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애 폭풍분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12.06 '천일의 약속' 섬뜩했던 수애의 신경질, 가장 애처로운 김래원 (7)
  2. 2011.11.09 '천일의 약속' 노향기의 사랑, 통속과 명품을 가른 보석 (6)
2011.12.06 11:14




향기 오빠 노영수(송창의)의 등장으로 드라마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진 듯합니다. 서연을 볼 때마다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천길 물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무거움이 짓눌렀는데, 그나마 중간에 숨통을 트여주는 캐릭터들 때문에 잠시 잠깐 웃기도 했네요. 노홍길(박영규)과의 감칠 연기가 제대로더군요. 점잖은 신사분위기 송창의가 퍼머머리에 능청스러운 한량같은 캐릭터로 나와 놀랐네요. 향기네 집 분량을 늘려서라도 분위기를 업시켰으면 생각이 들기까지 하니, 이 드라마가 정말 버겁기는 한 가 봅니다. 
서연의 치매증세와 부작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냉장고에 넣어둔 서연때문에, 문권이 아무 생각없이 던진 농담에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지요. 신경질, 우울증도 치매의 병증 중 하나라며, 조용히 문권을 달래주는 지형을 보면서, 향기도 불쌍하고 서연도 불쌍하지만, 가장 불쌍한 인물이 박지형같더군요.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지형이 감당해야 할 사랑이지만, 지형을 보면서 긴 병에 효자없다는데 얼마나 잘 견딜 수 있을까, 아니 서연의 심해지는 증상을 보며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갈까를 생각하니, 어찌나 마음이 무겁던지요.
정나미 떨어지는 서연의 신경질, 미운 것은 서연 자신
"웃지마, 아무도 웃지마. 비웃지마", 자신을 바보 취합하지 말라며, 서연은 참았던 감정을 폭발하고 말았는데요, 지형과의 행복한 시간도 어느 날에는 아득히 먼 과거, 아니 기억도 하지 못할 추억들이 될 뿐이고, 자신은 부정할 수 없는 치매환자라는 사실에, 서연은 극도의 신경과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게지요. 날마다 행복하다고, 억지로 강요하고 있던 것들이 제어되지 못하고 나와 버린 것이죠.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냐"라는 노래가사가 있지요. 서연의 상황이 그런 것 같습니다. 억지로 살아내는 것, 이미 알고 있는 끝을 향해, 마치 알지 못한 듯, 보지 못한 듯 기를 쓰고 살아가는 것말입니다.
고모와 목욕탕에 가기로 약속한 것을 또 잊어버린 서연, 혹이나 길을 잃을까봐 몰래 따라나온 지형을 모른척해주고, 동생이 마중나온 것도 애써 본 본척했는데, 그만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냉장고에 넣은 자신에게 서연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지요. 자신을 우물가에 내 놓은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것에 서연은 못마땅합니다. 신경써주는  지형과 문권때문에 자신이 치매환자라는, 뗄 수없는 껌딱지가 엉겨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것같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맙니다.
"왜 감시해?"라며, 화를 내는 서연은 급기야 해서는 안되는 막말까지 퍼부어 버리지요. "다 보여. 느껴. 잘난 척 그쯤하고 가". 자신의 병이 재미있는 오락거리냐며, 자격지심까지 느끼는 서연은 "이건 내 누나가 아니야"라는 문권의 말을 듣고는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화가 나는 것은 서연 자신인데, 공연히 동생과 지형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하고 창피한 서연입니다.
서연의 신경질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오히려 문권을 다독이는 지형이었지요. "당황해서 그래, 한 번씩 거칠어 지는 것도 증세 중 하나래. 이해해". 서연의 신경질과 우울증이 아기를 낳겠다고 약을 끊어서 심해진 것이라는 말에도, "덕분에 뭐든 열심히 먹어주니까 고마운 일 아니냐"고 위로하는 지형이었습니다. 울고 있는 서연, 눈에 띄게 심해가는 사연의 증세에 미소로 괜찮다고 말해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지형입니다.  
서연의 심정과 병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연의 버럭질과 신경질이 심해질 때마 가슴이 조마조마해 죽겠네요. 서연이 자신의 병때문에 화도 많이 내고, 울기도 하고, 신경질도 많이 냈지만, 이번처럼 섬뜩하게 다가왔던 적은 없었어요. 눈을 뒤집고 악을 써대는 수애의 표정이 무섭기 까지 했습니다.

박지형의 바라만 보는 사랑, 그래서 애처롭다
이런 일들이 앞으로 비일비재해 질텐데 지형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저는 아픈 서연보다는 서연을 참아내는 지형이 더 안쓰럽고 불쌍해서 미치겠습니다. 지형의 어머니 강수정이 어떻게 허락할 수 있었는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지성이 감탄스럽고 존경스러웠는데, 그런 길을 가려는 지형이 이제보니 가장 강한 사람이었더군요.
놀라웠던 것은 지형의 태도였습니다. 흥분하지 않는 놀라운 감정절제력이었습니다. 지형이 순간적인 감정으로, 혹은 초인간적인 사랑의 힘으로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는 여자의 곁에 머물겠다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사랑이 맹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지형의 차분한 표정으로 표현해 주더군요.
극중 박지형이라는 남자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향기에 대한 미안함, 양가 집안의 문제, 그러나 무엇을 가장 고민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었을 겁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환자를 보호하겠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지형의 흔들릴 수도 있을 감정에 대한 주문같은 것입니다. 지형도 치매가 어떤 질병인지는 대충 알았을 터이고, 서연때문에 더많은 자료들을 찾아 봤겠지요. 예를 들면 치매에 좋은 음식을 비롯해서 좋은 운동, 끝말잇기 등등 말입니다. 지형이 치매환자의 병증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형은 보다 중요한 참아주는 것을 잘하더군요. 그리고 모른척 해주는 것을 잘한다는 겁니다. 환자를 흥분시키지 않는 것, 지형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겠지요. 버럭 서연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했는데, 지형이 같이 버럭대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다 싶을 정도입니다. 서연은 자신이 아픈 환자니까, 이런 응석정도는 이해해 달라는 듯 내키는 대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지형은 좀처럼 감정을 폭발하는 일이 드물었지요.
개인적으로 서연이라는 캐릭터보다 지형의 캐릭터가 점점 더 안쓰럽고 눈에 밟혀옵니다. 서연이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할 때마다 허공을 향해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곤하는데, 그 감정을 잘 추스려서 드라마에 몰입하게 하는 캐릭터가 지형입니다. 서연은 드라마 속에서도 혼자만의 방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하거든요. 지형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도 과장된 웃음소리는 극 몰입을 오히려 방해해 버리고요.
진짜 즐거운 표정이라기 보다는 부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작가도 이런 것을 느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모의 입을 통해 변명을 해주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목욕탕에서 고모의 신을 신으려는 서연에게 퉁을 주니 서연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일부러 크게 깔깔 웃더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서연의 웃음은 지형과의 과거 시절 회상씬에서도 유독 부자연스러워서, 되도록이면 수애는 웃음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미소짓는 모습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아마 수애가 가진 분위기때문인 듯도 합니다. 
사실 서연이라는 인물이 수애의 연기력을 떠나, 가끔 그 캐릭터에 갸우뚱하게 하는 면도 없지않지요. 극 초반 베드신의 영향도 있었고요. 강수정이 남편 박창주에게 그애를 한 번 만나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을 거라고 설득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연의 성격은 강수정이 받은 인상과는 좀 거리가 있는 모습들도 많지요. 그래서 가끔 시청자에게는 이중인격적인 내숭 서연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약혼자있는 남자와 사랑했다는 점을 굳이 들지 않아도 말입니다.
모든 치매환자가 서연과 같은 유사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지극히 얌전해 지거나 사람을 겁내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포악해지기도 하고, 케이스마다 다르다고 하더군요. 말이 어눌해지고 행동이 느려지는 것은 비슷하지만 말입니다. 서연의 경우는 거칠어지는 케이스인 듯 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터지는 서연의 신경질이 이해는 되지만,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굳이 버럭 화를 내거나 머리를 쥐어뜯지 않아도 더 아리게 전할 수도 있는데, 분노폭발만이 다는 아닌 듯해서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알츠하이머 환자라며, 편집장에게 사표를 내고 돌아서서 눈물이 고였던 장면은, 오히려 다 많은 감정들을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서연의 심정이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있다고 백번천번 마음을 다독이지만 서연이 지형을 사랑한다면, 또한 고맙다면, 그리고 미안하다면, 자신을 몰래 바라보는 지형의 감정도 생각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통째로 들고 온 지형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프니 이해해 달라고 하기보다는, 지형의 아픔도 서연이 봐줬으면 합니다. 서연이 아픈 환자라는 것에 동정과 연민이 크지만, 고통은 더 오래 살 지형의 몫이 더 크지 않겠어요. 그동안 지형과 서연의 사랑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에 공감했다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 강요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두 사람의 사랑에 애절하고 절절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보다는 서연의 치매에 힘을 너무 쏟은 이유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형의 사랑이 외사랑같아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때문이지 싶기도 하고요.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김수현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사랑이 서연의 사랑이 아닌 듯하더군요. 박지형과 노향기의 사랑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서연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서연은 자기고통이 버거워 지형의 사랑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어 보이지요.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뜨거운 법이니까요. 그런데도 서연에게 조금 욕심을 내어 바라는 점이 있다면, 서연 자신의 고통 못지않게, 지켜보는 지형의 고통 또한 크다는 것을 서연도 봐줬으면 하는 것이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조금은 더 가슴으로 전해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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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1:22




사실 8회는 중간중간 울컥 눈물도는 장면이 많아 지난 회들보다 더 우울하고 드라마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지만, 드라마 몰입도는 지금까지중 최고였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길게 침묵하고 있었네요. 눈물도 찔금찔금 흘려가면서요.

결국 결혼을 깨버린 지형, 서연이 눈물로 부탁하고 사정했어도 한 번 굳힌 지형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제발 집에 들어가 잘못했습니다 해. 내 마지막 부탁 소원으로 생각해 줘". 서연은 지형의 십자가가 될 수 없다며, 제발 모르는 척 해달라고 하지요. 망가져 가는 걸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을 이해해 달라면서 말이지요. "내가 자기까지 망쳐먹지 않았다는 위안은 갖고 있다 바보되게 해 줘". 엉엉 우는 서연과 지형과 함께 얼마나 울었던지...
지형에게 전화를 건 서연은 결국 화도 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버렸지요. "당신 마음을 보석이고 내마음은 똥이니? 내 문제만으로도 내 머리가 뭉개지려 하는데 나한테 당신 짐까지 짊어지라고!! 돌대가리, 깡통....". 지형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알았기에 서연도 힘을 풀어버리지요.
심해지는 증상, 늘 다니던 길이 생소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그 사람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할까 싶게 서연의 머리는 까맣게 기억들이 지워져 가고 있지요. 너무 급작스럽게 서연의 증세가 심해져서, 치매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심각한 병이라는 것에 뒷머리가 쭈뼛 서더군요. 뒤따라 온 재민의 품에 안겨, 무섭다고 엉엉 우는 서연을 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름과 주소를 적어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고, 집 주변을 사진으로 찍어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처해 가는 서연의 모습은 또 어땠고요.

수애의 3단분노, 소름끼치게 와닿은 '무서움'
길을 잃었다는 말을 전해들듣고 약을 먹자는 문권에게 나만큼 절박하냐고, 나만큼 절망스럽냐고, 나만큼 무섭냐고 불같이 화를 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이 장면은 그간 수애의 연기중 최고로 꼽고 싶은 장면이었습니다. 수애의 3단분노의 절정이었죠, 나만큼 무섭냐는 표정이 얼마나 슬프면서 소름끼치게 와닿던지, 순간 멍해졌습니다. 무서움....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든 세상과의 관계들이 단절돼 간다는 것, 무서움이라는 단어가 피부세포를 뚫고 전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공포라는 단어보다 무섭다라는 단어는 수애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3단분노 연기력때문에 더 소름끼치게 전달되었고요.
말라 비틀어가는 뇌세포처럼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향해 서연은 힘없이 말해봅니다. '당황하지마, 당황하면 바보짓 더할 거야. 아마 그럴 거야. 내가 맞을 거야'. 처음에는 내가 맞을 거야하는 수애의 방백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다음날 병원에 가서 재검을 하는 서연을 보고는, 그 말의 의미를 알겠더군요. 서연은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그렇게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에 주문을 걸며 부정하고 싶었던 거예요. 처음에는 엿먹어라 알츠하이머, 라며 거세게 반항했지만, 한줄기 빛처럼 아니라는 희망 한가닥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게지요.
재검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자 정신이 멍한 사람처럼 "네, 네" 대답만 하는 서연, 한줄기 빛, 희망따위는 없었습니다. 오진이었다는 한가닥 희망이 절망으로 확인되는 순간, 그녀는 말하지요. "나는 날마다 조금씩 바보가 되어가는 치매환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천일의 약속은 첫방송부터 지난 7회까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 있을지, 아닐 지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드라마 분위기가 너무나 우울하고 무거워서 말이지요. 캐릭터들이 사랑스럽지도 않고, 사랑하기에는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들 때문에 무조건 애정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박지형의 우유부단함에 두 여자가 상처를 받아야 했고, 이서연의 이기적인 사랑이 알츠하이머라는 이유로 용서되기는 어려웠고, 바보같은 해바라기 사랑을 하는 노향기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캐릭터들이었죠.
그런데 8회 그 캐릭터들이 통속 멜로극을 파괴하는, 얼마나 순도깊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화들짝 놀라, 그동안 드라마를 이리 건성으로 보고 있었나 반성하게 하더군요. 이서연과 박지형, 그리고 노향기가 사랑하는 방식이 통속을 깨버린 순도 100%의 명품사랑임을 확인하고는, 혼자 눈물을 펑펑 흘리고 가슴을 퍽퍽 치고 앉아 있게 하더군요. 
김수현, 그녀는 역시 대단한 작가입니다. 김수현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김수현은 언어의 연금술사, 감성을 일깨우는 최고의 마법사입니다. 그녀처럼 인간의 심리를 다양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섬세하고 예리하게 집어내는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준 캐릭터가 착한 대명사로 불리는 노향기(정유미)와 나쁜 남자 박지형입니다.

노향기의 사랑, 통속과 명품을 가르는 보석
드라마에서는 박지형에게 상처를 받아 시청자들로부터 전폭적인 동정과 연민을 받는 캐릭터지만, 노향기는 드라마 속 사랑에 실패한 비운의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제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명품보석같은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보석은 드라마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하더군요.
그간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향기같은 사랑은 없다는 듯이 성품, 성격을 못된 애로 순식간에 바꿔버리고, 시청자는 서브주인공=악역, 혹은 악녀라는 공식을 너무나 당연하게 대입시켜 왔지요. 통속적인 드라마의 삼각관계의 틀에서 노향기라는 캐릭터를 재단하려 들었기에, 천일의 사랑 속 삼각관계는 편한 마음으로 볼 수없는 특이한 관계였습니다. 
천방지축 부잣집딸이고,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자 복수를 하려들고, 이서연에 대한 갖은 모함과 음모를 만들고, 치매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지형의 부모님을 흔들려 했다면, 쉽게 지형과 서연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었겠지요. 향기의 캐릭터도 통속극 속의 캐릭터로 머물렀을 것이고요. 그러나 김수현 작가는 노향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라마에서 공식처럼 보여진 통속을 깬 파격을 단행했습니다. 처음 그 파격에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했지요. 미움을 받아야 할 서브여주인공이 실은 가장 불쌍하고, 착한 비련의 캐릭터가 되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8회를 보면서 그동안 답답함에 관심을 주지 않았던 노향기를 보니, 이런 아차 싶더군요. 노향기라는 캐릭터가 어쩌면 현실에서는 더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진심으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왔고, 사랑한다면, 결혼을 취소했다고 약혼자를 찾아가 울며불며 멱살을 잡을 여자는 드물 것이고, 아마 향기처럼 자기가 부족하고 모자라서였다고, 자신을 책망하는 여자가 더 많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그리고 작가에게 놀란 부분이 노향기의 절망감을 표현한 장면이었습니다. 지난회 강수정(김해숙)과의 전화통화에서 서연의 존재를 강수정도 알고 있는 것에, 향기는 "아줌마에게 까지 말했다면, 저는 가망이 없네요"라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던 장면입니다. 노향기는 결혼이 취소된 것보다, 지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보다, 지형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향기는 지형에 대한 배신감으로 연결을 시키지 않습니다. 계속 사랑해도 안될 것같은 불가능에 대한 절망감이 향기를 힘들게 합니다. 사랑이 진행중인 사람의 심리를 얼마나 섬세하게 풀어냈는지 놀랍습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적인 통속을 깨는 것들이 이런 점들이죠. 향기의 엄마 오현아(이미숙)처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바보 등신같겠지만, 당사자는 향기같은 반응을 하지않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고도, 끝내 결혼식이 무산되었어도, 여전히 노향기는 착하고 지고지순합니다. 도끼눈 한 번을 뜨지 않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준비했던 신혼여행 가방에서 잠옷을 꺼내들고, 지형의 마지막 문제 메시지를 보며 눈물을 뚝 흘리면서도, 지형의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오빠가 전화를 받아줘서 기쁘고 고맙다고" 말하는 바보, 그러나 이것이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의 감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아프게 느끼게 합니다.
시청자는 제 3자의 눈으로 노향기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런 노향기가 바보같고, 박지형 정말 나쁜 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하지만, 정말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노향기의 감정이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되었을 거예요.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줘서가 아니라,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사랑예찬론자들의 수많은 명언들이 그냥 글자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향기, 박지형의 사랑을 통해 다시 읽게 됩니다. 김수현 작가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이 얼마나 현실에 바탕이 되어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이죠.

노향기-박지형, 사랑을 묻는다
노향기가 이서연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속은 뭉그러지게 아프면서도 일찍 오빠를 놔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인간들의 기본적인 정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 그런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심리 말입니다. 김수현 작가의 섬세한 예리함이 바로 이런 것들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법하게 그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해줍니다.

향기의 감정은 외사랑이었든, 짝사랑이었든 배신에도 분노하지 못하는 한 길 순애보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했기에 배신당한 향기의 처지를 단순하게 '불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게 합니다. 향기의 지형을 향한 사랑은 이러저러한 상황이 되었으니, 무 자르듯이 싹둑 잘라내지는 가벼움이 아니지요. 배신에 쉽게 마음을 접어버리고, 도끼눈을 뜨고 복수하겠다거나, 철저히 '개무시 잊어주겠어' 한다면, 그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물론 증오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말을 하지만, 향기의 사랑색깔은 너무 투명하고 수정처럼 맑아서 증오하는 것이 더 힘든 아이입니다. 지형을 감싸고 그리워 하는 향기는 여전히 지형을 사랑하고 있고, 작가는 이것 역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집안이고, 착한 향기고 다 버리고 서연에게 가는 박지형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말이지요. 박지형의 사랑방식은 이전 글(김래원, 두 여자를 농락한 나쁜남자라고?)에서 한 번 정리를 했기에, 여기서는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악조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쁜 놈이 되어도, 자신이 사랑한 한 여자를 택하는 박지형의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응원하겠다고 했는데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치매라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여자를 지켜주겠다고 할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그 사랑이 숨막히게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의 색깔이었죠, 희생, 동정, 연민, 책임 등등 그 모든 것을 다 적용해도 이서연에 대한 사랑을 퇴색시키지는 못하는....
치매를 앓는 서연을 향한 지형의 지독한 순애보, 그런 지형을 사랑하는 바보같은 향기의 순애보, 과연 지형과 향기의 사랑에 돌을 던지거나, 불쌍하다거나 바보같다고 그만두라고 말릴 수 있을까요? 박지형의 사랑도, 노향기의 사랑도, 사랑이 쉬운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은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정혼자를 두고 다른 여자랑 시한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 여자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여자를 택한 남자, 결혼 이틀전에 파혼당하고 심지어 1년간 다른 여자를 만나왔다는 남자를 미워하지 못하고 계속 사랑하는 여자가 묻습니다. 멈추란다고 멈춰지고, 그만 두란다고 그만 둬지는 것이 사랑이냐고 말이지요. 절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늪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사랑이라고, 미워하고 증오해야 하는데 미련하게 더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사랑이라고 말이지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통속적 캐릭터를 깬 노향기로 인해 지형과 서연의 사랑을 노작가의 객기 쯤으로 치부하는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저는 향기도 지형도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손바닥 뒤집기 처럼 쉬운 것이 사랑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사랑을 정의하는 말들 중 가장 많이 들어온 것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박지형과 노향기의 사랑이 그러하죠. 향기를 몸도 마음도 지형에게 다 주고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라고 동정하지만, 노향기는 그것에 대한 상처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지형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함에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너무나 오랜시간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랑때문에 힘들어 하지요. 내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 너무 사랑하기에 아깝지 않은 사랑, 박지형과 노향기를 보며 김수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가벼운 감기몸살쯤으로 그려지는 사랑에 대해, 이런 사랑도 있노라고, 그래서 사랑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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