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31 14:13




 인터넷에 유진 박의 기사제목을 보고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허둥지둥 안경을 찾아쓰고 기사를 읽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매어서 모니터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가며 관련기사를 더 찾으니 올라오는 기사들은 더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이 처참한 노예생활에 한마디로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네티즌들은 천재를 잃은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악랄한 소속사에 분노했고 나역시 충격으로 멍해져 버렸다.

1998년 그가 보장된 외국 무대를 버리고 단지 한국인으로 한국이 좋아서 왔다는 말에 우리는 천재의 귀향에 환호했고 신들린 듯한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의 연주 아리랑은 그의 고국에 대한 향수였고, 사랑이었고, 앞으로 그가 보여줄 새로운 음악 세계로의 첫발이었다. 당시 매스컴은 그의 화려한 이력과 천재적인 연주를 소개하면서 앞다투어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만남이라며 한국 음악의 미래를 주도해 갈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울릉도 트위스트는 쇼킹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흥쾌했고 관객들과 시청자들에게 함박웃음을 주었던지..
그랬던 그가 여관에 감금되어 노예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니..정말 말이 안 나온다.

한국이 자랑하는 천재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 나는 운좋게도 그의 연주를 라이브로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의 몰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까이서 그를 보았고, 그의 신들린 듯한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그저 가까이에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한사람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감사했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라이브로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레스토랑 겸 카페가 있었다. 신촌과 가까운 곳에 살았던 이유로 유진박이 연주하는 곳에서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몇번을 갔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보다는 한국말은 잘 했지만, 여전히 순수했고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바이올린과 하나가 되어 있는 그를 보며 그의 연주를 라이브로 들었다는 하나로 가슴이 뿌듯하곤 했었다. 한국에 온지 몇년 흐른 후였지만 그때 나는 한가지 단순한 생각만으로 그를 좋아하고 응원했다. 클래식과 대중과의 만남,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가 아닌 나와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다는 그 점 하나였다.

이화여대 후문 그가 연주하던 카페 건물 벽에는 꽤 오랫동안 그의 이름과 연주시간이 프린트된 빛 바랜 플랜카드가 걸려있었고, 언제라도 시간이 되면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서울에 한 곳쯤은 있다는 생각에 줄을 서서 그의 연주를 들으러 가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나만의 편리한 계산으로 좋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나와, 대중에게서 점차 멀어져 갔다.
천재라는 희소성이 대중화되면서 희소성의 가치마저 감퇴해 버린 것이었다. 천재의 귀향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를 매스컴도 대중도 점차 잊어가고 있던 사이 유진박이라는 한국이 낳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는 나쁜 돈벌레 악덕 소속사 대표에게 착취당하면서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얄팍한 상술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아니 이해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 천재를 거리악사보다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그의 삶과 함께 송두리째 유린 당해 버린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이다. 눈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을 순진하고 순수했던 유진박은 알지 못했고, 그들의 생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우리 앞에 우리를 찾아 온 천재를 방치해 버렸다. 나를 포함해서...그리고 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글을 쓰면서. 유진박을 그렇게 만든 나쁜 소속사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지구력 없이 쉽게 잊어버린 내 무관심을 욕하면서. 그리고 고국에서 철저히 기만 당하고 버려진 유진 박, 유린 당한 그의 인권과 음악성, 무참히 짓밟혀버린 10년이 너무 가여워서, 그리고 너무 미안해서 자꾸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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