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20 08:01




선덕여왕 대미를 장식하게 될 비담의 난은 미실의 죽음 이후 아마도 최고의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회 폭풍간지남으로 돌아 온 비담 김남길의 번뜩이는 안광은 되돌릴 수 없는 그의 운명을 예고했다. 비담을 분노케 한 것은 덕만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오해때문이 아닐런지 모른다. 비담은 덕만이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더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을 것이다.
무엇이 비담을 미치게 했는가? 혹자는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혹자는 오해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자기연민의 지독한 상처가 곪아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비담은 덕만처럼 자기 운명을 만들어 갔다기 보다는 자신을 만들어 온 악연들에 의해 잉태된 비운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비담을 파멸로 이끈 악연의 시작은 물론 미실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비담을 절망을 향해 칼을 빼들게 만든 드라마 속 인물들은 누구일까?

어머니, 왜 저를 낳고 버리셨습니까?
비담의 파멸, 그 시작점은 당연히 그의 생물학적인 어머니 미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황후가 되고자 진지제와 정치적 야합으로 비담(형종)을 낳았으나 미실은 꿈을 이루지 못했고, 진지제의 폐위와 함께 비담을 버려 버렸다. 세상에 어머니라는 이름처럼 편하고 따뜻한 것이 또 있을까? 젖을 물려 주며 그윽히 내려다 보는 그 따스한 눈을 보며 방긋방긋 웃어 보이기도 전에 어머니라는 여인은 비담을 외로움 속에 던져 버렸다. 모성보다는 야욕이 앞섰던 비정한 어머니 미실에게 버림 받는 순간 비담의 자기연민에 대한 상처가 시작되었고, 비극이 잉태되었다 할 수 있으니, 생물학적 어머니 미실이야 말로 비담을 불행으로 이끈 최초의 가해자가 아닐까.

아버지를 빼앗아 버린 마을사람들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이 책의 주인은 왕보다도 큰 천년의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야. 이 책은 너의 것이야. 그러니 비담아, 배우기를 열심히 하고 이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라고. 출타한 스승님은 책보따리를 잘 가지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가난에 찌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어린 비담이 보물처럼 안고 있던 보따리를 빼앗아 가버렸다. 어린 고사리 손으로 어른들의 뭇매질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비담은 책을 되찾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있던 동굴로 찾아가 독초를 먹여 몰살시켜 버린다. 스승님이 잘 간수하라는 책을 찾아 오기 위해...
동굴에 있던 사람들을 다 죽여버린 비담의 잔인한 성정에 문노의 비담에 대한 애정은 싸늘히 식어버리고, 칭찬받고 싶었던 아이, 인정받고 싶었던 아이, 정에 굶주렸던 어린 비담의 고사리 손을 밀어내고 말았다.
세상의 유일한 보호자, 누구에게 보다도 인정받고 싶었고, 하늘만큼 높고 바다처럼 넓었던 스승 문노는 비담에게는 아버지였고 닮고 싶은 태산이었다. 어둠이 깔린 저녁, 배운 글을 스승에게 자랑하면 스승님은 비담을 대견해 했고, 큰 뜻을 품고 학문을 더 열심히 하여 큰 인물이 되라고 말했다. 스승의 창찬 한마디에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고 들떴었던가?
그런 아버지와 같았던 스승을 마을 사람들은 빼앗아 버렸다. 어린 비담에게서 책보따리를 빼앗아 간 마을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삼한지세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비담이 독을 풀어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없었더라면 비담의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악연이 없었다면 문노가 어린 비담에게 마음을 거두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스승님, 왜 그때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스승 문노는 어린 비담의 총명함을 눈여겨 보았다. 미실과 진지제의 피가 흐르는 비담을 거두면서 문노는 비담을 큰 인물로 키우고자 했다. 문노가 읽은 천기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고, 천의가 정한 개양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신국은 미실의 시대임을 알앗기에, 은둔하여 산천을 떠돌며 때를 미래를 준비한다. 신국의 대업을 이룰 삼한지세를 완성하는 것이 그가 받은 하늘의 소명이었으리라.
누구보다 총명했던 아이 비담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다. 그런데 삼한지세를 되찾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다고 천진난만하게 자랑하는 어린 비담에게서 그 어미의 잔인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고야 만다. 그리고 차마 비담을 바라보지 못한다. 무서웠던 것이다. 이후 문노는 비담에게 한번도 따뜻한 눈길도 마음도 주지 않았다. 호되게 야단치고 호통치는 것만이 비담을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독이 차오르기 전에 어린 싹을 잘라버려야 하듯이 말이다.
그때 문노는 비담에게 가르쳐야 했었다. 삼한지세 그 따위 종이쪼가리 묶음 보다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고, 천년의 이름을 가진 자는 사람을 버리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자, 사람을 살리는 자라는 것을 말이다. 비담이 칼자루 없는 칼을 휘두를 때 문노는 가르쳤어야 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죽어가면서 뒤늦게 비담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있음을 확인하고 가서 그나마 편하게 눈은 감고 갔지만, 비담을 좀더 일찍 사랑으로 품어주고, 가르쳐 주었다면 비담이 일찍 깨우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천년의 이름이 야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꿈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비담의 피에 흐르는 미실의 잔인함을 보고 비담을 포기하고 만 문노는 비담의 트라우마를 만들고 비담을 가장 불행하게 만든 정신적 가해자라고 할 수 있겠다.

덕만,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
처음 덕만을 만났을 때부터 비담의 운명은 화살보다 빠르게 비극을 향해 내달려 버렸는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그녀의 마음 속에는 다른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덕만과 유신의 엇갈린 사랑을 지켜봐야했고, 날개쭉지 찢어진 여린 새의 파닥거림도 지켜주고자 했다. 그 상처가 자신의 것과 너무도 닮았기에 처음으로 보듬어 주고 싶었던 여인은 왕이 되고자 했고, 당당하게 맞서 싸워 여왕의 자리에 앉았다.
여왕이라는 자리는 한 남자의 순애보도 계산해야 하는 고독하고 무거운 자리였다. 그 고독을 함께 나누려고 했던 연모마저도 세상은 허락하지 않았고, 홀로 가라고 한다. 촌장의 목을 치고 돌아 오던 날, 가마를 따르며 유신이 말했다. 군주의 길은 홀로 가야 하는 길이라고...
덕만이 유신보다 비담을 먼저 마음에 담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덕만은 처음에는 유신랑때문에 비담을 보지 못했다. 힘들 때마다 늘 곁에 있어 주었고, 때로는 친구였고, 때로는 유일하게 투정을 부려보기도 했는데, 어느 날 슬픈 눈동자가 덕만 가슴에 꽂혀 들었다. 오랜 시간 마치 공기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비담, 그의 사랑을 너무 늦게 알았던 것이 죄였을까?

널 죽이지 않은 것이 최대의 실수야, 염종!
스승 문노를 암살한 염종은 일찍 도려내지 못한 치명적인 독을 가진 종기였다. 염종은 철저한 장사치였다. 염종에게 있어 비담은 충성하는 주인이 아니라 철저히 이용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죽일 수 있었음에도 비담은 왜 그를 살려두었을까? 얼굴에 남긴 자상만으로 굴복시킬 수 없었던 비열한 장사꾼 염종은 비담의 최대 실수였고, 결과적으로 비담의 칼을 미치게 만들었다. 비담은 스승 문노를 죽인 염종의 얼굴에 자상이 아니라 목을 쳤어야 했었다.

비운의 햄릿 왕자, 비담
비담은 엄연히 말하자면 진지제의 씨, 신국의 한 왕자이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한번도 왕자로 살아보지 못한 비담은 "사느냐 죽느냐"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해 왔던 인물일 것이다. 선과 악의 이중성이 비담의 모습이었듯이, 삶과 죽음 역시 같은 무게였으리라. 차갑게 변해 버린 스승 문노의 눈빛은 끊임없이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게 했다. 버림받는 게 두려워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고 믿었을 뿐이었다. 그런 비담을 처음으로 봐 주고 믿어주었던 사람이 덕만이었다. 왕보다도 천년의 꿈보다도 컸던 덕만은 삶의 의미이자 꿈이었다.  
비담이 덕만을 사랑하게 된 것은 덕만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자기연민의 상처를 구원해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문노로부터 받았던 그 최초의 상처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믿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푸른 꿈이 또 다시 그를 배신하고 버리려 한단다. 태산이었던 스승 문노보다 컸던 비담의 하늘은 그렇게 오해와 음모 속에서 무너지고, 아물지 못한 비담의 상처는 절망이라는 좌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자기연민을 극복하지 못하고 속에서 곪고 있었던 상처는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비담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상처는 버림받는 것이었다. 어머니로 부터 버려지고, 스승 문노에게 버림받고, 이제는 전부라고 믿었던 사랑하는 사람이 버리려고 한다. 결국 극복하지 못한 상처의 기억때문에 흔들리고 만 비담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겠다. 조각조각 파편처럼 흩날려 버릴지라도 차라리 부숴지고 싶은 상처받은 영혼, 절망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고 만 비담은 여린 자기연민의 슬픈 햄릿 왕자와 너무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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