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지'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3.04.04 '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의미있는 해피엔딩 설명한 두 장의 그림 (11)
  2. 2013.03.15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해피엔딩 암시한 조인성(오수)의 흉터 (41)
  3. 2013.03.14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송혜교-조인성 눈물, 그 겨울 바람을 말하다 (9)
  4. 2013.03.08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송혜교-조인성 눈물, 절망 속에 피는 사랑 (11)
  5. 2013.03.07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행복해서 죽고 싶은 송혜교, 눈물이 아프다 (18)
2013.04.04 10:34




"사기꾼 오수의 어릴 적 꿈이 뭐였어?", 오수가 가짜라는 것을 안 후 별장에서 오영이 물었었죠. "목수, 농부, 어부, 엔지니어... 사기꾼이, 겜블러가 아닌 모든 것"이라고 오수는 대답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수는 진짜 꿈을 말하지 않았죠. 오수의 꿈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서 오수가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줬습니다. 김규태 감독의 영상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참 섬세하더군요. 김감독은 오영의 시력회복에 대해서도 뿌옇게 처리한 벚꽃으로 오영의 시력의 정도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오영이 100% 시력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뿌옇게 처리한 화면이었죠.  

화사한 벚꽃엔딩으로 긴 겨울을 끝낸 오영과 오수, 그들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겨울에 불었던 바람은 닫힌 마음을 연 사랑의 바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왕비서는 오영의 곁으로 돌아왔고, 영의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도박장에서 오수는 게임에서 이겨 김사장의 빚을 갚았고, 가족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김사장의 협박으로 진성이 오수를 칼로 찔렀지만, 두 번째 찌르려다 칼을 놓아버리고 목놓아 우는 진성,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아 오수는 살았고, 모두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게임을 끝내고 나온 오수가, 병원으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진성의 칼을 맞은 연출은 참 생뚱맞았지만;;  

 

조무철의 죽음이 아쉽고, 그가 뒷골목 동생들을 어떻게 지키다 갔는지, 오수와 진성이 아는지 모르는지 그 점이 아쉽기는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조무철만이 자기를 이해해주고 떠난듯 해서 말이죠ㅠㅠ. 김태우의 강한 여운이 남는 연기, 정말 좋았습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김사장 똘마니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지 않게 했던 것은, 작가의 조무철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마지막 애도 내지는 애정의 표시라고 보고 싶더군요.

김사장 똘마니의 팔을 망가뜨려 그 바닥에서 살지못할 거라면서, "얘야, 집에 가!"라고 나즈막히 내뱉는 조무철, 그의 후회가 들어있는 말이었습니다. 집에 가라는 말, 이보다 강한 메시지가 있을까 싶습니다. 밑바닥 주먹인생, 그들에게 집에 가라는 말은 사람답게 살라는 말보다 강한 여운을 남기더군요.  

 

왕비서(배종옥)와 오영의 화해, 조무철만큼이나 애정을 가지고 봐왔던 캐릭터였기에 그녀가 오영에게 하는 드라마 속 마지막 말이 무척이나 궁금했었습니다. "영이야, 분명히 말해둘게 있어, 너는 혼자 살 수 없어.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린 누구도 혼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내가 네가 있어서 지금까지 산 것처럼... 수술 후 네가 눈을 다시 못떠도 눈이 안보이더라도, 눈이 안보이는 것 때문에 더는 마음 아프지 않길 바란다".

영이를 안고 "그래도 미안해, 많이 미안해" 사과하는 왕비서, 그녀는 여전히 영이의 엄마였습니다. 영이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언제나 자식을 위해 달려와주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어갈 수 있는, 무엇보다 영이를 너무도 사랑하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영의 눈을 망가뜨려 20년 넘게 암흑속에서 살게 한 죄가 씻어지지는 않겠지만, 왕비서가 영에게 꼭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사과하더군요.  

 

엔딩을 두고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진성(김범)과 희선(정은지)의 수에 대한 대화가 좀 찜찜했을 듯해서 말이죠. "내일 수한테 가는 날인 거 알지? 이번에 수한테 갈때 무슨 꽃 가져갈까? 지난 번에 안개꽃 가져 갔었는데...", 수 이야기가 나오자 진성의 표정이 우울해서 마치 오수가 죽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죠. "영이 닮은 렘즈이어".

짧게 대답하는 진성의 표정과 꽃이야기가 오수를 추억하러 가는 것마냥 들렸지만, 바로 이전에 자전거를 타고 오영을 스쳐지나가는 장면으로 오수가 살아있음을 미리 보여 주었지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풍경소리, 귀에 익숙한 소리에 오영은 미소를 짓습니다. 그 사람이 오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죠.  

오수가 일하는(주인인가?) 레스토랑에서 차를 마시며 렘즈이어를 만지는 오영, 그 렘즈이어는 희선과 진성이 가져다 준 것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오수가 그리다만 나무에 꽃이 피어있는 그림이 완성되어 걸려있었죠. 고로 희선과 진성의 대화는 오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 진성의 표정에 보였던 무거움은 오수를 칼로 찌른 것에 대한 미안함을 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자살기도를 하고 오영은 오수가 남긴 비디오 테입을 봤지요.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게 참없다는게 마음이 아프다"는 오수의 울먹이는 목소리, 오영은 오수의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확인합니다.

"널 만나 처음으로 세상이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처럼 버려진 내 인생도 처음으로 서운하지 않았어, 너 때문에... 만약 이게 끝이 아니면 언젠가 한 번은 꼭 보자. 그 땐 너한테 말하지 못한 얘기를 해주고 싶다. 니 첫인상부터 널 사랑한게 언제부터였는지, 니가 얼마나 이뻤는지, 그리고 말로 다하지 못하 내 죄책감도... 그리고 니 진짜 오빠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또...", 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 오수, 눈물이 앞을 가려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수였지요.

오수의 말을 들으며 눈물흘리며 미소짓는 오영, 그녀는 행복합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그 사랑에는 사기도 돈도 없었다는 오수의 진심을 확인했기에 다친 상처가 다 치유되는 오영입니다. 

 

온실에서 돌아온 오영은 오수에게 진심을 고백하죠. 듣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고,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고, 오수를 꼭 다시 만나겠다는 그녀의 마음이었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오수를 다시 못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오영, 그녀의 진심을 고백했죠. 지금이 아니면 혹이라도 영영 말하지 못하게 될까봐...

"나는 지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 니가 가고 나는 너를 볼 수가 없는데 니가 보고 싶은게 참 힘이 들더라. 나 역시 너처럼 너를 보낼때 끝이 아니었나봐. 끝내려는 그 순간에도 니가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나한테 있었던 것 같아. 손목을 그을때도 두려움보다는 니가 내 방문을 열지는 않을까 기대했어, 마치 단 한번도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사랑해, 많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을 훌쩍 넘기고 봄을 맞이했습니다. 오영 앞에 나타나지 않는 오수, 왜였을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데도 오수는 종적을 감추고 있었지요.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 오수가 일하는 레스토랑과 두 장의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수는 오영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고 싶었던 듯 합니다. 오영의 자살기도 후 감자수프를 끓여주며 오수가 말했죠. 진짜 요리사가 될까보다고요. 셰프가 꿈이었던 죽은 오수, 오수는 오영의 진짜 오빠 오수의 꿈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오수 자신의 꿈도 찾아가기 시작했죠.

첫회 희선이 여자팬티를 식탁에 던지던 날, 희선이 오수의 집 거실 한 귀퉁이에 놓인 미완성된 그림과 물감들을 힐끗보며 오수에게 말했죠. "너 그림 안그려? 그리라는 그림은 안그리고 맨날 기집애들이랑 잠이나 자고". 

"사기꾼 오수의 어릴적 꿈이 뭐였어?", 오수의 꿈은 화가였습니다. 오수의 그림 주제는 자기자신, 나무였습니다. 어릴 적 나무밑에 버려져서, 보육원 주위에 나무가 많아서 나무 수자가 이름이 된 오수, 그러나 오수의 나무는 나뭇잎도 꽃도 없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나무가지만이 날카롭게 가지를 뻗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쓰레기같다는 오수의 인생처럼 말이죠. 오수의 심리가 그대로 투영되었던 삭막한 나무였죠.

그런데 그 그림이 레스토랑에 완성되어 걸려있더군요. 꽃이 만발한 나무로 말이죠. 레스토랑 한켠에 세워진 나무 그림 역시 무성한 잎들과 초록의 잔디가 깔린 그림이었죠. 오수가 버려졌던 겨울의 이파리 하나 없는 나무에 봄이 온 그림이었습니다. 오의 꿈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된 오수의 변화에 대한 연출이었죠. 

 

오수는 오영에게 사기꾼이 아닌 오수로 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년이 넘는 시간 오영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말이죠. 요리를 배우고,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 그리고 오영을 지켜봐왔습니다. 오영이 가는 복지관 가는 길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이유는 오영을 보기 위해서였겠지요.

 

"많이 기다렸는데, 언제 나한테 말걸어주나...".

"용기가 안났어, 혹이라도 네가 날 보게 되면 내가 마음에 안들 수도 있겠다 싶어서...".

 

 

차가운 겨울, 잎 하나 없는 나무밑에 버려진 오수에게 꽃이 만발하고 잎이 무성한 봄이 왔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차가운 겨울에 혼자 남겨진 오영에게 벚꽃처럼 화사한 봄이 왔습니다. 레스토랑에 놓인 오수의 그림과 오영이 보게 된 찬란한 벚꽃은 오수와 오영의 지독한 겨울이 끝났음을 영상으로 보여준 미학이었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쓰레기같은 인생이지만 그래도 살고 싶은 남자와, 살고 싶은 이유가 없어서 죽고 싶은 여자가 만났다', 삶의 이유가, 삶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 마음이 겨울이었던 두 사람의 긴 겨울은 이렇게 봄꽃 화사한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오영과 왕비서의 대화가 전 마지막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더군요.

"우린 누구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서툰 방식으로라도 날 사랑하는 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외롭진 않았을텐데".

 

첫회 오수의 나레이션을 통해 노희경 작가는 이 드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했지요. "사람들은 모두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럼 나도 이 더러운 시궁창같은 삶에서 의미를 한 번 찾아봐? 세상에 태어나 믿을 거라고는 나밖에 없다고 평생을 살아온 내게도 찬란히 눈부신 햇살이라도 비추나? 그러면 내 인생이 뭐가 바뀌나? 그럼 어디 한 번 해볼까?".

오영을 만나 삶의 이유를 찾았던 오수는 요리를 배우고 그림을 다시 시작했고, 죽고 싶어했던 영은 살고 싶은 의지로 수술을 받고 복지관 봉사활동에 열심입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이유를 찾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 오수와 오영입니다.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오수, 아무도 믿지못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오영, 서로를 사랑하면서 변화된 것은, 그들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수가 말했죠. 세상에서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이 오영이라고, 영이 니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두 사람의 재회도 예뻤지만, 자신을 사랑하게 된 오수와 오영의 변화가 더 크게 와닿더군요. 오수가 셰프가 되고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 그리고 오영이 복지관 일에 열심인 모습이 제게는 가장 의미있는 해피엔딩으로 보이더군요.

두 사람이 우연히 벚꽃아래에서 재회하는 아름다운 영상만으로 끝내도 해피엔딩이었겠지만,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진정한 해피엔딩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오수와 오영의 변화였습니다.

노희경 작가의 이 엔딩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그들이 찾은 삶의 이유와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오영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재회하는 것만 보여줬다면, 오수는 돈많은 여자를 만난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속된 말로 땡잡은 거죠. 그러나 오수를 1년을 기다리며 오영 앞에 사기꾼, 도박꾼이 아닌, 오수로 만날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오영도 큰 변화가 있었지요. 아무도 믿지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오영이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돈많은 시각장애인 상속자가 아닌...

 

내 마음이 겨울이면 주변도 다 겨울이고, 세상은 외롭고 고독한 곳일 뿐이죠. 삭막한 나무가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하게 변했듯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상이 벚꽃으로 화사해졌듯이, 오수와 오영은 자신들 스스로를 춥게 만들었던 겨울을 끝내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겨울이었던 마음이 봄이 된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다 저마다의 삶의 이유를 가지고 살아간다지만, 삶은 삶 자체로 이유이고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을 빗대어 쓰레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오수와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오영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야말로,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진짜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 블로그를 한RSS에 추가하고 싶으시다면 클릭▶▶▶▶



Trackback 0 Comment 11
2013.03.15 10:31




오수에 대해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오영, 오영을 향한 마음을 더 이상 감추기 힘들어진 오수, 멜로의 급진전을 예고한 오수의 키스가 나왔지요. 오수의 정체는 장변호사와 왕비서, 그리고 오영의 친구 미라와 중태까지 모두 알게 되었지만, 왕비서가 영을 위해 당분간 비밀에 부치려고 합니다.

오수로 인해 달라진 오영,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 왕비서(배종옥)는 오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죠. 영을 올려다 보는 오수의 눈빛이 동생이 아닌 여자를 향하는 눈빛이라는 것도 말이죠.  

 

차갑게 돌아선 오수를 뒤따라 나가는 영, "오빠 가지마", 그 슬픈 목소리와 눈은 여섯살 오영에게 남아있는 악몽같은 슬픔이었습니다. '또다시 버려졌다, 또 오빠는 떠나버렸다', 체념하고 돌아서는 오영에게 다시 돌아온 오수, 뒤쫓아 온 왕비서가 오영의 외투와 신발을 챙겨줍니다. 왕비서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오수가 오영에게 차갑게 대한 것이 오영의 마음을 돌려 수술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오영이 차에 타는 것을 도와주지요.  

 

"잊지마, 난 널 버렸어", 영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오수는 매섭게 몰아부칩니다. 눈을 뜨게 되면, 오수를 떠나보내고 유령의 집같은 온실방에 갖다놓고 보라고 말하지요. 온실 비밀방에서 녹화테이프를 돌려보는 영에게 오빠에 대한 기억 하나를, 버렸다는 기억을 하나 더 추가시키라고 말이죠.

오수의 품을 찾는 오영을 힘겹게 밀쳐내며 오수는 울먹입니다. "넌 내가 널 떠나보내고 어떤 마음일지 상관이 없어, 그치? 죽으면 그 뿐이니까. 니가 이렇게 싸가지없는 애인줄 알았다면, 좀더 일찍 알았다면, 너랑 음식만들고 눈꽃소리 듣고, 널 안고, 마음 아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런 추억은 절대 만들지 않았을거야. 이제 난 살기 위해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나는 살아야겠으니까. 나는 너 없이도 이 더러운 세상을 살아야겠으니까". 

제게는 오수의 말이 오영에 대한 그의 힘겨운 사랑고백처럼 들리더군요.  영을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 집에 들어가 죽은 오수 흉내는 내지 않았을 거라고, 널 아프게 떠나보낼 수도 없고, 널 떠나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너없이는 못살겠다고...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오수가 진짜 오수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보육원을 찾아 오수의 과거 사진을 본 왕비서는 어린 오수의 목에 난 흉터를 오수에게서 본 것을 기억해 내지요. 장변호사도 중태의 과거사진을 통해 오수의 팔 화상이 왼쪽팔이었음을 확인했고, 진짜 오수는 1년여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수를 집에서 내보내려는 왕비서와 장변호사, 두 사람 모두 오영에게 오수의 정체를 밝히기를 주저합니다. 처음으로 마음을 연 오영이 받을 배신감과 상처, 그리고 다시 오영이 문을 닫아버릴까 걱정되는 두 사람이기에 말이죠. 결국 오수의 정체는 암묵적으로 비밀에 부치기로 합니다. 영이 수술을 받겠다는 말을 먼저 꺼냈기 때문이었지요. 

영이를 변화시킨 오수를 당분간은 영이 곁에 두자는 왕비서, 그녀에게 영이는 자신의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이를 위해서라면 사기꾼에게 잠시 속아줄 수 있는 왕비서입니다.

왕비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제 믿음은 비록 그녀가 오영의 눈치료를 방치했다는 잘못은 있지만, 오영에 대한 사랑은 모정과도 같은 진심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는데, 왕비서와 오영의 해묵은 오해와 갈등, 애증을 오영의 상처의 치유과정에서 함께 화해해 갈 거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눈 위에 '살고싶다'는 글과 함께 오수 눈사람을 만들어 둔 영, 오수의 마음이 활짝 개인 맑은 날처럼 환해져 옵니다. 오영과 눈사람을 만들고, 영의 눈에 맞은 척 "아야" 엄살을 피우면서도 오수는 행복합니다. 오영이 수술을 받겠다는 말이 그를 웃게 하고, 즐거워 하는 오영의 웃음이 그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런 추억이라면, 무철의 손에 죽게 되더라도 기꺼이 간직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오수입니다.

"나는 처음으로 아이처럼 즐거웠다. 무철형의 칼도 두렵지 않았고, 서른살 내 인생이 처음으로 억울하지 않았다. 세상은 분명 공평하다는 생각도 처음으로 들었다. 영이와 있는 지금 이순간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서 무철형의 칼을 맞을 때 절대 억울해 하지 말아야지. 수백 수천 번을 다짐해 본다. 그래도 순간순간 두렵다. 그래도 또 생각하려 한다. 오늘 이 순간 이전까지 끝없이 죽음을 두려워 했을 내 앞의 영이를... 난 내 삶이 절대 억울하지 않다. 지금 행복하다. 됐다".

 

그러나 오수의 웃음과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영의 주변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오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진소라의 문자를 통해 알면서, 떠날 준비를 합니다. 오영의 수술만 끝나면... 그리고 무철의 손에 죽겠다고... 

오수를 힘겹게 하는 것은 오영이 수술성공률이 낮다는 조선(정경순, 전 조선희인줄 알고 지난 글에서 선희누나라고 계속해서 쓰고 있었네요;;)의 말에 힘이 빠져버리죠. 오영을 데리고 다시 오겠다고,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게 하라"는 선이누나 말을 무시하고 나가지만,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오수였습니다. 병원기둥에서 흐느끼는 오수, 그의 등이 어찌나 슬프고 힘겨워 보이던지요.

눈위에 살고 싶다는 말을 써두고 오수에게 결심을 밝힌 영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오수입니다. 오빠의 코가 얼마나 높은지, 키는 얼마나 큰지 보고 싶어하는 오영, 그 아이에게 삶의 희망이란 정말 없는 것인가? 10%의 희망, 9%보다 많고, 0%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희망적인 숫자입니다. 오수야, 오영아 힘내자! 

 

집에 돌아온 오수의 귀에 들리는 풍경소리, 실을 묶고 자는 오영을 보며 영에게 향하는 마음을 막지못하는 오수였습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오수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영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오수의 눈에 눈물 한줄기가 흐르고, 오영이 눈을 떠 키스하는 오수를 느끼죠.

이명호 본부장이 했던 키스와는 다른 느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마음이 편해오는 입맞춤, 키스라는 것이 이런 거였나 봅니다. '오빠의 여자친구에게 질투를 느끼고, 자꾸만 오빠의 얼굴을 만지고 싶고, 오빠의 입술이 궁금하고, 매일매일 그리워지면서도, 죄지은 듯 가슴이 콩닥거리는 이 느낌, 이 감정은 뭘까?'. 

 

***해피엔딩을 암시한 오수의 흉터

 

오수의 목에 있는 흉터를 본 순간, 첫회 의문으로 남았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오수의 목에 흉터가 있는 것을 본 왕혜지(배종옥)가 현재의 오수에게 같은 흉터가 있음을 기억하고는 오수의 정체를 확신했지요.

오수의 흉터를 보면서 전 해피엔딩의 강한 복선으로 읽었습니다. 첫회 오수와 오영의 첫만남에서 형사가 자신을 쫓는 것을 알게 된 오수가 오영의 입을 거칠게 막고, "안다치게 할테니까 잠시만 조용히 하라"고 했었던 장면 기억하실 겁니다.

그 때 오영의 눈동자가 클로즈업되면서 뿌옇지만 뭔가 오영의 눈에 보이는 장면이 나왔었죠. 처음에는 오수의 피부라고 넘겼는데, 이번회 오수의 흉터를 보면서 오영이 그날 본 것이 오수 목에 난 흉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영의 시력은 전맹은 아니지요. 희미한 빛을 감지할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오영의 주변 사람들은 전혀 안보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말이죠.

그런데 왜 1회에서 오수의 흉터를 보는 오영의 눈을 클로즈업시켰을까요? 전 결말에 대한 복선을 깔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영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항암치료를 받을 것이고, 각막제공자를 구해 눈 수술도 성공을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무철이가 줄 것같은 예감이 듭니다. 무철이 누나에게 그랬지요. 오수가 자기보다 나은 점은 오수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버릴 줄 아는 놈이라고요, 무철은 폼잡느라, 한마디로 모냥빠지는 짓은 안한다가 그의 쿨한 인생관이었는데, 오수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도 버리고, 무릎을 끓는 놈이라고 말이죠. 폐암말기,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한부 무철이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자기 것을 주고 갈 수 있다면, 각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력을 찾게 되는 오영, 오수는 오영이 수술을 마치면 그녀 곁을 떠나겠지요. 진짜 오빠로 남을 수도 없는 오수이고, 왕비서와도 오영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만이라고 합의를 볼 듯하고요.

떠난 오수를 오영이 알아볼 수 있는 것, 오영이 오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말을 하기 전에는 목소리로 감별할 수도 없고, 눈앞에서 마주친다고 해도 오영은 오수를 그냥 지나치겠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니까 말이죠. 낯익은 좋은 냄새에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지요.  

시력을 되찾은 오영이 오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혹시 오수에게 생일선물로 준 풍경팔찌 소리와 오수의 목에 난 흉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1년여전에 오빠 오수를 찾아갔다가 오빠의 편지를 읽어주던 그 남자 오수에게서 희미하게 보았던.... 오수는 그녀를 그냥 지나치려 하지만, 오영이 오수를 알아보지 않을까...

오영이 얼마나 오래 사는 지는 수술 후의 문제이며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이 얼마나 살 지는 모르니까요. 

1회 오영이 오수의 흉터를 본 장면을 클로즈업시켰던 이유, 그것은 오영도 살고 시력도 찾고 오수와도 재회한다는 해~~~피한 결말을 위한 것은 아닐까...요? 

 

***개인적인 부탁드립니다. 드라마 신의 재리뷰를 하면서 임자방을 따로 마련해 임자들과 많은 인연들을 맺게 됐습니다. 그 중에 임산부도 있었는데 태아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예쁜 딸아이를 올 1월 순산했습니다.

우리 임자들이 가슴으로 함께 품고 기도한 아이가 오늘 심장수술을 받습니다. 두달이 채 안되는 어린 아기가 잘 버틸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세요. 함께 해준다는 것이 많은 힘이 될 겁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 블로그를 한RSS에 추가하고 싶으시다면 클릭▶▶▶▶



Trackback 0 Comment 41
2013.03.14 12:11




오수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왕비서와 장변호사가 오수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게 되는 듯한데, 전 개인적으로 장변호사나 왕비서가 오수에게 아직은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싶습니다. 오영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오수이기에 좀 더 오수를 지켜봤으면 싶네요. 

앞으로 오수의 거취문제나 정체가 오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쯤해서 오수의 정체를 오영이 알았으면 싶군요. 오수에게 끌리는 감정이 단순한 오빠에 대한 감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가는 오영의 심리변화도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말이죠. 송혜교의 연기가 좋아서 여자가 되어가는 감정연기도 보고 싶어지는군요.

 

이젠 오수에게도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는 것이 상관없어졌지요. 오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살 수 있는 78억이 아니라, 오영을 살리는 것이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니까, 많이... 

"왜 약을 안먹였냐"고 이유를 물어보는 오영에게 오수가 말하죠.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거나...". 희주의 죽음 이후 오수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에게 여자란 하룻밤 욕정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진소라의 사랑도 집착일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사랑은 의리가 아니야. 니가 나한테 하는 것은 집착. 사랑은 아주 간단해, 상대가 끝났다고 하면 끝나는 것, 싫다는 사람에게 같이 사랑하자고 하는 건 집착. 사랑은 거래가 아니어서 배신이 없어.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거니까 생색도 안통하고, 자랑도 안통해. 우긴다고 집착이 사랑이 되지는 않아".

노희경 작가 특유의 문체가 살아있는 대사였습니다. 간단명료하고 냉정할 정도로 솔직한,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듭니다. 상대가 끝났다고 하면 끝나는 것! 상대는 끝냈는데 인간인지라 무자르듯 끊을 수 없는 감정이기에 집착으로 변하고, 상대도 본인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소라가 영이가 목숨을 걸만큼 좋냐고 묻자 오수가 말하죠. "모든 인간은 딱 한 번 죽는다는 말을 기억하려고 해. 그렇다면 지금이 나쁘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이 대사에서 혼란이 왔지만(조인성의 대사 끊는 지점이 모호해서 이해하는데 애먹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딱 한 번/죽는다는 말을 기억하려고 해"로 대사를 쳤는데, 그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전 "모든 인간은 딱 한 번 죽는다는 말을/기억하려고 해"로 풀었습니다. 그렇죠, 인간에게 죽음은 딱 한 번 뿐이죠.

 

희주의 죽음 이후 사랑따윈 없다고 생각했던 오수의 삭막한 겨울에 분 바람,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닫힌 마음을 사랑으로 연 오수입니다. 그 바람은 시궁창같은 곳에 쳐박혀도, 무철의 칼에 찔려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버둥쳤던 오수를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는 이유같은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오수,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던 오수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죽고 싶을 때는 많았던 오수였지요. 그런데 진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입니다. 죽어도 좋겠다면 지금, 오영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느새 가슴 한가득 꽃으로 피어나 버린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겠다는 오수입니다. 

그런 오수이기에 무철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하지요. 무철의 누나에게 오영을 수술하게 도와달라고 말이죠. "살려주라, 형. 내일도 올게. 모레도 또 올게. 내가 형 손에 죽으면 되잖아. 영이는 살리자, 죄없는 애는 살리자. 희주처럼은 만들지 말자", 무철에게 발로 채이고 주먹으로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오수는 영이만은 살리자고 눈물로 애원합니다.

돌아서서 가는 무철의 작은 흔들림은 그의 마음이 움직였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희주를 짝사랑했던 무철의 사랑도 지금의 오수처럼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던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오수의 겨울에 분 바람이 목숨을 내놓아도 좋을 사랑이었다면, 오영의 겨울에 분 바람은 살고 싶다는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오영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그 삶에 대한 의지가,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절박해서, 오히려 죽고 싶어하는 오영의 진심을 말이죠.

안괜찮아도 된다며, 팬션에서 영이 했던 말로 위로받았던 오수가 영을 위로하지요. "안괜찮아도 되니까 울래?". 영이 그랬던 것처럼 오수가 영을 위로해 주지요. 영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뇌종양이 재발되었다고 막상 의사가 말했다고 하니까 무섭고 두렵고 슬픈 영이었지요. 영의 눈물은 살고 싶은 영의 마음이 흘러내렸던 거였지요. 

오영을 살리기 위해, 살고 싶다는 말을 뱉을 때까지 오수는 오영에게 차갑게 대합니다. "참 재수없다, 너! 내가 너보다 나은게 딱 하나있어. 난 그 어떤 순간에도 살고 싶어한다는 거야".

"넌 살고 싶으면 살아지지만, 난 살고 싶어해도 살 수 없어. 여섯살때부터 준비한 거야. 언젠가 때가 오면 지금처럼 웃으면서 가야지. 구차하게 연연해 말아야지. 너랑 있는 이 순간도 너무 좋고 따뜻해도 연연해 말아야지. 그러니까 날 흔들지마. 기대하게 하지마!".

뇌종양이 재발되었다는 말에- 물론 오영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오영은 담당의사를 찾아가 물어보죠.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는 거냐고 말이죠. 그의 가족이 같은 상황에 처했다 해도 수술을 받게 할 거라고 말했던 의사는 오영의 물음에 답하기를 주저합니다. 수술이 성공해도 또다시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산다는 확신을 해주지 못하지요.

 

한가닥 희망을 찾고 싶었던 오영은 삶의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려 합니다.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오영, 그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살고 싶다는 생각을 여섯살 이후 처음 들게 한 오수에게 자신의 가장 예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왕비서에게 결혼하겠다며 우는 영,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영에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한 왕비서, 두 사람이 21년간을 지내온 세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왕비서에게 영은 삶의 이유였고,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영이 필요로 하는 사람, 그녀를 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그녀에게는 사형선고와도 다름없는 순간일 겁니다. 아직 왕비서가 영의 눈을 제때 치료하지 않은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줌마"하며 영이 고사리같은 손을 내밀었던 그날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영이가 크면 언젠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올것이고, 영의 아버지 회장님이 죽으면 왕비서는 영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어질테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영에게는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왕비서는 그런 영을 보고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명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영을 보란듯이 키우고 싶었습니다. 첩살이한다고 형제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PL그룹의 내연녀라는 딱지는 그녀를 영의 집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했습니다. 영이 정상인처럼 회사일을 보고 PL그룹을 이끌어 나가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었고, 영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녀가 사는 이유였습니다. 

첩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모욕도 감수했던 왕비서였지만, 죽은 회장은 왕비서를 끝내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랑도 하지 않았죠. 생각해보면 왕비서도 불쌍한 여자입니다. 영을 수술시키기 위해,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영을 빰을 때리기 까지 한 왕비서, 영이가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에게 올인한 그녀의 인생, 영이가 없으면 그녀의 삶은 죽음과도 같은 사막이 될 거라는 걸 왕비서는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영이 없이는 못산다고 한박사와 전화통화를 하던 왕비서의 마음은 거짓이 아닌 듯 보이더군요. 왕비서의 영에 대한 사랑은 거짓이 아니지만, 영에게 필요한 사람이 자신뿐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아직 왕비서는 알지못하고 있을 뿐이죠.

영이도 왕비서의 그 마음을 알고 있었지요. 알면서도, 왕비서가 없으면 영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왕비서를 숨막혀 하면서도 서로를 이용하고 의지합니다. 전 이 두사람의 관계에 이상하게도 연민을 느낍니다. 으르렁대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습으로 보여서 말이에요. 

 

왕비서의 손찌검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던 영, 오수의 차가움에 무너지고 말지요. 영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오랜 바람을 말입니다. 여섯살때 뇌종양을 앓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영은 어린 나이에 받고 싶었던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반항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타난 오빠, 영의 언 마음을 녹여주고, 보이지 않는 영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 오빠가 차갑게 영의 손을 뿌리칩니다. 그리고 영이 죽기보다 듣기 싫은 말, 영에게 가장 두려운 말을 뱉지요. "나 이제 떠날려고".

"왜 왔어? 처음부터 이럴려고 왔어?".  

혼자 남겨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영에게 오수가 말하죠.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살고 싶다는 말, 살아야 겠다는 의지".

 

어떻게든 영을 수술시키고 싶은 오수는 영이 수술을 받지않으면 떠나겠다고 이를 악물고 영에게 차갑게 대하지요. 영의 비밀의 방에서 알아버린 혼자 남겨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늘 외로웠던 아이 영을 알고 있기에 말이지요. 그런 오수의 가슴에 오영의 말이 심장을 할큅니다.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난 살 수도 없는데, 니가 보고 싶지 않냐고? 보고 싶어, 니가 오고부터 매일 네가 그리워. 그럼 뭐해? 난 볼 수도 없는데...나도 무서워 죽는게.... 왜 날 이렇게 약하게 만들어 넌! 왜 자꾸 날 살고 싶게 만들어, 넌!!".

 

오영의 차가운 겨울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속에 자라고 있는 뇌종양을 살 수 없을 거라 말합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떠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런데도...그런데도 오빠가 떠나는 것이 더 두려운 오영입니다. 살고 싶다고 말하면 그가, 오빠가 떠나지 않을까요? 진짜 살고 싶습니다. 간절하게...

사랑을 버린 남자에게 사랑의 바람이, 죽고 싶은 여자에게 살고 싶은 마음이 불고 있습니다. 노희경 작가가 그들의 겨울을 어떤 바람으로 따뜻하게 녹일지 궁금해지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 블로그를 한RSS에 추가하고 싶으시다면 클릭▶▶▶▶



Trackback 0 Comment 9
2013.03.08 14:36




건달들에게 둘려싸여 봉변을 당하고 있는 오영을 본 오수의 눈이 뒤집혔습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의 안광은 시각장애인을 희롱한 정안인에 대한 분노게이지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다가온 여자, 동생처럼 정말 아껴주고 싶은 영이었기에 더했겠지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준 학생도 있었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고 희죽대며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도 이 사회에는 공존합니다. 다행이면서도 불행스럽게도 시각장애인 영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영이 혼자가 아니고 싶은 그 심정은 간절함을 넘은 절박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믿지못하는 영, 그 아이를 과보호하고 있는 왕비서에 대한 불신은 그녀의 눈에 이상이 생겼을때 생긴 뿌리깊는 불신입니다.

다행히 아버지의 후배이자 영을 누구보다 딸처럼 아껴주는 장변호사(김규철)가 있지만, 24시간 영의 손발과 눈이 돼줄 수는 없겠지요. 

복지관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혼자만의 허락된 시간을 살아왔던 영, 그마저도 영이 한참 커서 성인이 된 후에야 얻은 휴식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이 죽고 싶어하는 이유가 단지 앞이 보이지 않아서, 가족이 없는 외로움때문만은 아니었지요. 그녀의 막대한 재산도 복합적인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에게 돈이 없다면 그녀의 곁에 남아있을 사람도 없었겠지요. 오수가 처음 찾아왔을 때도 돈때문이라고 차갑게 단정지어 버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죠. 21년을 떨어져 지낸 오빠에 대한 애틋함이나 그리움과는 별도로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은 영의 돈때문이었으니까요.

사랑하지도 않는 이명호 본부장과의 결혼은 보이지도 않는 종이에 회장으로서 싸인을 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듯 이본부장과의 결혼도 시키니까, 아버지가 정해줬으니까 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죠. 영에게 사람은 결재서류와도 같았던 게지요. 처음에는 오빠 오수마저도...

 

물론 영에게도 첫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자 소원해졌고, 첫사랑 그 남자아이도, 영도 서로에 대한 오해를 좁히지 못하고 영은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첫사랑 그 아이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에 복지관 봉사활동을 하다 지금의 아내(청각장애인)을 만나 결혼해 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영이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달래주고 오랜 시간이 걸려 마음으로 화해를 하기도 했지요.

 

뒤늦게 찿아온 오빠의 목적이 돈이냐고 끊임없이 의심했던 것은 오영이 처한 상황에서는 당연하겠지요. 오수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은 돈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주었고, 언 마음을 녹인 것은 엄마와 어릴 때 오빠와 함께 했던 추억이었습니다. 오수가 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27살 오영에게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어 주었지요. 왕비서나 이명호 본부장이 주지 않았던 현재라는 세상에서의 행복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영에게는 도와주는 믿을만한 지팡이가 필요했습니다. 21년만에 오빠라고 나타난 오수는 오영의 추억을 끄집어 내주었고, 영은 자신의 지팡이가 돼줄 수 있을 사람이라고 경계를 풀기 시작했지요. 길바닥에 주저앉아 오빠는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말해달라는 영의 오열은 지팡이가 필요한 영의 비명과도 같았습니다. 

영은 정말로 죽고 싶어한 아이였습니다. 그녀의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뇌를 갉아먹는 듯한 고통이 시작되면서 영은 죽음을 선택하려 합니다. 고통도 절망도 괴로움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편하게 해준다는 약을 먹고 싶을 만큼 통증이 심해지지만, 영은 병원만은 거부하죠. 얼마남지 않은 삶, 주사바늘과 투약, 항얌치료로 병원에 갇혀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오빠와 엄마가 떠난 이후,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 영은 희망이라는 것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온 아이였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설레는 연애를 해 볼 희망도,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붉게 물든 단풍이 들고 온세상을 하얀 눈이 덮어도, 영은 체감온도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뿐입니다. 계절은 속절없이 왔다가며 영의 코와 피부를 자극하기도 한다지만, 영은 새로운 관계라는 것을 맺을 수 없는 아이입니다. 복지관을 제외하고는 왕비서가 정해준 사람만이 영이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들마저 왕비서가 건네는 돈이 큰 이유였지만 말이죠. 중태도 미라도...   

그때 영에게 나타난 사람이 오빠 오수였습니다. 왜 오빠라고 철썩같이 믿고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 혈액으로 유전자 검사를 하자는 왕비서에게 말하지요. "추억은 조작할 수 없어요. 오빠는 우리 둘밖에 알 수 없는 추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요. 오빠가 아니라는 근거는 없어요".

 

영은 또 다른 오수와 연락이 된다는 무철의 명함을 들고 진짜 오빠일지도 모를 또다른 오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혼자 집을 나섰지요. 오수에게 화를 내는 오영의 감정을 혼자서 되집어 봤습니다. 그토록 따뜻한 사람이, 엄마와 오빠와 함께 했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보여준 사람이, 영을 편하게 해주는 만 개의 풍경소리를 들려준 사람이, 자기가 없어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언제나 풍경이 흔들릴 거라고 점자 편지를 써주고 영의 팔에 실로 풍경을 연결해 주고 간 사람이,  진짜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희선이 네 오빠라고 나타난 인간이 사기꾼이라고 했던 말과 팬션에서 오수가 또 다른 오수를 사기꾼 쓰레기라고 했던 말들이 하나로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오수는 사기꾼이며 가짜 오빠일 수도 있다는... 오영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오수가 진짜 오빠인지가 아니라, 자기를 속인 사기꾼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미치더군요. 영이 처음으로 믿고 싶어진 사람은 오빠이든 아니든, 지금의 오수 그 사람이 21년만에 처음이었으니까요.

차갑게 굳어버린 영의 얼굴, 오수가 처절하게 자신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그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의 차가운 얼굴, 미소가 걷힌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을 이젠 견디기 힘들어진 오수이니 말이죠. 

얼마나 참기 힘든 고통이었으면 한순간에 편하게 죽게 해준다는 약을 먹으려 했을까... 유언장까지 써주며 자기를 죽여달라고 했는데 오수가 왜 자신의 죽음을 방해하는지, 오영은 그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돈을 노리고 왔다면 돈을 가져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말이죠.

오영은 오수가 자신을 살리고 싶어한다는 것이 밉습니다. 죽게 내버려뒀으면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낯선 남자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그런 모습을 오수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됐을텐데... 오영의 눈물은 오수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 여자로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처럼 여겨졌을 듯 하더군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현실... 

오빠 오수는 좋은 것만, 아름다운 것만, 예쁜 소리만 들려주고 싶어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오영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희롱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오영은요, 오빠지만 오수에게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여자가 되고 있었던 거예요. 이는 이성간의 관계를 떠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자연스러운 변화이기도 하지만 말이지요.

 

장난처럼 공동소유로 하자고 했던 죽음의 약이 동물을 안락사시키는 독약이었음을 알게 된 영, 돈을 노리고 온 사기꾼일지도 모르는 수의 정체, 유산을 주겠다는 유언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기를 죽이지 않으려는 오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영은 혼란스럽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죽여달라고, 죽고 싶다고 노래처럼 했던 영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화기만을 찾아 바닥을 더듬는 그 이율배반적인 절망감을 오수 오빠라는 놈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죽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고자 발버둥치는 앞뒤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오영의 비참한 심정을 오수는 보게 되죠. 죽고 싶어하는 것이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죠.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아서 죽기살기로 살려했던 오수,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은 오영, 동전의 양면처럼 두 모습 다 동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고 살려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이제는 잃고 싶지 않은 오수입니다. 지키고 싶어진 오수입니다. 오수의 눈물은 오영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78억때문에 무철의 손에 죽더라도, 김사장 손에 죽더라도 오영은 살리겠다는...

그가 희주를 보내고 방황했듯이 무철도 밑바닥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사랑을 다시는 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그들의 인생을 방치하고, 망가뜨리고 살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그것이 희주에 대한 죄책감과 그들의 사과방식, 고민방식이기도 했고 말이죠.  

 

오수에게 남자들에게 희롱당하며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고는 "왜 못 죽였어? 난 이렇게 쉬운데... 난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는데 왜 못죽였어 날!!"이라며 우는 오영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전 역설적이게도 자그마한 삶희망을 봤습니다.

독약을 쏟아버리고 빈캡슐을 먹으라고 준 오수의 마음을 읽은 영, 오수가 진정한 사랑에 마음의 눈을 떠가듯 오영에게도 그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오수가 왜 자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할까에 대한 답을 오영은 찾을 수 있을까요? 왜 그 사람을 믿고 싶었었는지에 해답이 있을 듯한데, 상처와 아픔이 유독 많은 오영이기에 오수의 마음을 알아가기엔 오영의 겨울은 조금 더 길어질 듯 합니다.

그래서 전 왕비서와 장변호사가 오영을 도와주었으면 싶네요. 모처럼 문을 연 오영의 마음이 다시 닫혀버리지 않게 말입니다. 때로는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음을 오수의 정체를 통해 봅니다. 오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지금의 오영에게 좋은 일일까 싶어서 말이죠. 오영도 오수의 정체를 거의 확신하는 듯 하지만, 오영 또한 더 모른척 오수를 곁에 두고 싶어할 듯 보이기도 하고 말이죠.  

영과 수의 마음은 겨울이었습니다. 마음을 닫고 살았던 그 시간이 그들에게는 겨울입니다. 오빠와 엄마와 헤어지고, 희주를 보내고 그들은 그들의 겨울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겨울을 깨우는 소리, 그들의 마음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오래도록 꽁꽁 얼어서, 녹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시리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들 마음속 그리움과 외로움이 달려있는 풍경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을 녹이는 소리를, 사랑을 말해주는 소리를, 혼자가 아니라는 소리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 블로그를 한RSS에 추가하고 싶으시다면 클릭▶▶▶▶



Trackback 0 Comment 11
2013.03.07 12:27




오수에게 살면서 가장 기억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날이 있다면 생일이라는 날입니다. 쓰레기같은 막장 인생이 시작된 그 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죠. 생명의 축복같은 것은 오수에게는 동화에나 나오는 먼 나라 사람 얘기였습니다.

이름조차 받지 못하고 버려진 그에게 생일의 의미는 개떡같은 날일 뿐이었습니다. 빵을 만들어주겠다고 부산을 떨던 영, 그때까지도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죽은 오수의 생일이었음을 말이죠.

화점에서 쓰러진 오영, 한사코 검사를 거부하는 오영에게 화를 내지만 창립파티에 함께 참석해달라고, 도와달라고 내미는 오영의 손을 거절하지 못하는 오수입니다. 도와달라는 말을 이제는 스스럼없이 하는 영, "날 불쌍한 장애인으로만 보는 회사 사람들 앞에 난 혼자가 아니다, 네겐 멋진 오빠까 있다 자랑하고 싶어". 창립파티에 함께 가야 24시간 아픈지 안아픈지 감시할 수 있지 않느냐고 영악을 떠는 오영에게 두손 두발 들어버리는 오수였지요.

 

"감기 몸살만 걸려도 검사하고, 무균실에 보내고, 바늘을 수없이 찌르고... 나도 무서워. 내가 제일 무서운 거는 이 냄새나는 병원에 재미없는 왕비서랑 24시간 갇혀 지내는 거야", 영에게 병원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숨막히게 외로운 곳, 병이 나아도 또 창살없는 감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영에게는 외로움의 연속, 연장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한시적으로 오빠로 영의 곁에 있는 오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영에게는 21년만에 느껴보는 행복입니다. 31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은 병원에 쳐박혀 지내고 싶지 않은 영입니다.

리프트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영을 업고 간 오수,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어있는 절경을 보여주지요. 앞을 보지 못하는 영에게는 소리로 그 숨막히게 아름다운 설경을 느끼게 합니다. 눈이 얼어 부딪히며 내는 소리, 만개의 풍경을 달아놓은 듯 반짝이는 소리를 영도 느낍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설경이 영의 보이지 않는 눈에도 상상으로 전해집니다.

소리와 영상의 미학, 김규태 감독의 디테일에 눈도 호강했지만 마음도 감동받았던 눈이 시리게 예쁜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영에게 들려주는 언 눈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노작가와 김감독이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선물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겨울, 수와 영 두 사람의 언마음처럼 차가운 마음에 이는 눈꽃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는, 그들 차가운 마음에 이는 사랑의 감정을 영상과 소리로 전해준 장면이기도 합니다.

"풍경을 잃어버려도 겨울 바람이 불면 얘들은 언제나 여기서 이렇게 소리를 낼 거야. 니가 지금 이걸 볼 수 있었음 참 좋겠다. 하지만 이것보다 내가 너에게 진짜 보여주고 싶은 건 바로 영이 너야. 니가 그 어떤 것보다 널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넌 아주아주 예쁘고 멋지고...".

오수의 진심이 전달되어 옵니다. 오영의 눈에서 흐르는 한줄기 눈물은 고마움이었습니다. 돌아서서 오수의 볼에 뽀뽀를 해주는 영, "오빠한텐 이렇게 키스하는 게 맞지?".

오수가 오빠라고 찾아왔던 첫날, 지팡이를 휘두르며 "니가 주는 사랑 따위 필요없어. 가져갈 게 있으면 챙겨 꺼져"라고 차갑게 돌아섰던 오영이었죠. 이젠 오수가 주는 사랑이 고맙고 행복하고 설레는 오영입니다. 오수의 소리인양 잠잘때는 오수가 달아준 풍경소리를 들어야 마음이 편해지고, 그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인양 소리마저 향기롭습니다.

***전 오영이 오수가 진짜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오영이 차려준 생일상도 남다르게 다가 오더군요. 물론 진짜 오빠에 대한 것을 알고 싶어할 오영이기는 하지만, 오수에게 들은 또 다른 오수의 사연을 알고 있는 오영이지요. 태어나자 마자 나무밑에 버려진 아이, 그의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태어났음음 오영 혼자라도 축하해주고 싶어한 듯해서 말이죠. 오영을 기쁘게 해주고, 웃게 해주고, 그런 오빠 오수에게 '당신의 인생이 쓰레기는 아니라고, 나를 웃게 해준 것만으로도 내 오빠가 돼준 것으로도 고맙다'는 인사를 그녀가 죽기전에, 오수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어한 듯해서 말이죠.

 

장변호사에게 줄 선물을 사러갔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영이 실은 오수의 생일 선물 자그마한 풍경이 달린 팔찌를 사러갔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수, 영이 준비한 케익과 잔받침에 커피를 흘리고 식어버린 커피를 마주하는 수는 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자는 영을 보며 또다시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수,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애간장 녹이는 수의 감정은 고통스럽기 까지 합니다. 오빠라고 믿고 있는 영이 받을 충격에 간신히 감정을 또 접어보지만, 수는 스스로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돼죠. 영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한 오수였지만, 오수의 닫힌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은 영이었습니다.

버려진 아이, 희주와 자신의 아이도 버리고 돌아섰던 자책감에 아무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그가 사랑을 알아갑니다. 첫사랑을 잃은 오수의 방황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젠장. 하필이면 그 사랑이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려던 영이라니...'.

목적을 이루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던 오수가 영의 곁을 떠나기 힘들 것임을 알아가죠. 영을 향하는 위험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도 말이죠. "멈출 수 있었다면 그 때 멈췄어야 했다. 영이에게 더는 다가가지 말라는, 나의 위험한 놀이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경계경보를 난 그 때 분명 들었다. 자만해선 안됐었다. 내가 사랑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처음으로 이 위험한 놀이에 영이 그 아이보다 내가 더 처절히 다치리란 확신이 들었다".

처음으로 받아본 생일케익과 선물이었습니다. 앞도 보이지 않은 영이 커피를 내리고 서투른 손으로 커피를 따르고,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수입니다. 처음입니다. 수의 진짜 생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태어난 날을 축하해 준 것이 말이죠.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오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축하해주는 영에게 깊이 빠져드는 자신을 봅니다. 

사랑 따위 사치일 뿐이라고, 그 사랑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 하찮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오수가 사랑에 빠져듭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모든 것을 버리고 왔던 희주, 그 아이도 그랬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살리고 싶은 오수입니다. 영이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오수임에도 영이가 행복해 하는 모습에 그도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오수에게는 말 못할 고통이 되어 부메랑처럼 가슴을 할큅니다. 눈치료가 가능하다면 치료를 해주고 싶은 오수입니다. '살고 싶어 하는 남자가 죽고 싶어하는 여자를 만났다', 지하철에서 등을 밀라며 죽고 싶어하는 여자, 혼자 남겨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여자를 살리고 싶어진 오수입니다.

세상에 덩그라니 혼자 남겨진 오수,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누구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았던 오수였습니다. 희주를 보내고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않았던 것은 오수에게 내재된 상처때문이었습니다.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죠. 이젠 이 아이 영을 그렇게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오빠가 아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영이 받을 상처와 충격, 배신감을 오수가 더 감당하기 힘들 듯 합니다. 영이 받을 배신감과 상처를 생각할 때마다 수의 마음이 더 아프고 괴롭습니다. 수가 겪게 될 처절한 고통은 그것을 말함이겠죠. 그리고 더 이상 다가가서는 안되는 마음, 눈덩이 처럼 커져만 가는 영에 대한 사랑이 힘겹기만 합니다. 다가갈 수 없는 사랑, 지켜만 보는 사랑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만 멈추라는 위험신호를 보냈을때 멈춰야 했건만, 기침처럼 감추기 힘든 게 또한 사랑거늘, 이 남자의 힘겨운 사랑을 어떡하나요?

오영, 그 아이가 창립파티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든든한 오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알 것 같은 오수입니다. 오영의 외로움이 오수때문에 쓸려갔다는 것을... 오수 그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내고 아물지 않고 욱신욱신 쓰라리는 상처를 비집고 이미 사랑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검사를 거부하고 통증을 참고 기념사를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영, 식은 땀으로 범벅이고 몸을 가누기도 힘들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영은 압니다, 그 고통이 앞으로 더 자주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괴로울때 먹으면 괴로움도 고통도 절망도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마음이 아주 편해진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오수 방을 뒤져 약을 찾고 먹으려 했을까... 약을 먹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오영인 듯 하지만, 죽고 싶을 만큼 지독한 통증을 겪고 있는 오영, 이 캐릭터가 너무 마음 아픕니다.

죽음과도 같은 외로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감, 왕비서의 인형처럼, 붙박이 가구처럼 갇혀있는 생활은 영에게 죽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수가 말했듯이 그냥 사니까 살고 있는, 하루 하루 마음을 갉아가며 사니까 살고 있었던 오영이었습니다. 외로움에 죽고 싶고, 재발된 뇌종양의 통증으로 차라리 죽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해 답답하고, 오빠 오수가 나타나 잠시 거둬가 준 외로움이 없어진 지금 이순간 떠나고 싶은 오영입니다. 외롭지 않은 행복한 이 순간만 기억하며...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약을 찾았던 오영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그 여린 가슴의 절망과 심적 육체적으로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 짠하고 시립니다.

15년간 겨울이었던 오영, 그녀를 지독하게 외롭게 했던 15년간의 겨울에도 풍경소리처럼 아름다운 바람이 불어줄까요?

 

오수의 이름은 나무 수(樹), 진짜 오빠 오수는 지킬 수(守), 오영의 이름은 꽃부리 영 혹은 꽃영(英, 榮)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오영과 오수가 동명이인이라는 인연으로 속고 속이는 관계로 만나기는 했지만, 꽃을 지키고 꽃을 피우게 하는 나무로 해석하니 이름에도 노희경 작가가 이야기를 숨겨둔 듯 싶습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꽃,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든 풍경소리처럼 말이죠.

 

***

조무철(김태우)이 두달밖에 살지 못하는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과 무철의 누나로 나온 의사 정경순(아마 뇌질환 관련 전문의같습니다)이 오영에게 희망적인 복선을 내비쳐서 뒷 얘기가 추측도 되지만, 무철의 사연이 참 가슴 아프더군요. 깡패가 되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던 팍팍하기만 했던 그의 삶,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남기고 갈 것만 같아서 말이죠.

죽은 희주에 대한 그의 사랑, 무철이 해줄  있는 것은 희주가 사랑했던 오수의 진정한 사랑을 위한 무엇은 아닐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 블로그를 한RSS에 추가하고 싶으시다면 클릭▶▶▶▶



Trackback 0 Comment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