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김남길이 보여주는 심건욱의 감정선을 정확히 읽어내기란 힘이 듭니다. 그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정도로 심건욱이라는 인물의 감정선이 수많은 퍼즐조각으로 나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헛갈릴 정도로 복잡한 캐릭터를 김남길은 한 파레트 안에서 보여줍니다.
모네의 순수한 사랑 앞에서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심건욱이 되고, 태라에게는 지능적인 유혹으로, 어설픈 작업녀 문재인에게는 동네 꽃거지 심건욱의 모습을 알뜰살뜰하게 보여줍니다. 츄리닝에 쮸쮸바 빠는 심건욱은 만화방에 가는 동네 백수처럼 찌질한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기도 합니다. 태라에게 향하는 눈빛은 도도한 여자를 유혹하는 강렬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를 심건욱의 비밀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그가 목표로 한 복수도 한걸음 더 다가서게 하는 독특한 연출방식은, 미스테리같으면서도 심리극의 치밀함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 개의 이름이 있다. 부모님이 불러 주신 이름 최태성, 해신그룹이 강행한 이름 홍태성,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선택한 이름 심건욱... 나도 가끔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한밤중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이름이 세개가 있다는 나레이션은 심건욱이라는 남자의 정체성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심건욱이라는 남자 안에 함께 살고 있는 세 사람은 심건욱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심건욱뿐만이 아니라 시청자도 그의 진심과 거짓을 파헤쳐야 합니다. 또한 그가 선택하고 싶은 진짜 이름까지도 드라마를 통해 알아가야 합니다. 그가 비밀의 방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포스트잇 메모장들처럼, 지금부터 우리는 이 심건욱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메모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심건욱에 대한 정보는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지름길 찾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심건욱이 펼치는 심리게임은 화면으로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드라마 장치 중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보는 것이 심건욱의 집이에요. 심건욱의 집은 두개의 방이 있습니다. 회전문 안에 있는 그의 비밀의 방과 비밀의 방과 연결된 다른 공간이 그것이죠. 마치 심건욱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듯 회전문을 사이에 두고 한 공간에 배치된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회전문은 심건욱의 심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보여지고요.
스무살 모네의 순수를 자극하다
김남길의 강렬한 눈빛은 첫회부터 저를 사로잡고 그 속에 풍덩 빠져들게 했는데, 시청자인 저보다는 드라마 속 세여자가 심하게 빠져들고 있네요. 심건욱의 완벽한 1인 3역은 세여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에서 그 특별한 매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살 순수한 모네에게는 터프함과 섬세함으로, 그 나이에 한번쯤 꿈꿀 수 있는 이상형으로서의 '오빠'로 접근하지요. 모네의 전화도 일부러 받지 않으면서 모네를 애타게 하다가, 뜬금없이 캠퍼스에 나타나 하모니카를 불어주고, 모네의 때묻지 않은 순수를 건드려 줍니다.
"난 부잣집 아가씨의 장난감이 아니야. 넌 당당하고 거침없을 때가 제일 예뻐. 나 때문에 불안해 하고 숨기려고 애쓰고, 힘들어 하지마. 난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마"라며, 모네의 순수를 자극하지요. 난 네가 부잣집 딸이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난 그렇게 비굴스런 사람은 아니라고... 나 때문에 힘들어 하지 마라. 내가 널 잊으면 되니까... 스무살 모네에게 이 터프하면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남자는 바로 하트뿅뿅입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가버리는 심건욱의 뒷모습을 보며 모네의 마음은 이 남자의 뒤를 벌써 따라가 버립니다.
위험한 덫, 태라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다
심건욱의 또다른 사랑의 기술은 홍태라(오연수)에게 치는 덫이에요. 태라에게 심건욱은 모네와는 달리 도발적이고, 공격적으로 접근합니다. 태라가 누르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 열정을 건드려 주는 것이지요. 모네에게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게 하면서, 태라에게는 일탈에 대한 뜨거운 열병을 앓게 합니다.
모네때문에 건욱과 만나기로 한 태라는 건욱이 들어서는 모습에서부터 그에게서 눈을 떼지를 못합니다. 자석처럼 태라의 눈을 이끄는 남자, "우리 모네랑 어쩔 작정이세요?"라는 질문에 건욱은 밑도 끝도 없이 "첫사랑 해보셨어요?" 라고 되받아 줄 뿐입니다. "첫사랑을 해봤다면... 그땐 상대가 누구든 중요하지 않죠. 그 감정에 몰입돼 버리니까, 열병처럼 들끓으니까..."
태라가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는지 아닌지는 태라의 입을 통해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랑없는 결혼을 했다는 것만이 유추될 뿐이에요. 태라가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 혹은 열병같은 사랑의 경험이 없었던 여자라면, 건욱의 말은 오랜시간 잠자고 있던 태라의 원초적 감정을 뒤흔듭니다. 이성을 잃고 싶지 않는 태라는 끝까지 건욱을 만나러 온 것이 모네때문임을 강조하며 버텨보려 합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다소 속물적인 질문을 하지요. "원하는 것 있으면 내 방식대로 얻을 거예요.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요. 그게 당신이라도..."
심건욱이 모네에게는 순수성을 자극한다면, 태라에게는 그녀가 억누르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합니다. 홍태라같은 여자는 본능적인 사랑마저도 사회적 위신과 체면으로 억누르는 인물이에요. 태라가 해신그룹의 장녀라는 설정과도 맞아 떨어지는데, 태라는 어려서부터 집안과 사회적 체면에 대한 교육 속에 홍태라는 어떤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인물로 자랐을 겁니다. 사랑도 허락되어야 했었을 것이고, 결혼도 집안끼리 정략적으로 이루어진 케이스였을 겁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같은 수준의 사람끼리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것이 강요된 결과였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 박재훈 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불편한 태라의 표정은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없어보이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녀와 박검사를 이어주는 것은 딸 소담이 뿐이고, 그녀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이유가 소담이라는 듯 태라는 소담이에게 올인하는 모습입니다. 깨고 싶지 않은 결혼의 이유가 딸인 여자지요.
1인3역 김남길의 심건욱, 치밀함이 돋보이는 완벽한 캐릭터
저는 태라와 건욱의 관계가 가장 흥미로운데요, 홍태라 역의 오연수의 절제된 카리스마와 눈빛연기가 참 매력적입니다. 드라마 나쁜남자에서 김남길과 함께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배우가 홍태라 역의 오연수입니다. 가늘게 떨리는 눈, 불안과 초조, 도도와 오만, 냉정과 열정 사이를 짧은 순간순간 교차시킬 수 있는 배우가 흔하지 않은데, 오연수가 그런 눈빛을 가졌더군요.
감정을 읽히지 않으려는 듯 경계하는 눈빛, 누군가 그녀의 눈빛을 읽으려 하면 그 자리에서 묵사발 당할 것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가 살아있는 눈빛입니다. 감춰진 욕정이 꿈틀대는 듯한 관능미까지 오연수의 도발적이면서도 방어적인 눈빛에 숨어있는 것 같더라고요. 오연수와 김남길이 함께 나오는 장면은 두 사람의 불꽃같은 눈빛대결에 팽팽한 긴장감까지 도는데요, 마치 호랑이와 사자의 기싸움을 보는 듯합니다.
나쁜남자에는 세 명의 남자 주인공이 있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김남길은 심건욱의 비밀스런 캐릭터를 완벽하게 하나로 보여주며, 깊은 고독이 묻어나는 표정만으로도 심건욱이라는 남자의 마성에 빨려 들어가게 합니다. 김남길은 세 여자를 대하는 표정도 각기 다르게 표현하지만, 목소리까지도 색깔을 조절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심건욱이 모네, 문재인, 그리고 홍태라와 대화하는 대사톤은 미묘하게 상대방의 캐릭터에 부합하는 색깔로 조절까지 합니다. 모네에게는 따뜻하게, 문재인에게는 툭툭 던지듯이, 그리고 홍태라에게는 끌어 당기듯이 말이지요. 그런 다양한 변신을 한 작품에서 섬세하게 표현하는 김남길은 팔색조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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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2010.06.06 03:27
저도 김남길씨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답니다.
얼굴만 잘 생긴게 아니라 뛰어난 연기실력에, 특유의 분위기까지...
위에 이미 쓰여진 대로 배우로서 최상의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이 김남길인듯 하네요.
그리고 김남길씨는... 비담 때도 그렇더니 상당히 복잡한 캐릭터를 주로 맡는 듯 하네요.
어려운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내시니,
보는 시청자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
신뢰감 가는 배우를 알게 되어서 기쁘네요. -
나그네 2010.06.06 05:36
1인 3역 아니라 5역 그 이상일 것 같던데요
이제 선영, 태성, 홍회장 그외 더 많은 인물들이 나오면
어떤 역을 또 보여줄지 정말 기대됩니다.
캐릭터가 굉장히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에요.
이 드라마가 호평을 받는다면 그 공은 90%가 김남길씨 공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선덕여왕은 50회까지만 봤어요.
비담연기는 잘했지만 제가 미실을 더 좋아해서요.
나쁜남자에서 김남길씨 내공이 제대로 터지네요
비담캐릭터는 건욱캐릭터보다 연기하기 훨 쉬웠을 듯 합니다.
건욱은 정말 디테일하고 깊은 표정연기, 더 다양한 다중성캐릭터연기가 필요한 캐릭터니까요.... -
남자사람 2010.06.06 21:16
요즘 미치겠더군요 전 남자사람인데 김남길씨에게 눈이 갑니다 농담입니다 김남길씨의 연기에 매회 감탄하며 드라마 보고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이런 연기잘하는 배우가 또 발견되면 좋겠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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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글입니다 2010.06.08 08:44
나쁜남자로 인해 님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공감이 가면서도 때론 날카로워 상당히 마음에 드는 리뷰네요. 선덕때 비담을 보고 저 역이상으로 복잡다단한 역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심건욱이라는 캐릭터는 정말 더한듯 하더라구요. 선과악의 공존은 같다지만 감정폭발이 많은 비담에 비해 건욱은 상당한 절제와 더불어 숨어있는 감정선이 많아 자칫하면 공감가기어려운 역이라 소화하기정말로 어려운 캐릭인듯... 그걸 완벽히 빙의한듯 소화해서 연기하는 김남길을 보면... 탄성밖에 나오지가 않더라구요... 이 건욱이라는 배역... 김남길이 아니면 누가 할수 있을지... 나남감독님, 김남길없으면 어떻게 건욱이란 캐릭터를 살리셨을지 상상이 안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