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훈이 검찰시민위원회에서 한태주의 사인을 안티몬 중독이 아닌 급성내인사이며, 사망의 종류를 자연사로 규정하며 시청자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지만, 저는 드라마가 끝나고 소리없는 살인범 안티몬을 드라마로 끌어낸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드라마에 중독된다는 것은 약물중독보다 헤어나기 어렵게 합니다. 드라마 싸인에 중독되어 한시간을 몰입하고 난 후에 느끼는 생각이에요. 약물에 중독된 경우가 없으니, 제가 좋아하는 커피중독으로 단어를 바꿔야 겠네요. 드라마 싸인을 보며 느끼는 것처럼, 단어 한마디로도 사건을 정반대의 결과로 이끌기도 하기에, 신중해서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싸인 12회에서 윤지훈 선생이 검찰시민위원회에 나와 증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너무나 촘촘하게 엮여있는 사회부조리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할 정도로 드라마 속에 암시된 꼬집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故 김성재의 의문사부터 연쇄살인범, 미군총기사건, 재벌의 불법증여까지 굵직한 이슈들을 다른 시각으로 파헤치며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이 드라마는, 단순히 재미와 흥미, 박신양과 전광렬이라는 배우의 연기력 이상의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재벌의 불법증여에 대한 문제를 안티몬이라는 독극물 살해로 접근했지만, 정말 얘기하고 싶은 것은 줄줄이 죽어나간 한영그룹 간부진들의 의문사가 아니었습니다. 소리없는 범인 안티몬이라는 중금속에 관한 문제와 재벌의 변칙 자금운영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정병도원장이 20년전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들의 죽음을 조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윤지훈은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지요. 20년전 아버지의 동료였던 여직원 박희정의 사체를 본 윤지훈은 독극물에 의한 타살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안티몬이라는 독극물을 찾아내게 됩니다. 이명한 역시도 20년전의 사건을 알고 있었고, 그 댓가로 정병도 원장이 거래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이 과정에서 미심쩍은 부분은 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이명한이 다섯명의 대기업 의문사자들을 죽음을 조사했느냐, 윤지훈 아버지의 시신이 오기전 피해자들의 부검을 통해 안티몬 독극물을 이명한도 알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정병도 원장이 한영그룹 전 회장으로부터 사인을 조작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댓가가 오늘의 국과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부차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부검결과가 조작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던 스승 정병도에 대한 충격이 더 컸지요.
스승님의 명예와 국과수의 신뢰, 하지만 윤지훈이 택한 것은 진실이었습니다. 윤지훈의 대답은 드라마 싸인에 흐르는 핵심이며 명언이었습니다. "정병도 원장의 신뢰와 명예, 국과수의 신뢰와 명예도 진실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보다 중요한 명예는 없습니다. 전 모든 걸 밝히겠습니다". 윤지훈의 굽히지 않는 소신에 박수를 보냈고, 이명한의 그 위기감에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는 장면이습니다.
검찰시민위원회의 심문이 열리는 날, 윤지훈에게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지요. 죽은 정병도 원장의 편지였습니다.
"20년전 널 처음 만났던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날이었고, 가장 악몽같은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부검을 조작한 날이었다. 치졸한 변명이지만 난 국과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너와 함께 보낸 20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런 못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내 명예를 천금처럼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단 한번의 실수로 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걸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내 비밀을 묻을 수 있는, 그리고 너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해해다오. 미안하다. 그리고 한없이 사랑한다"
검찰시민위원회의 판결여부로 검찰에 기소한다는 방침에 피고석에 앉은 정차영, 김정태의 연기는 미친존재감을 뿜으며 드라마의 긴장감을 고조시켰지요. 그 뻔뻔함과 두들겨 패주고 싶을 정도로 능글스러운 잔인성이 김정태의 표정에 독사처럼 살아 움직이더군요. 김길태를 부검한 고다경이 안티몬에 대한 중독사였음을 진술하고, 뒤이어 윤지훈이 시민법정에 모습을 드러냈지요. 윤지훈의 증언은 법정에 찬물을 끼얹으며, 충격에 빠지게 해버렸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이명한 원장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반전을 위한 윤지훈의 증언, 그는 진실을 놓지 않을 것이다
저도 한동안 윤지훈의 증언에 멍하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소신법의관 양심법의관 윤지훈이, 스승의 명예를 위해 거짓 증언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한태주의 시신에서 안티몬이 검출됐습니다. 그러나 죽은 한태주에게서 검출된 안티몬은 치사량에 이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증언을 하는 윤지훈의 눈은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봤던 소신과 패기에 찬 모습이 아니라, 버벅대고 있었고,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아니었지요.
윤지훈이 스승 정병도의 명예를 지키고자 굴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윤지훈이 준비하는 반전은 따로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과수의 명예와 스승의 명예 모두를 지키고, 진실까지 규명할 수 있는 카드를 윤지훈은 복안으로 마련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가와 감독의 거시적인 사회적 시각이 보였습니다. 윤지훈의 증언에서 놓쳐서는 안될 핵심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치사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아직 국내에서는 안티몬에 의한 중독사 케이스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병도 원장과 국과수의 명예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말이 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치사량을 모른다는 것이죠. 그리고 안티몬이라는 중금속이 인체내에서 어떤 증상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사례도 없었다는 겁니다. 20년전의 정병도 원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의 열악한 시스템으로는 검출조차 불가능했을 지도 모를 일이였죠. 안티몬이 추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치사량의 기준에 대한 연구가 없었기에 정병도 원장이 안티몬에 의한 중독사라고 판명할 수도 없을 상황이기도 했고요. 당시 국과수의 시스템은 타살임을 밝힐 수 있을 만한 설비도, 인원도 없었지요. 물론 사인조작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병도가 조작한 것은 타살이 아닌 의문사라는 점이었습니다.
안티몬은 정차영이 선대회장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고 했지요. 안티몬 가루가 정차영의 방에서 압수되는 장면도 나왔고요. 안티몬이라는 것이 왜 한영그룹 회장 손에 있었을까요? 그리고 20년전 죽은 다섯명의 한영그룹 사람들은 일반부서가 아닌 연구팀 소속이었습니다. 이번에 발생한 다섯명의 희생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안티몬은 통신장비, 반도체, 에나멜, 고무경화제, 유리, 패트병, 플라스틱제조 등에 사용되는 중금속이라고 합니다. 원소기호나 복잡한 화학성분들은 이해하기 귀찮아서 패스했습니다. 제가 눈여겨 본 것은 반도체, 플라스틱, 페인트등 우리 생활에 밀접한 중금속이라는 부분이었습니다. 20년전에 죽은 희생자 박희정의 사체가 부패없이 보존되고 있었다는 것은 안티몬 성분이 체내에 쌓여있을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지도 보여주는 예입니다.
과일쥬스 패트병 음료에서 안티몬 독성성분이 검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던 적이 있었죠. 장난감에서도 뇌를 손상시키는 안티몬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뉴스도 생각납니다. 선대 회장이 안티몬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요? 보아하니 그 집안이 깡패집단같아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튼 불법증여를 알게 된 직원들이 한영그룹의 연구실 소속이었다는 것을 유추해서 보면, 한영그룹의 어떤 제품을 만드는 것에 안티몬이 사용되었고, 연구실에서는 안티몬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연구를 했고 보고를 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안티몬은 한영그룹 연구실에서 나온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선대회장이 자신의 불법주식증여를 문제삼는 직원들을 살해했고, 아들 정차영에게도 무슨 좋은 가문의 비법이라고, 전수를 했던 것입니다.
윤지훈이 이런 극악무도한 놈을 놓아줄까요? 자신의 눈앞에서 생체실험을 했다는 정신병자같은 소리까지 한 놈인데다, 다섯번째 희생자 배성진의 죽음을 눈앞에서 봤는데 말입니다. 20년전에 딸이 무슨 이유로 왜 죽었는지조차 알지못한 아버지의 한맺힌 눈빛을 봤던 윤지훈인데 말입니다.
정차영에게 안티몬을 준 사람은 누구?
윤지훈이 가진 반전의 카드는 다섯번째 희생자 배성진의 사체입니다. 배성진의 경우는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안티몬을 다량 먹여 독살했지요. 정차영이 자신의 방에서 나가는 배성진을 보며, 죽음의 카운트다운까지 했었으니 말이죠. 그리고 공통점들을 들어 재수사를 요구하겠지요. 산악회 회원중 남은 한명 이철원도 카드입니다. 정차영이 이철원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기에, 이철원을 이용해서 결정적 증거를 잡을 수도 있고요. 현장에서 잡는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정차영이 무죄로 방면되는 꼴은 저는 죽어도 못보겠습니다.ㅜㅜ
정병도 원장의 사인조작부분은 당시 안티몬이 국내에 알려진 독극물이 아니었다는 점, 사인의 케이스로 한번도 없었다는 점을 들어 정병도 원장의 명예까지 실추시키지는 않을 듯합니다. 사실이 그랬고요. 20년전 국과수의 실험장비와 시스템으로서는 안티몬 성분에 대한 치사량과 사인까지 밝힐 수 없는 노후한 설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정병도 원장이 밝혀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정병도 원장의 명예도 지켜줄 수 있고, 국과수의 신뢰도 무너지는 정도까지는 아니죠. 오히려 국과수의 첨단설비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결론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 강한 반전까지 들어있는 것이지요. 500억 지원이 아니라 더 큰 금액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명분까지 얻을 수 있는 셈입니다. 부족한 인력과 시스템으로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죠. 권력으로 국과수를 지키려고 하는 이명한과 진실로 국과수를 지키려고 하는 윤지훈, 싸움 방식의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아닌 진실이 이긴다는 것을, 우리가 드라마 속 윤지훈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안티몬의 치사량이 얼마인지, 윤지훈은 과학적 진실을 향해 움직이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티몬의 출처와 인체에 미치는 영향, 한영그룹이 불법 증여 이상으로 저지르고 있는 범죄까지도 말입니다. 드라마 싸인은 안티몬이라는 독극물을 통해 인체내 중금속 중독의 심각성까지 사회적으로 시선을 확대시킵니다. 중금속에 노출되어 있는 사업장들, 얼마나 많습니까? 심한 경우는 보호장비 하나 없이 작업을 하고 있는 사업장도 많습니다.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비자에게 중금속에 노출시키는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기업윤리의식도 우리가 감시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까지,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명한이 말했지요. 소리없는 범인, 안티몬이라고요. 어디 안티몬뿐이겠습니까? 우리를 조금씩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물질들이 말입니다. 무엇에 대한 경각심을 말하고 있는지 너무나 강하게 와닿습니다.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 그리고 드라마 싸인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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