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의 고통은 그동안 막연하게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까지 미치지 못했고, 바보가 되어가는 것를 거부하는 몸부림이 먼저였지요. 비약보다는 단계적 심리묘사를 해가는 작가의 섬세함이 와닿더군요. 그래요, 만약 치매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면 '내가 바보가 된다고?'라는 반응이 먼저일 듯합니다. 기억이나 추억이 지워져간다는 것은 다음 고통일 듯합니다.
그래도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벌자는 지형에게 착한 "남자 흉내 그만내고 꺼지라"며 독설을 내뱉은 서연이었지요. 그리고 덧붙이는 서연의 말이 가슴을 후벼파더군요. "강요하지마, 지금 이대로 난 아니다 우기게 놔둬". 자신이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서연은 강한 자기부정과 최면을 걸며 버티고 있었지요. 메모장을 써가며 일일이 체크하고, 어려운 단어들만 골라가며 반복해서 외워보고, 다른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는 건망증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안간힘을 써가면서 말이지요.
죽을만큼 사랑했던 지형, 그래서 그 행복했던 어느 순간에는 이대로, 사랑하는고 행복한 상태로 그 시간이 정지되기를 바랐었고, 한 번쯤은 신이 그녀를 돌아다 봐주기를 바랐던 서연이었습니다.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그녀 인생에서 단 한번의 축복으로 허락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던 서연이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헛된 망상임을 알았을 때, 서연은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행복같은 것은 없다고, 신의 축복이나 선물따위는 그녀의 인생에 없다고, 아니 보란듯이 거절하겠다고, 그것이 이서연이 박지형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존심이었고, 신에 대항하는 무기라고 생각했던 서연이었지요.
서연은 재민에게 자신의 병을 알린 문권에게 불같이 화를 내지요.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누나의 머리와 자기 머리를 바꾸고 싶다고,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죽겠다는 동생 문권(박유환)의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문권의 말이 정말 제가 동생이어도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가슴 짠하게 울려오더군요. 이 드라마 왜 이리 슬퍼요?ㅠㅠ
죽을 날짜 받아 놓은 사람처럼,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진단을 받은 서연에게, 지금 그 누가 무슨 말을 한다한들 위로도, 병을 없애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머리를 대신 바꾸고 싶다는 동생 문권이나,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서연이나 가슴만 답답하고 힘들 뿐이죠. 매순간 절망이 가슴을 숨도 쉬지 못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것을, 서연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다 알지 못하겠지요.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을 잃어가며, 바보가 되어가면서 느껴야 하는 서연, "아직 아냐"라는 단 네글자의 짧은 말이 이렇게 가슴을 아리게 하다니, 드라마가 끝나고서도 한동안 멍해져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형(김래원)의 넋나간 표정처럼 그렇게 말이에요.
아직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 걸까? 서연은 아직은 바보가 되지 않았다고 언제까지 말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금 이대로 멈춰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겹치니 펑펑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도로의 자동차들처럼 시간이 그렇게 휙휙 지나가 주길 바랐던 서연은, 이제는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 멈출 수 있으면 멈춰달라고, 아직은 아니고 싶다고 빌어보는 서연입니다.
그동안 수애가 맡은 서연이라는 캐릭터가 대사의 부담감과 사랑, 이별,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 등 너무나 많은 감정선들이 얽혀있어서, 무엇이 그녀의 주된 고통인지 애매모호한 감이 있었는데, 그 혼재된 모든 감정들을 목놓아 우는 오열로 정리를 해주더군요. 아마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서연때문에 많이 아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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굄돌 2011.11.01 10:19
저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수애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내가 누구인지,
네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오늘은 아침미사가 없는 날이라 편히 이웃방문을 하고 있네요.
오후에 장례미사가 있어서 수업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왕비마마 2011.11.01 11:26
계백을 보느라 이 드라마는 항상 재방으로 보는데~
어서 빨리 보고싶네요~ ^^:;;
수애씨 워낙 연기파셨지만 진짜 이번엔 주인공으로 빙의 되신 듯~ ^^;;;
울 누리님~
기분 좋~은 11월 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