 만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적 담판에 나섰지요. 노련한 정치 100단들의 허허실실 대화는 소름끼치게 흥미로웠던 장면이었습니다. 안석환이라는 중견배우의 내공과 한석규의 미친연기력이 추위도 녹여버릴만큼 숨막히게 하더군요. 본심들을 감춘 웃음이 서로 어떤 의미인지를 다 알면서도, 내숭으로 눙을 치는 두 사람의 독대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겪은 고수들의 한판이었죠.
전하의 길을 가라는 채윤의 응원에 탄력받은 세종, 이신적을 쥐도새로 모르게 가마에 태워 와 술상앞에 마주합니다. 세종에게도 이신적에게도 철저한 보완이 필요했기에, 007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으로 말이지요. 초반에는 쓸데없는 말로 분위기에 흥을 돋구지요. "내 치세를 어떻게 보시오?", 이런 것을 질문이라고, "태평성대지요...". 다 신료들 덕분이오, 우상도 고생많으셨소. 술한잔 기꺼이 하사하는 세종, 우상이 술을 마시기도 전에 간이 콩알만해지는 질문을 던지지요.
 "밀본이시오?". 세종 정말 화끈하십니다! 우상 이신적 속에서는 간이 철렁 소리를 냈지만, "소신이 어찌..", 애매모호한 답을 하지요. "아이고, 농이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이신적을 가지고 노는 세종, 밀당의 고수였죠. 얼랬다 달랬다 사탕물리고 옆구리 차고, 아무튼 세종대왕 짖궂기도 하셔라~

그리고는 강도높은 질문에 들어가지요. "밀본의 가장 큰 대의가 재상총재제인데 어찌 그걸 거부하셨소?". 집현전과 글자를 두고 거래를 했다가 협상당일 결렬되고 말았던 일을 끄집어내는 세종이었지요. 영리하게 세종은 우상이 빠져나갈 쥐구멍 하나는 만들어 줍니다. "아, 우상이 밀본이라는 가정하에 말이오". 일종의 오프 더 레코드에 해당되는 세종의 영리한 수였지요.
이신적도 세종이 자신이 밀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듯 보였지만 능란하게 받아 치지요. 밀본이라고 가정하고 답을 올리겠다고 말이지요. "그것은 내부에 의견을 달리한 자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는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끙끙 앓던 속풀이까지 하지요. "소신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무엇이 재상총재제보다 우선할 수 있겠습니까? 어쩔 줄 몰라 미치겠습니다". 이신적의 말에는 글자반포를 양보해 주고 재상총재제를 관철시켜, 재상의 자리에 앉겠다는 야무진 꿈을 깨버린 정기준에 대한 원망이 들어있었지요. 밀본에 분열이 생긴 거냐고 묻는 세종, 이신적 아차 걸렸구나 싶어 또 안절부절 눈이 팽글팽글 튀어나올 지경입니다. 요럴 때는 웃어주는 것이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특효약이죠. 우상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 몰랐다고 세종 껄껄껄 웃어보이지요.
세종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지요. 밀본에게 자복하고 나와서 토론하자고 했는데, 왜 우상은 자수를 안했냐며, 아~주 부드럽게 물어 주시지요. "믿음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전하를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을까? 무인정사때 삼봉선생이 참혹하게 죽은 후 역당으로 낙인 찍힌 세월이 수십년입니다. 그 긴 세월의 기억을 하루 아침에 잊고, '소신이 밀본입니다' 라고 나서기에는 불안한 것이겠지요".
"경연장에서 광평을 죽인 것에 대한 죄를 묻지 않겠다, 또 밀본을 붕당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보다 더 믿음을 줄 수는 없소이다", 요지는 이렇게 많이 양보하고 참아줬는데 뭘 더 내놓으라는 것이냐고 돌려말하는 세종이었습니다. 이신적의 대답도 만만치 않았지요. 전하는 최선을 다했지만, 인간의 뿌리깊은 불안을 달래주지는 못하셨다고 받아치지요. 그 불안감을 달래줄 수는 없으니, 그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떠보는 세종이었지요.
세종도 영리하지만 이신적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또 쥐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이신적이었지요. "소신 멍청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못알아 듣겠습니다". "이런 답답한..." 세종의 너털웃음 웃음 뒤에는 이런 마음을 숨겨버리더군요(허, 요놈 봐라, 목숨줄 길게 붙들고 살고 싶다 이거지?). 짧은 순간 일그러지는 입모양이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더군요. 한석규의 세심한 연기는 입술이라고 예외가 없더라고요. 입속의 혀까지도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하는 듯 보였고 말이지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싹하게 무섭기까지 한 입모양에서는, 이신적을 한 대 치고 싶어하는 세종의 심정마저도 느껴졌으니 말입니다. 
의미없는 헛웃음으로 대화를 정리하는 세종, 그러면서 한말씀 콕 찔러 오줌 잘금거리게 만들어 버리지요. "우상께서 이리 그럴 듯하게 얘기하시니, 내 우상대감이 밀본인 줄 알겠소". 하하하. 이신적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몰랐을 겁니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냐', 뭐 이런 심정이었겠죠.
밀담은 끝났고 먼저 나가는 우상, 그냥 돌려보낼 세종이 아니었지요. 진짜 본론이 남았는데 말입니다. 이신적에게 빼도박도 못하게 세종이 쐐기를 박아버리지요. "정기준을 넘기시오". 크헉...심장이 쪼그라지게 하는 세종의 말에 이신적의 눈이 튀어 나오더라죠. 세종의 말인즉슨 정기준을 넘기고, 스스로 밀본임을 자복해서 밀본의 수장이 되어 조정에서 재상총재제를 주장하라는 폭탄제안이었습니다. 불안해서 믿지 못하겠다면, 스스로 그 믿음을 만들어 보라는 말이 이것이었죠. 붕당의 수장이 되어 과연 세종이 어떻게 나오는지 직접 경험하고 믿어보라고 말입니다.
다른 의견이라 하여 대역으로 몰지 않겠다, 자신과는 다른 정치관을 가진 붕당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세종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밀본입니다. 개미새끼 한마리도 조정 앞마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세종이 대역조직인 밀본마저 품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죠. 이신적에게 붕당의 깃발을 들고 나오라고 제안한 것은 두가지의 노림수가 있었죠. 하나는 정기준의 소재를 알아 정기준과 담판을 하고, 소이를 구하기 위해서 였지요. 또 하나는 밀본이 스스로 와해되든지, 명분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커가는 기회를 갖든지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와해되는 밀본, 배신에 배신이 겹치는 상황에서 정기준의 생각은 어떻게 변할까가 가장 궁금한 대목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상상해 왔던 시나리오를 내일 올릴 예정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

오늘의 보너스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정인지가 최만리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마구마구 웃었답니다. 정인지와 최만리가 동갑이라죠. 일찍 곰삭아 버린 최만리가 놀림받을 때마다 자네 편들어줬다고 생색내는 정인지가 웃음 하나 터뜨려 주지요. 자기가 동안인 것이지 최만리가 노안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말이죠. 최강의 동안 정인지, 최강의 노안 최만리 두 동기동창생의 대화가 은근 웃겼습니다.
워낙 근엄한 최만리대감, 생전에 웃어는 봤을까 싶은 표정인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결국 웃음을 터뜨리시기는 하더라죠. 그것도 근엄한 웃음이기는 했습니다만.ㅎㅎ 물론 역사에도 나와있듯이 최만리는 끝까지 한글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최만리의 생각을 고집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당시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깨지기는 쉽지 않았겠죠. 생각의 틀을 깬다는 것, 그게 항아리 깨듯 쉬운 것이라면, 역사는 수백번도 하루아침에 바뀌고 새로 쓰이고 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딘 걸음일지라도 역사는 바뀌어 왔고, 새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가 새로 쓰이는 그 순간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소이와 강채윤, 그리고 세종이라는 위대한 인물처럼 말입니다. 국가적으로 큰 일들을 앞두고 있는 지금, 어쩌면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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