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철'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03.28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조인성 무죄, 그러나 송혜교는 유죄인 이유 (6)
  2. 2013.03.14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송혜교-조인성 눈물, 그 겨울 바람을 말하다 (9)
  3. 2013.03.08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송혜교-조인성 눈물, 절망 속에 피는 사랑 (11)
  4. 2013.03.07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행복해서 죽고 싶은 송혜교, 눈물이 아프다 (18)
2013.03.28 11:31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픕니다. 오수(조인성)와 왕비서(배종옥)가 떠난 자리를 느껴가는 오영(송혜교), 혼자라는 외로움과는 다른 쓸쓸함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21년간 싸워왔던 외로움과는 다른 허허로움입니다.

그때는 미움이라도 있었습니다. 엄마와 오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다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미움도, 기다림마저도 가질 수 없는 오영입니다.

 

'봄날은 간다'를 보며 장면을 설명해 주고, 초콜렛을 입에 넣어주며 입 가장자리를 닦아주던 오수는 없습니다. 시금치국을 끓여주고, 보이지 않는 오영을 위해 컵 하나까지, 음식이 놓인 방향을 매일 설명해주던 왕비서도 없습니다. 오영을 외롭게 하는 빈자리는 오영을 지독하게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없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떠나고 오영은 두 사람의 자리를 더 크게 느낍니다. 20년 넘게 함께 살아 온 왕비서의 부재는 불편함으로 다가오고, 오수의 빈자리는 그를 사랑하는 오영의 그리움입니다. 왕비서가 없는 불편함은 깨진 유리잔에 발을 다치는 소소한 것만은 아닙니다. 미워했던 만큼 사랑했던 왕비서였음을 오영은 그녀가 떠난 후에야 알아갑니다.

장변호사에게 넌즈시 왕비서의 안부를 물어보는 오영, 왕비서의 목소리가 밝고 좋았다는 말이 왠지 서운하게 들립니다. "다행...이네요", 가늘게 떨리는 오영의 목소리는 알 수 없는 서운함, 그리고 왕비서에 대한 그리움(사랑)이었습니다. 오영없이는 하루도 못살거라는 왕비서, 영이 너밖에 없다는 왕비서가 잘 지낸다는 말에 쓸쓸함을 느끼는 오영이었죠. 

 

집을 나온 왕비서(배종옥)가 교차로에서 어디로 향할지 몰라 멍해있는 모습은 앞이 보이지 않는 영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누구에게 가야할지, 한번도 영이를 떠날 생각을 못했던 왕비서는 패닉에 빠져 허둥대고 있었지요.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왕비서, 빈껍데기가 된 듯한 왕비서가 보여서 마음이 쓰라리더군요.

인생을 다 걸고 사랑했던 영, 그런 영에게 내쳐지고 그녀는 길잃은 아이처럼 세상이 막막해 보입니다. 헛개비처럼 휑한 눈으로 왕비서의 상태를 보여주는 배종옥의 연기가 참 좋더군요.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바람빠져 버린 풍선처럼, 온몸에서 모든 진액이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넋나간 모습이 왕비서라는 인물의 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으니까요.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니 편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식당에서 쓸쓸히 혼자 앉아 음식을 주문하는 왕비서, 그녀 자신보다 영이를 더 사랑했던 왕비서, 그녀의 영에 대한 사랑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녀는 엄마였습니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아줌마, 눈이 안보여요"했던 날부터 영이는 그녀의 딸이었습니다. 영이의 눈을 망가지게 방치하면서까지 영이의 엄마가 되고 싶었던 왕비서, 용서하기 힘든 일도 그녀가 "난 엄마니까"라는 말 한마디에 누그러지게 합니다.

엄마라는 단어는 사람을 묘하게 약하게 합니다. 밑도끝도 없이 왕비서를 믿고 싶었던 근저에는 왕비서가 영이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믿음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나는 눈을 잃고 당신은 당신 인생 전부를 걸고 사랑했던 딸같은 나를 잃고, 계산은 정확해야죠", 곁에만 있게 해달라는 왕비서를 영은 매몰차게 나가라고 하죠. "그럼 떠나야지, 왜? 난 엄마니까... 엄마는... 자식들한테 지는게 엄마니까".

오영의 집을 떠나면서 장변호사에게도 왕비서는 엄마임을 잊지 않습니다. 가끔 영이 소식 알려달라면서도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겠다면 말하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자식 걱정시키는 부모에요".

 

오수 역시 오영을 목숨만큼 사랑하게 되었죠. 사랑따위에 목숨걸지 않았던 오수, 그는 78억대신 오영의 사랑을 가지고 떠납니다. "내가 널 사랑한 건 진심이었다", 자신의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아니 진심임을 78억 가방으로 또 고백하고 떠나는 오수였습니다.

"사랑했어. 널 옆에 두고 사랑할 자신은 없지만 니가 날 속인거 무죄야. 넌 살기 위한 방법이었고, 난 행복할 때도 있었으니까". 

오빠라고 속인 오수에게 오영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돈이 아니라 오영을 사랑해버린 오수, 그 사랑에 형량을 구형할 수는 없습니다. "널 버린 엄마지만 널 한 번이라도 찾아왔던 걸 기억하기 바래. 그리고 이젠 그만 희주씨에 대한 죄책감에서도 벗어나길 바래, 네 자신을 오래 미워했잖아, 스스로도 지칠만큼".

영을 두고 간 엄마와 오빠는 영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수를 버린 엄마는 그래도 오수가 어떻게 사는지 찾아라도 봤지만, 영의 엄마는 영이가 아픈데도 찾아오지도 않았죠. 물론 아버지와 왕비서때문에 못 온 이유도 있었겠지만, 마음이 더 다쳐있는 영이 오수를 위로합니다. 오수의 자책감까지도 말이죠.  

 

"사랑했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수와 왕비서에게 영이 마지막 한 말입니다. 오수에게 78억을 주고, 왕비서에게는 죄를 묻지않고 내보내는 것이 오영의 용서라고는 보이지 않더군요. 수술을 앞두고 신변정리에 더 가까워보였으니까요. 오수에게 가장 필요한 돈을 주고, 왕비서에게도 그녀가 가진 주식과 횡령한 돈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식으로 두 사람을 내보낸 오영, 그녀가 두 사람을 용서하며 무죄를 내렸지만, 오영은 유죄입니다.

목숨 대신 사랑을 택한 오수, 자신의 인생 대신 영의 손발과 눈이 되어온 왕비서-(오수의 사기의도와 왕비서의 영의 눈에 대한 부분은 두 사람에게 오영의 곁에 머물지 못하게 한 것으로 형벌을 내렸다고 치고)- 오영은 자기 사랑은 방치 내지는 유기를 하려합니다.  

오수와 왕비서를 사랑하면서도 오영은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수가 걸어둔 풍경소리에 벌써부터 오수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보면서도, 왕비서가 잘지낸다는 말에 서운해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오영은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 하죠. 오수와 왕비서의 사랑에는 무죄를 선고했으면서도 오영은 그들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막으려고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오영이야 말로 유죄인 거에요. 이제는 오영이 사랑할 때입니다. 오영이 무죄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왕비서의 사랑을 엄마이고 싶은 그녀의 사랑 자체로 받아들여줘야 하고, 오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닫지말아야 할 오영입니다 

별장에서 잠들어있는 오수의 이마, 코, 입술을 만져보고 눈을 감고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기억하려고 했던 오영, 사기꾼 오수로 떠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영에게 키스를 하고 오영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았던 오수처럼 그녀가 이제는 그녀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외롭고 힘든 오영이었지만, 자기 인생을 걸고 사랑해 준 왕비서, 목숨을 걸고 사랑한 남자가 곁에 있었던 오영, 그런 사랑을 받은 오영이 이제는 사랑을 줘야 할 때가 아닐런지.... 

진정한 용서는 이해가 아니라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을 할 때는 행복합니다. 돈때문에 오빠 행세를 했던 오수였지만, 또 그것때문에 괴로웠지만, 오영을 사랑한 오수는 행복했습니다.  첩질한다며 가족들이 외면했고, 영의 눈을 멀게 방치한 형벌을 매일매일 괴롭게 받으면서도, 영이가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뇌종양을 이기고 살아있는 영을 보는 것이 왕비서는 행복했습니다.  

오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잠시나마 행복했던 영, 오빠가 아니라 돈때문에 온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사랑도 끝내려는 영, 왕비서를 미워하면서도 의지해왔지만 그녀를 사랑할 줄은 몰랐던 영, 영은 그래서 행복하지 못합니다.

수술을 하고 살아나고 시력을 되찾는다고 해도 영은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는 영의 마음은 여전히 겨울일 뿐입니다. 오영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존재이유였고, 또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은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영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영이 행복했으면 좋겠군요.

사랑하는 영을 목숨을 걸고, 혹은 인생을 걸고 사랑했던 오수와 왕비서,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통해 노희경 작가는 말합니다. 사랑하라고, 사랑은 무죄라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유죄라고...

직 오영 그녀가 유죄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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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4 12:11




오수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왕비서와 장변호사가 오수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게 되는 듯한데, 전 개인적으로 장변호사나 왕비서가 오수에게 아직은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싶습니다. 오영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오수이기에 좀 더 오수를 지켜봤으면 싶네요. 

앞으로 오수의 거취문제나 정체가 오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쯤해서 오수의 정체를 오영이 알았으면 싶군요. 오수에게 끌리는 감정이 단순한 오빠에 대한 감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가는 오영의 심리변화도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말이죠. 송혜교의 연기가 좋아서 여자가 되어가는 감정연기도 보고 싶어지는군요.

 

이젠 오수에게도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는 것이 상관없어졌지요. 오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살 수 있는 78억이 아니라, 오영을 살리는 것이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니까, 많이... 

"왜 약을 안먹였냐"고 이유를 물어보는 오영에게 오수가 말하죠.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거나...". 희주의 죽음 이후 오수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에게 여자란 하룻밤 욕정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진소라의 사랑도 집착일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사랑은 의리가 아니야. 니가 나한테 하는 것은 집착. 사랑은 아주 간단해, 상대가 끝났다고 하면 끝나는 것, 싫다는 사람에게 같이 사랑하자고 하는 건 집착. 사랑은 거래가 아니어서 배신이 없어.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거니까 생색도 안통하고, 자랑도 안통해. 우긴다고 집착이 사랑이 되지는 않아".

노희경 작가 특유의 문체가 살아있는 대사였습니다. 간단명료하고 냉정할 정도로 솔직한,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듭니다. 상대가 끝났다고 하면 끝나는 것! 상대는 끝냈는데 인간인지라 무자르듯 끊을 수 없는 감정이기에 집착으로 변하고, 상대도 본인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소라가 영이가 목숨을 걸만큼 좋냐고 묻자 오수가 말하죠. "모든 인간은 딱 한 번 죽는다는 말을 기억하려고 해. 그렇다면 지금이 나쁘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이 대사에서 혼란이 왔지만(조인성의 대사 끊는 지점이 모호해서 이해하는데 애먹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딱 한 번/죽는다는 말을 기억하려고 해"로 대사를 쳤는데, 그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전 "모든 인간은 딱 한 번 죽는다는 말을/기억하려고 해"로 풀었습니다. 그렇죠, 인간에게 죽음은 딱 한 번 뿐이죠.

 

희주의 죽음 이후 사랑따윈 없다고 생각했던 오수의 삭막한 겨울에 분 바람,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닫힌 마음을 사랑으로 연 오수입니다. 그 바람은 시궁창같은 곳에 쳐박혀도, 무철의 칼에 찔려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버둥쳤던 오수를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는 이유같은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오수,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던 오수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죽고 싶을 때는 많았던 오수였지요. 그런데 진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입니다. 죽어도 좋겠다면 지금, 오영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느새 가슴 한가득 꽃으로 피어나 버린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겠다는 오수입니다. 

그런 오수이기에 무철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하지요. 무철의 누나에게 오영을 수술하게 도와달라고 말이죠. "살려주라, 형. 내일도 올게. 모레도 또 올게. 내가 형 손에 죽으면 되잖아. 영이는 살리자, 죄없는 애는 살리자. 희주처럼은 만들지 말자", 무철에게 발로 채이고 주먹으로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오수는 영이만은 살리자고 눈물로 애원합니다.

돌아서서 가는 무철의 작은 흔들림은 그의 마음이 움직였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희주를 짝사랑했던 무철의 사랑도 지금의 오수처럼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던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오수의 겨울에 분 바람이 목숨을 내놓아도 좋을 사랑이었다면, 오영의 겨울에 분 바람은 살고 싶다는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오영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그 삶에 대한 의지가,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절박해서, 오히려 죽고 싶어하는 오영의 진심을 말이죠.

안괜찮아도 된다며, 팬션에서 영이 했던 말로 위로받았던 오수가 영을 위로하지요. "안괜찮아도 되니까 울래?". 영이 그랬던 것처럼 오수가 영을 위로해 주지요. 영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뇌종양이 재발되었다고 막상 의사가 말했다고 하니까 무섭고 두렵고 슬픈 영이었지요. 영의 눈물은 살고 싶은 영의 마음이 흘러내렸던 거였지요. 

오영을 살리기 위해, 살고 싶다는 말을 뱉을 때까지 오수는 오영에게 차갑게 대합니다. "참 재수없다, 너! 내가 너보다 나은게 딱 하나있어. 난 그 어떤 순간에도 살고 싶어한다는 거야".

"넌 살고 싶으면 살아지지만, 난 살고 싶어해도 살 수 없어. 여섯살때부터 준비한 거야. 언젠가 때가 오면 지금처럼 웃으면서 가야지. 구차하게 연연해 말아야지. 너랑 있는 이 순간도 너무 좋고 따뜻해도 연연해 말아야지. 그러니까 날 흔들지마. 기대하게 하지마!".

뇌종양이 재발되었다는 말에- 물론 오영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오영은 담당의사를 찾아가 물어보죠.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는 거냐고 말이죠. 그의 가족이 같은 상황에 처했다 해도 수술을 받게 할 거라고 말했던 의사는 오영의 물음에 답하기를 주저합니다. 수술이 성공해도 또다시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산다는 확신을 해주지 못하지요.

 

한가닥 희망을 찾고 싶었던 오영은 삶의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려 합니다.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오영, 그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살고 싶다는 생각을 여섯살 이후 처음 들게 한 오수에게 자신의 가장 예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왕비서에게 결혼하겠다며 우는 영,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영에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한 왕비서, 두 사람이 21년간을 지내온 세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왕비서에게 영은 삶의 이유였고,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영이 필요로 하는 사람, 그녀를 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그녀에게는 사형선고와도 다름없는 순간일 겁니다. 아직 왕비서가 영의 눈을 제때 치료하지 않은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줌마"하며 영이 고사리같은 손을 내밀었던 그날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영이가 크면 언젠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올것이고, 영의 아버지 회장님이 죽으면 왕비서는 영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어질테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영에게는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왕비서는 그런 영을 보고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명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영을 보란듯이 키우고 싶었습니다. 첩살이한다고 형제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PL그룹의 내연녀라는 딱지는 그녀를 영의 집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했습니다. 영이 정상인처럼 회사일을 보고 PL그룹을 이끌어 나가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었고, 영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녀가 사는 이유였습니다. 

첩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모욕도 감수했던 왕비서였지만, 죽은 회장은 왕비서를 끝내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랑도 하지 않았죠. 생각해보면 왕비서도 불쌍한 여자입니다. 영을 수술시키기 위해,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영을 빰을 때리기 까지 한 왕비서, 영이가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에게 올인한 그녀의 인생, 영이가 없으면 그녀의 삶은 죽음과도 같은 사막이 될 거라는 걸 왕비서는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영이 없이는 못산다고 한박사와 전화통화를 하던 왕비서의 마음은 거짓이 아닌 듯 보이더군요. 왕비서의 영에 대한 사랑은 거짓이 아니지만, 영에게 필요한 사람이 자신뿐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아직 왕비서는 알지못하고 있을 뿐이죠.

영이도 왕비서의 그 마음을 알고 있었지요. 알면서도, 왕비서가 없으면 영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왕비서를 숨막혀 하면서도 서로를 이용하고 의지합니다. 전 이 두사람의 관계에 이상하게도 연민을 느낍니다. 으르렁대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습으로 보여서 말이에요. 

 

왕비서의 손찌검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던 영, 오수의 차가움에 무너지고 말지요. 영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오랜 바람을 말입니다. 여섯살때 뇌종양을 앓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영은 어린 나이에 받고 싶었던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반항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타난 오빠, 영의 언 마음을 녹여주고, 보이지 않는 영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 오빠가 차갑게 영의 손을 뿌리칩니다. 그리고 영이 죽기보다 듣기 싫은 말, 영에게 가장 두려운 말을 뱉지요. "나 이제 떠날려고".

"왜 왔어? 처음부터 이럴려고 왔어?".  

혼자 남겨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영에게 오수가 말하죠.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살고 싶다는 말, 살아야 겠다는 의지".

 

어떻게든 영을 수술시키고 싶은 오수는 영이 수술을 받지않으면 떠나겠다고 이를 악물고 영에게 차갑게 대하지요. 영의 비밀의 방에서 알아버린 혼자 남겨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늘 외로웠던 아이 영을 알고 있기에 말이지요. 그런 오수의 가슴에 오영의 말이 심장을 할큅니다.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난 살 수도 없는데, 니가 보고 싶지 않냐고? 보고 싶어, 니가 오고부터 매일 네가 그리워. 그럼 뭐해? 난 볼 수도 없는데...나도 무서워 죽는게.... 왜 날 이렇게 약하게 만들어 넌! 왜 자꾸 날 살고 싶게 만들어, 넌!!".

 

오영의 차가운 겨울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속에 자라고 있는 뇌종양을 살 수 없을 거라 말합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떠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런데도...그런데도 오빠가 떠나는 것이 더 두려운 오영입니다. 살고 싶다고 말하면 그가, 오빠가 떠나지 않을까요? 진짜 살고 싶습니다. 간절하게...

사랑을 버린 남자에게 사랑의 바람이, 죽고 싶은 여자에게 살고 싶은 마음이 불고 있습니다. 노희경 작가가 그들의 겨울을 어떤 바람으로 따뜻하게 녹일지 궁금해지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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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8 14:36




건달들에게 둘려싸여 봉변을 당하고 있는 오영을 본 오수의 눈이 뒤집혔습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의 안광은 시각장애인을 희롱한 정안인에 대한 분노게이지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다가온 여자, 동생처럼 정말 아껴주고 싶은 영이었기에 더했겠지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준 학생도 있었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고 희죽대며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도 이 사회에는 공존합니다. 다행이면서도 불행스럽게도 시각장애인 영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영이 혼자가 아니고 싶은 그 심정은 간절함을 넘은 절박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믿지못하는 영, 그 아이를 과보호하고 있는 왕비서에 대한 불신은 그녀의 눈에 이상이 생겼을때 생긴 뿌리깊는 불신입니다.

다행히 아버지의 후배이자 영을 누구보다 딸처럼 아껴주는 장변호사(김규철)가 있지만, 24시간 영의 손발과 눈이 돼줄 수는 없겠지요. 

복지관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혼자만의 허락된 시간을 살아왔던 영, 그마저도 영이 한참 커서 성인이 된 후에야 얻은 휴식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이 죽고 싶어하는 이유가 단지 앞이 보이지 않아서, 가족이 없는 외로움때문만은 아니었지요. 그녀의 막대한 재산도 복합적인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에게 돈이 없다면 그녀의 곁에 남아있을 사람도 없었겠지요. 오수가 처음 찾아왔을 때도 돈때문이라고 차갑게 단정지어 버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죠. 21년을 떨어져 지낸 오빠에 대한 애틋함이나 그리움과는 별도로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은 영의 돈때문이었으니까요.

사랑하지도 않는 이명호 본부장과의 결혼은 보이지도 않는 종이에 회장으로서 싸인을 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듯 이본부장과의 결혼도 시키니까, 아버지가 정해줬으니까 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죠. 영에게 사람은 결재서류와도 같았던 게지요. 처음에는 오빠 오수마저도...

 

물론 영에게도 첫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자 소원해졌고, 첫사랑 그 남자아이도, 영도 서로에 대한 오해를 좁히지 못하고 영은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첫사랑 그 아이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에 복지관 봉사활동을 하다 지금의 아내(청각장애인)을 만나 결혼해 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영이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달래주고 오랜 시간이 걸려 마음으로 화해를 하기도 했지요.

 

뒤늦게 찿아온 오빠의 목적이 돈이냐고 끊임없이 의심했던 것은 오영이 처한 상황에서는 당연하겠지요. 오수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은 돈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주었고, 언 마음을 녹인 것은 엄마와 어릴 때 오빠와 함께 했던 추억이었습니다. 오수가 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27살 오영에게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어 주었지요. 왕비서나 이명호 본부장이 주지 않았던 현재라는 세상에서의 행복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영에게는 도와주는 믿을만한 지팡이가 필요했습니다. 21년만에 오빠라고 나타난 오수는 오영의 추억을 끄집어 내주었고, 영은 자신의 지팡이가 돼줄 수 있을 사람이라고 경계를 풀기 시작했지요. 길바닥에 주저앉아 오빠는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말해달라는 영의 오열은 지팡이가 필요한 영의 비명과도 같았습니다. 

영은 정말로 죽고 싶어한 아이였습니다. 그녀의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뇌를 갉아먹는 듯한 고통이 시작되면서 영은 죽음을 선택하려 합니다. 고통도 절망도 괴로움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편하게 해준다는 약을 먹고 싶을 만큼 통증이 심해지지만, 영은 병원만은 거부하죠. 얼마남지 않은 삶, 주사바늘과 투약, 항얌치료로 병원에 갇혀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오빠와 엄마가 떠난 이후,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 영은 희망이라는 것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온 아이였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설레는 연애를 해 볼 희망도,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붉게 물든 단풍이 들고 온세상을 하얀 눈이 덮어도, 영은 체감온도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뿐입니다. 계절은 속절없이 왔다가며 영의 코와 피부를 자극하기도 한다지만, 영은 새로운 관계라는 것을 맺을 수 없는 아이입니다. 복지관을 제외하고는 왕비서가 정해준 사람만이 영이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들마저 왕비서가 건네는 돈이 큰 이유였지만 말이죠. 중태도 미라도...   

그때 영에게 나타난 사람이 오빠 오수였습니다. 왜 오빠라고 철썩같이 믿고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 혈액으로 유전자 검사를 하자는 왕비서에게 말하지요. "추억은 조작할 수 없어요. 오빠는 우리 둘밖에 알 수 없는 추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요. 오빠가 아니라는 근거는 없어요".

 

영은 또 다른 오수와 연락이 된다는 무철의 명함을 들고 진짜 오빠일지도 모를 또다른 오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혼자 집을 나섰지요. 오수에게 화를 내는 오영의 감정을 혼자서 되집어 봤습니다. 그토록 따뜻한 사람이, 엄마와 오빠와 함께 했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보여준 사람이, 영을 편하게 해주는 만 개의 풍경소리를 들려준 사람이, 자기가 없어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언제나 풍경이 흔들릴 거라고 점자 편지를 써주고 영의 팔에 실로 풍경을 연결해 주고 간 사람이,  진짜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희선이 네 오빠라고 나타난 인간이 사기꾼이라고 했던 말과 팬션에서 오수가 또 다른 오수를 사기꾼 쓰레기라고 했던 말들이 하나로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오수는 사기꾼이며 가짜 오빠일 수도 있다는... 오영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오수가 진짜 오빠인지가 아니라, 자기를 속인 사기꾼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미치더군요. 영이 처음으로 믿고 싶어진 사람은 오빠이든 아니든, 지금의 오수 그 사람이 21년만에 처음이었으니까요.

차갑게 굳어버린 영의 얼굴, 오수가 처절하게 자신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그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의 차가운 얼굴, 미소가 걷힌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을 이젠 견디기 힘들어진 오수이니 말이죠. 

얼마나 참기 힘든 고통이었으면 한순간에 편하게 죽게 해준다는 약을 먹으려 했을까... 유언장까지 써주며 자기를 죽여달라고 했는데 오수가 왜 자신의 죽음을 방해하는지, 오영은 그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돈을 노리고 왔다면 돈을 가져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말이죠.

오영은 오수가 자신을 살리고 싶어한다는 것이 밉습니다. 죽게 내버려뒀으면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낯선 남자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그런 모습을 오수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됐을텐데... 오영의 눈물은 오수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 여자로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처럼 여겨졌을 듯 하더군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현실... 

오빠 오수는 좋은 것만, 아름다운 것만, 예쁜 소리만 들려주고 싶어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오영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희롱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오영은요, 오빠지만 오수에게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여자가 되고 있었던 거예요. 이는 이성간의 관계를 떠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자연스러운 변화이기도 하지만 말이지요.

 

장난처럼 공동소유로 하자고 했던 죽음의 약이 동물을 안락사시키는 독약이었음을 알게 된 영, 돈을 노리고 온 사기꾼일지도 모르는 수의 정체, 유산을 주겠다는 유언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기를 죽이지 않으려는 오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영은 혼란스럽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죽여달라고, 죽고 싶다고 노래처럼 했던 영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화기만을 찾아 바닥을 더듬는 그 이율배반적인 절망감을 오수 오빠라는 놈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죽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고자 발버둥치는 앞뒤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오영의 비참한 심정을 오수는 보게 되죠. 죽고 싶어하는 것이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죠.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아서 죽기살기로 살려했던 오수,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은 오영, 동전의 양면처럼 두 모습 다 동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고 살려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이제는 잃고 싶지 않은 오수입니다. 지키고 싶어진 오수입니다. 오수의 눈물은 오영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78억때문에 무철의 손에 죽더라도, 김사장 손에 죽더라도 오영은 살리겠다는...

그가 희주를 보내고 방황했듯이 무철도 밑바닥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사랑을 다시는 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그들의 인생을 방치하고, 망가뜨리고 살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그것이 희주에 대한 죄책감과 그들의 사과방식, 고민방식이기도 했고 말이죠.  

 

오수에게 남자들에게 희롱당하며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고는 "왜 못 죽였어? 난 이렇게 쉬운데... 난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는데 왜 못죽였어 날!!"이라며 우는 오영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전 역설적이게도 자그마한 삶희망을 봤습니다.

독약을 쏟아버리고 빈캡슐을 먹으라고 준 오수의 마음을 읽은 영, 오수가 진정한 사랑에 마음의 눈을 떠가듯 오영에게도 그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오수가 왜 자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할까에 대한 답을 오영은 찾을 수 있을까요? 왜 그 사람을 믿고 싶었었는지에 해답이 있을 듯한데, 상처와 아픔이 유독 많은 오영이기에 오수의 마음을 알아가기엔 오영의 겨울은 조금 더 길어질 듯 합니다.

그래서 전 왕비서와 장변호사가 오영을 도와주었으면 싶네요. 모처럼 문을 연 오영의 마음이 다시 닫혀버리지 않게 말입니다. 때로는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음을 오수의 정체를 통해 봅니다. 오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지금의 오영에게 좋은 일일까 싶어서 말이죠. 오영도 오수의 정체를 거의 확신하는 듯 하지만, 오영 또한 더 모른척 오수를 곁에 두고 싶어할 듯 보이기도 하고 말이죠.  

영과 수의 마음은 겨울이었습니다. 마음을 닫고 살았던 그 시간이 그들에게는 겨울입니다. 오빠와 엄마와 헤어지고, 희주를 보내고 그들은 그들의 겨울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겨울을 깨우는 소리, 그들의 마음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오래도록 꽁꽁 얼어서, 녹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시리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들 마음속 그리움과 외로움이 달려있는 풍경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을 녹이는 소리를, 사랑을 말해주는 소리를, 혼자가 아니라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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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7 12:27




오수에게 살면서 가장 기억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날이 있다면 생일이라는 날입니다. 쓰레기같은 막장 인생이 시작된 그 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죠. 생명의 축복같은 것은 오수에게는 동화에나 나오는 먼 나라 사람 얘기였습니다.

이름조차 받지 못하고 버려진 그에게 생일의 의미는 개떡같은 날일 뿐이었습니다. 빵을 만들어주겠다고 부산을 떨던 영, 그때까지도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죽은 오수의 생일이었음을 말이죠.

화점에서 쓰러진 오영, 한사코 검사를 거부하는 오영에게 화를 내지만 창립파티에 함께 참석해달라고, 도와달라고 내미는 오영의 손을 거절하지 못하는 오수입니다. 도와달라는 말을 이제는 스스럼없이 하는 영, "날 불쌍한 장애인으로만 보는 회사 사람들 앞에 난 혼자가 아니다, 네겐 멋진 오빠까 있다 자랑하고 싶어". 창립파티에 함께 가야 24시간 아픈지 안아픈지 감시할 수 있지 않느냐고 영악을 떠는 오영에게 두손 두발 들어버리는 오수였지요.

 

"감기 몸살만 걸려도 검사하고, 무균실에 보내고, 바늘을 수없이 찌르고... 나도 무서워. 내가 제일 무서운 거는 이 냄새나는 병원에 재미없는 왕비서랑 24시간 갇혀 지내는 거야", 영에게 병원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숨막히게 외로운 곳, 병이 나아도 또 창살없는 감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영에게는 외로움의 연속, 연장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한시적으로 오빠로 영의 곁에 있는 오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영에게는 21년만에 느껴보는 행복입니다. 31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은 병원에 쳐박혀 지내고 싶지 않은 영입니다.

리프트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영을 업고 간 오수,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어있는 절경을 보여주지요. 앞을 보지 못하는 영에게는 소리로 그 숨막히게 아름다운 설경을 느끼게 합니다. 눈이 얼어 부딪히며 내는 소리, 만개의 풍경을 달아놓은 듯 반짝이는 소리를 영도 느낍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설경이 영의 보이지 않는 눈에도 상상으로 전해집니다.

소리와 영상의 미학, 김규태 감독의 디테일에 눈도 호강했지만 마음도 감동받았던 눈이 시리게 예쁜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영에게 들려주는 언 눈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노작가와 김감독이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선물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겨울, 수와 영 두 사람의 언마음처럼 차가운 마음에 이는 눈꽃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는, 그들 차가운 마음에 이는 사랑의 감정을 영상과 소리로 전해준 장면이기도 합니다.

"풍경을 잃어버려도 겨울 바람이 불면 얘들은 언제나 여기서 이렇게 소리를 낼 거야. 니가 지금 이걸 볼 수 있었음 참 좋겠다. 하지만 이것보다 내가 너에게 진짜 보여주고 싶은 건 바로 영이 너야. 니가 그 어떤 것보다 널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넌 아주아주 예쁘고 멋지고...".

오수의 진심이 전달되어 옵니다. 오영의 눈에서 흐르는 한줄기 눈물은 고마움이었습니다. 돌아서서 오수의 볼에 뽀뽀를 해주는 영, "오빠한텐 이렇게 키스하는 게 맞지?".

오수가 오빠라고 찾아왔던 첫날, 지팡이를 휘두르며 "니가 주는 사랑 따위 필요없어. 가져갈 게 있으면 챙겨 꺼져"라고 차갑게 돌아섰던 오영이었죠. 이젠 오수가 주는 사랑이 고맙고 행복하고 설레는 오영입니다. 오수의 소리인양 잠잘때는 오수가 달아준 풍경소리를 들어야 마음이 편해지고, 그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인양 소리마저 향기롭습니다.

***전 오영이 오수가 진짜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오영이 차려준 생일상도 남다르게 다가 오더군요. 물론 진짜 오빠에 대한 것을 알고 싶어할 오영이기는 하지만, 오수에게 들은 또 다른 오수의 사연을 알고 있는 오영이지요. 태어나자 마자 나무밑에 버려진 아이, 그의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태어났음음 오영 혼자라도 축하해주고 싶어한 듯해서 말이죠. 오영을 기쁘게 해주고, 웃게 해주고, 그런 오빠 오수에게 '당신의 인생이 쓰레기는 아니라고, 나를 웃게 해준 것만으로도 내 오빠가 돼준 것으로도 고맙다'는 인사를 그녀가 죽기전에, 오수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어한 듯해서 말이죠.

 

장변호사에게 줄 선물을 사러갔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영이 실은 오수의 생일 선물 자그마한 풍경이 달린 팔찌를 사러갔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수, 영이 준비한 케익과 잔받침에 커피를 흘리고 식어버린 커피를 마주하는 수는 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자는 영을 보며 또다시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수,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애간장 녹이는 수의 감정은 고통스럽기 까지 합니다. 오빠라고 믿고 있는 영이 받을 충격에 간신히 감정을 또 접어보지만, 수는 스스로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돼죠. 영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한 오수였지만, 오수의 닫힌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은 영이었습니다.

버려진 아이, 희주와 자신의 아이도 버리고 돌아섰던 자책감에 아무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그가 사랑을 알아갑니다. 첫사랑을 잃은 오수의 방황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젠장. 하필이면 그 사랑이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려던 영이라니...'.

목적을 이루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던 오수가 영의 곁을 떠나기 힘들 것임을 알아가죠. 영을 향하는 위험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도 말이죠. "멈출 수 있었다면 그 때 멈췄어야 했다. 영이에게 더는 다가가지 말라는, 나의 위험한 놀이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경계경보를 난 그 때 분명 들었다. 자만해선 안됐었다. 내가 사랑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처음으로 이 위험한 놀이에 영이 그 아이보다 내가 더 처절히 다치리란 확신이 들었다".

처음으로 받아본 생일케익과 선물이었습니다. 앞도 보이지 않은 영이 커피를 내리고 서투른 손으로 커피를 따르고,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수입니다. 처음입니다. 수의 진짜 생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태어난 날을 축하해 준 것이 말이죠.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오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축하해주는 영에게 깊이 빠져드는 자신을 봅니다. 

사랑 따위 사치일 뿐이라고, 그 사랑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 하찮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오수가 사랑에 빠져듭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모든 것을 버리고 왔던 희주, 그 아이도 그랬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살리고 싶은 오수입니다. 영이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오수임에도 영이가 행복해 하는 모습에 그도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오수에게는 말 못할 고통이 되어 부메랑처럼 가슴을 할큅니다. 눈치료가 가능하다면 치료를 해주고 싶은 오수입니다. '살고 싶어 하는 남자가 죽고 싶어하는 여자를 만났다', 지하철에서 등을 밀라며 죽고 싶어하는 여자, 혼자 남겨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여자를 살리고 싶어진 오수입니다.

세상에 덩그라니 혼자 남겨진 오수,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누구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았던 오수였습니다. 희주를 보내고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않았던 것은 오수에게 내재된 상처때문이었습니다.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죠. 이젠 이 아이 영을 그렇게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오빠가 아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영이 받을 상처와 충격, 배신감을 오수가 더 감당하기 힘들 듯 합니다. 영이 받을 배신감과 상처를 생각할 때마다 수의 마음이 더 아프고 괴롭습니다. 수가 겪게 될 처절한 고통은 그것을 말함이겠죠. 그리고 더 이상 다가가서는 안되는 마음, 눈덩이 처럼 커져만 가는 영에 대한 사랑이 힘겹기만 합니다. 다가갈 수 없는 사랑, 지켜만 보는 사랑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만 멈추라는 위험신호를 보냈을때 멈춰야 했건만, 기침처럼 감추기 힘든 게 또한 사랑거늘, 이 남자의 힘겨운 사랑을 어떡하나요?

오영, 그 아이가 창립파티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든든한 오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알 것 같은 오수입니다. 오영의 외로움이 오수때문에 쓸려갔다는 것을... 오수 그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내고 아물지 않고 욱신욱신 쓰라리는 상처를 비집고 이미 사랑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검사를 거부하고 통증을 참고 기념사를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영, 식은 땀으로 범벅이고 몸을 가누기도 힘들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영은 압니다, 그 고통이 앞으로 더 자주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괴로울때 먹으면 괴로움도 고통도 절망도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마음이 아주 편해진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오수 방을 뒤져 약을 찾고 먹으려 했을까... 약을 먹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오영인 듯 하지만, 죽고 싶을 만큼 지독한 통증을 겪고 있는 오영, 이 캐릭터가 너무 마음 아픕니다.

죽음과도 같은 외로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감, 왕비서의 인형처럼, 붙박이 가구처럼 갇혀있는 생활은 영에게 죽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수가 말했듯이 그냥 사니까 살고 있는, 하루 하루 마음을 갉아가며 사니까 살고 있었던 오영이었습니다. 외로움에 죽고 싶고, 재발된 뇌종양의 통증으로 차라리 죽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해 답답하고, 오빠 오수가 나타나 잠시 거둬가 준 외로움이 없어진 지금 이순간 떠나고 싶은 오영입니다. 외롭지 않은 행복한 이 순간만 기억하며...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약을 찾았던 오영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그 여린 가슴의 절망과 심적 육체적으로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 짠하고 시립니다.

15년간 겨울이었던 오영, 그녀를 지독하게 외롭게 했던 15년간의 겨울에도 풍경소리처럼 아름다운 바람이 불어줄까요?

 

오수의 이름은 나무 수(樹), 진짜 오빠 오수는 지킬 수(守), 오영의 이름은 꽃부리 영 혹은 꽃영(英, 榮)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오영과 오수가 동명이인이라는 인연으로 속고 속이는 관계로 만나기는 했지만, 꽃을 지키고 꽃을 피우게 하는 나무로 해석하니 이름에도 노희경 작가가 이야기를 숨겨둔 듯 싶습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꽃,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든 풍경소리처럼 말이죠.

 

***

조무철(김태우)이 두달밖에 살지 못하는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과 무철의 누나로 나온 의사 정경순(아마 뇌질환 관련 전문의같습니다)이 오영에게 희망적인 복선을 내비쳐서 뒷 얘기가 추측도 되지만, 무철의 사연이 참 가슴 아프더군요. 깡패가 되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던 팍팍하기만 했던 그의 삶,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남기고 갈 것만 같아서 말이죠.

죽은 희주에 대한 그의 사랑, 무철이 해줄  있는 것은 희주가 사랑했던 오수의 진정한 사랑을 위한 무엇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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