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8 09:35




천일의 약속은 나레이션처럼 이어지는 수애의 독백이 유난히 길고 많이 나옵니다. 가끔은 대사가 잘 안들려 몇번을 반복하고서야 대사를 캐치할 수 있을 정도로 중얼거림이 많죠. 낮게 깔린 수애의 목소리가 이서연이라는 인물의 일상을, 덤덤하게 레코딩하듯이 들려주는 장면이 드라마가 진행될 수록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필요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가끔 정확한 대사전달이 되지 않아 답답한 장면도 있네요. 이번회도 간신히 몇번을 돌려서 어떤 대사는(옷 내리는 걸 잊어 먹고...) 알아들었는데, 다음 대사는(??%#&%^#&#...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기가 싫다. 너무 피곤하다) 안들려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제 노트북의 스피커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제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짜증도 났지만, 그닥 중요하지 않은 대사인듯 해서 목숨 걸고 들을 필요는 없을 것같아 패스~.
여튼 이렇게 수애의 독백이 많고 길어지니, 드라마가 한없이 우울해지고 쳐지는 느낌이 들지만,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중요한 독백이기에 귀 쫑긋하고 드라마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도 있는 듯합니다. 수애의 긴 독백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하고, 김수현작가가 대화체 대사보다는 독백대사를 고집하고 있을까? 답답한 불만도 있지만, 이는 천일의 약속에서 이서연에게 진행되고 있는 알츠하이머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며, 기록으로만 남게 될 이서연의 기억이기에 굉장히 슬프고 아픈 대사들이죠. 이서연의 독백은 그녀가 누구였는지 잊기전에 기억해 두는 일기같은 자서전이니 말입니다. 먼 훗날 이것을 쓴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슬픈 일기장, 서연의 지워져 가는 기록들인 것이지요.
지형의 파혼선언으로 발칵 뒤집어진 향기네와 지형네, 가장 힘들 사람은 지형과 향기겠지만, 그 힘든 심정을 가장 직설적이고 감정적으로 육두문자 퍼레이드에 가까운 욕설과 폭력을 행사한 분은 오현아 여사(이미숙)였지요.
지형의 어머니 강수정(김해숙)을 통해 서연은 지형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충격에 할말을 잃는 서연은, 결혼을 원한 적은 없었다고, 결혼 날짜 잡았다는 말과 함께 이미 한달 전에 서로 정리를 했다고 했지만, 지형의 어머니가 왜 자신을 만나러 왔는지를 알아듣지요. "지형이 우리에게 돌려줘요"라고 부탁하는 강수정에게 죄송하다고 사죄할 수밖에 없는 서연입니다. 정혼자가 있었음을 알았기에, 잠시 멈출 수 없는 감정을 허락해 주는 시간만큼만 갖자고 지형과의 사랑을 시작했던 서연은, 지형의 바보같은 행동을 막아달라고 재민에게 부탁하지요.
지형의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서연은 사촌언니네 빵집에서 빵을 한 보따리 사오지요. 빵을 꾸역꾸역 밀어넣는 서연, 꽈배기, 고로케, 어려서는 그토록 먹고 싶었던 빵이었지만 고모한테 사달라고 하기 미안해서 못 먹었고, 자기 스스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그 지독한 가난때문에 못먹었던 설움에 오기와 자존심이 상해 못먹었던 빵을 입이 미어터지게 밀어넣고 맙니다. 개떡같은 자신의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한 인생을 빵과 함께 그렇게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었습니다. 울음을 삼켜가며 빵을 먹고 있는 수애의 모습이 어찌나 짠하고 가슴아프던지요.
처음에는 너무 환경이 차이가 나서 넘보면 안되는 사람인 것 같아 욕심내지 않았고, 사랑하면서는 정혼자가 있음에도 욕심내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던 서연이었습니다. 어쩌면 서연이가 이렇게 닥치는 대로 먹고 싶은 만큼 빵을 사서 먹듯이, 지형도 맘만 먹으면 잡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 않았죠.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서연이기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야 조금은 덜 비참해지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아프게 보냈던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판을 뒤집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제와서, 왜...?? ..엿 먹어라, 알츠하이머. 자신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것때문에, 그 알량한 동정심과 연민을 사랑이라 말하면서 곁에 있겠다고? 재민에게 두들겨 패주라고 문자를 보내고도 서연은 지형에게 직접 문자를 보내지요.
향기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에도 요지부동이던 지형은, 만나러 온다는 서연의 문자에 빛의 속도로 달려갑니다. 무슨 말을 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지형은 서연을 향해 달려갑니다. 재민이 지형의 파혼결정에 구세주 컴플렉스냐고 만류했지만, 지형의 결심을 그 누구도 바꾸지 못하지요. 부모님께 씻을 수 없는 불효이고, 착한 향기에게는 사람으로서 못할 짓한 짐승같은 놈이지만, 지형은 자신의 뒤늦은 결정을 더 강하게 밀어부칠 수 밖에 없습니다. 서연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누구도 이서연과 바꿀 사람이 없으니까, 이서연은 박지형이 지켜줘야 하니까 말입니다. 서연이 혼자 외로이 말라비틀어져 가는 것을 지형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서연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서연에게 매일같이 달려갈 자신이 보였고, 향기에게 매일 배신하고 상처주는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향기에게는 더 상처주지 않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한 지형이지요.

"나 아직 이런 말 할 수 있을 때 말해두고 싶어서 달려왔어. 나 당신 삶까지 삼켜버릴 수 없어. 이 말 꼭 기억해 줘. 내가 당신 얼굴도 이름도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멍청이로 이 세상에서 밀려난 뒤에도 꼭 기억해 줘. 당신 삶까지 망가뜨릴 수 없어. 그건 내가 아는 사랑이 아냐. 내가 빠진 늪에 같이 끌어내리는 게 아냐. 난 점점 더 내가 아닌 게 돼 가는데 내가 사라져간단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랑은 늪에 빠진 너와는 상관없이 내 볼일 보는 게 아냐. 거부하지마. 내가 지켜줄게. 그래도 너는 너야. 죽어도, 숨이 멈춰도 너는 너야".
서연은 자신이 지형이라면 도망칠 거라고 거짓말을 하지요. "미쳤니? 똥싸고 오줌싸고, 침 질질 흘리는 치매한테 내 인생 적선하게?". 적선이라고 했느냐고 되묻는 지형에게 서연은 독하게 쏟아붓지요. "적선, 동정, 연민, 자기미화, 자기도취, 웃기는 기만, 유치한 객기"이라고 말이지요.
"이렇게 독한데 아프다는 게 정말일까?". 여전히 서연은 변한 것이 없는데, 여전히 강하고 차갑고 자존심 강한 서연인데, 그녀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지형입니다. "나는 고장나고 있어"라는 서연의 말이 지형의 가슴을 후벼파기 전까지는 말이죠.
지형의 결심을 완강하게 거부할 서연임을 알기에 꾸역꾸역 빵을 먹고 앉아있던 서연과 오버랩되어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이제는 더더구나 욕심내서는 안되는 사람이기에 말이지요. 자신이 어떻게 변해갈 지 아는 서연이기에, 치매라는 것이 환자 당사자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서연은 지형을 더 힘껏 죽을 힘을 다해 밀어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서연의 사랑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붙잡지 못했는데, 그것이 서연이 지형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이었는데, 지형이 다 주겠다고, 지켜주겠다고 합니다.
지형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면, 서연도 지형처럼 그를 지켜주려 했을 겁니다. 지형의 마음을 서연이 모르지 않습니다. 서연도 그랬을테니까요. 하지만 사랑하는 지형이 힘든 것은 싫은 서연입니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서로의 고집을 꺾기 힘들다는 것도 너무도 잘 아는 두 사람입니다.
이번회 지형의 따귀를 때리고, 분이 풀리지 않아 무차별 매질을 하는 오현아(이미숙)의 욕설에 가까운 독설이 이미숙의 열연과 함께 빛났지요. 지형은 서연의 입장에서는 착한 남자, 지고 지순한 사랑이겠지만, 향기의 입장에서는 석달 열흘을 멍석말이를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파렴치한 남자임에는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오빠 욕먹는 것 싫다며 끝까지 서연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는 착한 향기를 보며, 요즘 시대에 저런 아가씨도 있나 싶더군요. 내 딸이어도, 그깐 놈 잊어버리고 더 좋은 놈 만나서 보란 듯이 잘 살아라고 해줄텐데, 무조건 "제 탓입니다"라고만 하는 향기가 답답스럽기도 합니다. 향기같은 여자도 없을 듯하고, 치매가 진행된 여자 곁을 지키겠다고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박지형같은 남자도 없을 듯하고, 아무튼 김수현 작가가 새로이 내놓은 캐릭터들은 사랑을 너무 지독스럽게 하네요.
지형과 서연의 사랑도 어찌보면 요즘 시대에서는 현미경을 들고 찾아봐도, 구글에서도 검색 불가한 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라는 소재가 너무 흔하고 가끔은 솜털처럼 가볍게 드라마 소재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천일의 사랑은 오랜만에 묵직하게 감성을 흔드는 드라마입니다.

이번회 지형이 따귀를 맞고 몰매를 맞은 사건(?)이 있었지요. 오득오득 씹어먹어도 오현아(이미숙)의 분이 풀리겠습니까만은, 그 화딱지 솟는 심정을 가장 직설적이고, 감정적으로 욕설과 폭력을 행사한 이미숙의 미친 열연이 돋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지형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자존심 깔고 자기 고약한 성격때문에 막말을 했다고 사과도 하지만, 지형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보고는 꼭지 팽글 도는 오현아였지요. "결혼식이 내일이야. 이 황당한 녀석아. 너 정신병자냐?". 오현아는 그냥 결혼식을 올리고 1년 뒤에 차라리 이혼을 하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아, 곁에 있던 강수정을 뜨악하게도 만들었지만, 박지형이라는 캐릭터의 애정과는 별개로 이미숙의 폭풍분노가 속시원하더군요.
오현아의 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죠. 도우미 들으라고 박지형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지를 않나, 명예훼손에다 물질적 정신적 피해보상 등등 걸 수있는 것은 다 엮어서 청구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중이죠. 아, 이분의 다음 행동이 기대되고 아주 궁금하답니다. 워낙 예측불허한 말들이 이분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 나와, 오현아 어록만 챙겨도 재미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오현아의 속은 활화산일지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그 거친 입담속에서도 순간 빵터지게 웃긴 말이 나왔는데, 저 혼자 그 올드한 말의 정겨움에 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미친듯이 웃었다지요. 지형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자, 오현아가 쌍팔년도 홈드라마도 아니고, 우리 시대에 맞게 하자며 일어나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그 뒤에 터진 오현아의 쌍팔년도 보다 훨씬 이전의 용어가 저를 배꼽쥐게 했답니다. "너 정신병자냐? 이 악질 반동분자 같은 자식아". 악질 반동분자라는 오랜만에 듣는 욕(?)이 오현아라는 단순 직설적인 캐릭터에 맞춤형인 이미숙의 명품연기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비슷한 세대라서인지 이미숙의 욕설이, 올드한 감성을 자극하기도 해서 재미있었네요. 
이미숙의 연기에 대해 한 번 포스팅을 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미숙은 작품 속 캐릭터마다 강렬한 변신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팔색조같은 배우지요. 이번 천일의 약속에서는 뜨거운 모성애를 가진 것 같지도 않고, 희생적인 어머니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양과 품위로 치장한 귀부인도 아닌 듯한, 성형중독 오현아라는 캐릭터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짧은 등장, 짧은 장면에서도 '역시 이미숙이다'라는 연기내공이 각인되는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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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2 Comment 8
  1. 사랑해MJ♥ 2011.11.08 10:1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동분자가 무슨말인가 했었어요 ㅎㅎㅎ
    하하;;

  2. c-one1 2011.11.08 10: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천일의 약속 이드라마 보려다가 어느순간 하나둘씩 놓쳐서 못보고잇습니다ㅠㅠ
    포스팅 해주신것만 읽어두 내용전개가 잘되네요 ^^

  3. 국토지킴이 2011.11.08 10:42 address edit & del reply

    수애씨 너무 예쁜거 같아요 ^^

  4. 왕비마마 2011.11.08 12:03 address edit & del reply

    앗~ 이드라마 아직 못봤는데~
    이거이거 어여 재방이라도 빨리 보고싶어지네요~ ^^

    울 누리님~
    기분 좋~은 화욜 되셔요~ ^^

  5. 파리아줌마 2011.11.08 18:00 address edit & del reply

    ㅎㅎ 그런 대사가 나오는군요,
    반동분자~ 참 오래만에 들어봅니다.
    블 마실 빨리 끝내고 어제 방송분 봐야겠어요~

  6. 굄돌 2011.11.08 23:59 address edit & del reply

    드라마를 좋아했거나 볼 만한 시간이 있었다면...
    글쎄 그렇게 됐을지는 모르지만요.
    그래도 모르는 내용들을 이렇게 글로 읽으며
    혼자만의 상상을 해보기도 하지요.

    꼭 해야 할 일들이 쫘악 밀려 있는데도
    그제 밤에는 상처 많은 이웃의 생일,
    어젠 내게 무진장 잘했던 이웃의 생일,
    어제 밤엔 얼결에 친구 맺은 이웃의 생일...

    가정 경제 무너지겠어, 라고 하는데
    더 절박한 것은 시간 경제 무너지겠어.ㅎㅎ

    사람 사는 게 참 별 거 없지, 하면서
    그래, 이렇게어울렁 더울렁 사는 거지, 하며
    오늘을 보냈네요.

    작은 딸, 내년에 휴학하고 워킹홀리데이 가겠다며 통보.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했어요.

    아들 땜에 심란할 것 같긴 한데,
    그냥 두자구요.ㅎㅎ

  7. 날아라뽀 2011.11.09 10: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미숙은 표정만 봐도 무서워요.ㅋ

  8. 진율 2011.11.09 10: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