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19 13:00




사람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휴식과 타인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집이란 사생활 보호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혹은 직장이라는 공개적인 장소와 굳이 비교하자면, 타인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 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집'하면 편함, 따뜻함, 그리고 가족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지독하게 가정불화를 겪거나 집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이 편하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이순재옹의 집도 마찬가지이다. 방귀도 마음놓고 뿡뿡 뀔 수 있고, 쇼파에 편하게 누워 TV를 볼 수 있기도 하고,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공중 화장실의 불편함도 없고, 심지어 속옷 차림으로 왔다갔다 해도 경범죄로 처벌할 일도 없는, 사회생활에서의 위계질서나 규칙이 필요에 따라 무시될 수도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순재네 집에 얹혀 사는 세경,신애 자매를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세경, 신애 자매에게 이순재네는 집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보호시설같다는 느낌때문일 게다. 세경에게 있어 순재네 집은 동생과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직장이자 처마 한 귀퉁이에 마련한 둥지 같은 곳이다.  
세경과 신애의 작은 둥지 드레스룸을 보면서 좁은 방 만큼이나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른 무엇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남의 집 눈치살이를 하는 탓이려니 하고만 말았는데, 어느날 그 이유가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편한 심사때문인지 순재네 가족들이 하나같이 미워지기 시작한다. 한지붕 아래 살면서 순재네 가족들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어찌도 그리 무심할 수가 있을까 싶다.

지금도 서울의 동부이촌동에 건축된 지 30년이 넘은 아파트에는 식모방의 흔적이 있다. 집의 구조를 보면 재미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주방옆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창고만한 방이 있다. 당시만 해도 식모를 많이 두고 살던 때여서 아파트를 설계할 때 식모방까지 설계도면에 넣은 모양이다. 그리고 특이한 게 식모방과 연결된 비상계단이 있다는 것이다.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만 해도 식모와 주인이라는 신분은 집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일종의 룰이 있었는데, 예전 식모들은 현관문을 주인과 함께 드나들 수가 없었다. 주방 베란다 옆에 따로 문이 있고, 거기로 비상계단이 이어져 있는데, 그 비상계단으로 식모들은 바깥출입을 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이순재네 집 주방 옆에 세경의 방을 마련한 것도 아마 이런 예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구세대인 나에게는 어려서 집에서 일해 주는 식모를 보기도 했고, 부엌 옆에 마련된 작은 식모방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도 식모살이 하는 세경의 방을 보면 불편하다.
극중에서는 순재네 드레스룸이 공식적인 세경과 신애의 방이다. 세경과 신애가 생활하는 주 공간인 드레스룸을 보면, 행거가 병풍을 치듯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자질한 살림살이들도 보관하는 마치 창고같다. 세경의 방에는 두 사람을 위한 물건이 앉은뱅이 책상과 세경과 신애의 옷가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두사람이 기거하기에도 비좁아 보이는데, 줄줄이 걸려있는 행거의 옷들을 병풍삼아 세경 신애가 잠자는 방은 마치 하룻밤 유숙하고 가는 행랑채 같은 느낌이 든다.
세경의 방이 다른 가족들 방에 비해 초라하고 협소하고, 더군다나 주방 옆에 딸려있다는 것때문에 보기 불편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순재네 식구들의 무심함이 이유지만, 순재네 가족들의 옷들이 한가득 차지하고 있으니, 누울 자리조차 비좁고 불편해서 늘 새우잠을 자는 자매가 안쓰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세경의 사생활이 전혀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재네 집에서 세경의 사생활 공간은 단 한군데도 없다. 남의 집 살이 하면서 호화로운 공주님 방을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일테고, 오갈 데 없는 세경 자매를 거둬 준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경이를 보면 한창 꽃다운 22살의 아가씨인데도 아무도 세경의 사생활을 신경써주지 않는다. 
세경, 신애만을 위한 하늘아래 유일한 공간인데, 이 방마저도 순재네 가족들은 마음놓고 사용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해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현경, 지훈, 준혁, 보석도 수시로 옷을 찾기 위해 들락거린다. 각 방마다 큼직한 옷장들이 있더구만 왜 세경 방에 옷들을 두고 찾으러 오는지, 이런 것은 안살림을 맡고 있는 현경과 가장 순재의 무신경때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세경자매를 집에 들였을 때는 행거라도 치워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이라도 치워주면 너무 고마울 일이고...
설상가상으로 요즘은 보석이 몸이 뻐근할때 마다 세경 방에 허리를 지지겠다고 방을 차지하고 누워있거나, 잠을 자는 모습도 종종 보이니, 아무리 주인과 식모 처지라고 하지만 엄연히 세경의 방인데 배려는 커녕 염치와 눈치도 없어 보인다. 실제 생활을 보면 세경이 하루종일 부엌에만 있을 것도 아니고, 세경만을 위한 휴식공간도 필요할텐데, 세경의 방은 순재네 식구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무단침입을 당하고 있다. 심지어 세경이 자고 있을 때도 들락 거린다. 총각인 지훈이도 새벽에 옷을 찾으러 들락거리니, 나같으면 가위에 눌릴 것 같다. 어린 해리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른들이 옷을 찾으러 세경방에 들락거리는 것은 비매너적인 행동같아 보인다.

또 하나는 앉은뱅이 상에서 숙제하는 신애를 보면 괜히 안쓰러워진다. 굳이 신애와 해리 방은 비교하지 않아도 처지가 하늘과 땅차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다. 힘든 환경에서도 밝고 똑똑한 신애를 보면 늘 대견스럽고 기특한데, 어느 날부터 신애에게 책상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앉은뱅이 상에서도 제 할일 잘하는 신애에게 책상 하나 마련해주는 것이 그리 부담될 일은 아닐 텐데 자식키우는 현경이나 이순재를 보면 참 인정머리 없어 보인다. 
자존심 강하고 자기힘으로 살려고 하는 세경이 공짜로 받으려 들지 않겠지만, 세경도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고, 신애와 자기가 공부할 책상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책상을 들여놓고 싶어도 옷들이 빼곡한 방에 여유공간이 없다. 게다가 세경이 마음대로 물건을 사들일 수도 없는 처지도 못되지 않은가 말이다. 책상없이 방바닥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신애를 보면서도, 순재네 가족 누구도 신애를 위해 책상 들여놓을 공간을 마련할 생각을 안하니 정말 얄밉다.
코끼리까지 등장시킨 현경의 생일 이벤트는 현경에게는 감동이었겠지만, 마냥 웃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돈을 돈답게 쓰지 못하는 순재와 보석의 자기 식구밖에 보지 못하는 좁은 눈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감동과 웃음을 주고자 한 이벤트를 죽자고 까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일 못하는 사람 연장 탓하고 공부 못하는 애들 가방 타령한다는 말이 있지만, 누울 자리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는 신애에게 책상 하나 마련해 주는 것은 순재네에게 그리 부담될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세경이라고 동생 신애에게 침대도 들여주고, 책상도 사주고 싶지 않을까? 세경이라고 자기방을 꾸미고 싶지 않겠는가? 세경 멋도 부리고 싶고, 그 나이에 화장대도 가지고 싶을텐데, 자기 집도 아니고 더구나 순재네 드레스룸에 얹혀 사는 처지이니, 주인 식구들 옷을 옮겨달라 할 수도 없을 테고, 마음대로 가구를 들여놓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번씩 세경 방을 들락거리면서 사방이 행거에 둘러싸인 비좁은 방과 상에 앉아 공부하는 신애를 보며 순재네 어른들은 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세경의 방을 세경 자매가 잠만 자는 곳쯤으로 여기는 순재네 가족의 무심함이 이제는 미워지려고 한다. 집없는 세경 자매에게 온전히 그들만의 위한 방 하나 마련해 주는 것이 세경 자매의 처지에 그리 사치스러운 일은 아닐텐데, 순재네 가족들 중 누구라도 세경의 방에 대해 한번쯤 관심을 가졌으면 싶다. 아무리 남의 집 살이를 하는 식모라 할지라도 세경이의 사생활만큼은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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