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형의 오피스텔로 달려온 강수정은 지형에게 눈물로 안된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지만, 지형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너무나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반듯한 아이, 지형은 수정의 자랑거리였고, 자부심이었고, 목숨같은 아이였습니다. 돈이 부럽지 않았던 아이였지요. 향기가 심성이 곱고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병원 이사장의 딸이라고 해도, 친구 딸이라고 해도 지형과 향기를 맺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형이 향기에게 잘해줬던 것이 향기가 부잣집딸이어서가 아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강수정입니다. 그래서 지형이 서연을 사랑하는 것이 단순한 관심이나 연민이 아님 또한 잘 아는 강수정이지요.
"좋을 때만 사랑은 사랑 아닌 것 알아. 평생 아픈 남편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세상엔 많아. 그런 것 보면서 난 늘 감탄하고 감동해. 그런데 내 아들이 이리 되니까 그럴 수 없어. 너한테 그아이가 그토록 소중한 것만큼 나도 네가 그래. 나 못해".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이 있지만, 저는 강수정의 모성을 그런 것에 견주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강수정은 지형의 편이 돼주겠지만, 그것을 지형에게 졌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사랑에 대한 이해라고 보고 싶습니다. 아들을 떠나 한 남자로서 책임감있는 모습, 자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는 아름다운 사람 중 한사람이 자신의 아들 지형이라고, 그 사랑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지형이 오피스텔에서도 강수정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요. 어머니한테 자신의 병을 드러내면서 까지 자기를 거절한 여자라고, 지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형을 위해서 놔준 거라고...
지형은 정말 허수아비가 되어가는 자신을 경험했습니다. 향기와의 결혼준비를 하면서 넋나간 사람처럼 아무 감정없이 웨딩화보를 찍고 있던 자신을 봐야했고, 하루종일 멍하니 서연이만 생각하는 자신을 봐야 했습니다. 그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냥 그렇게 허수아비처럼 사는 것이 서연을 책임지지 못한 죄값이라고 생각했던 지형이었지요. 그런데 서연이 정말로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형은 그제서야 얼마나 서연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지요.
그래요. 사랑이 쉬운 사람들에게는 그깟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똥오줌 수발 들어야 하는 치매환자를 결혼한 남편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지려 하는 것이 정상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형이 어떤 감정에 있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아이가 넘어져 무릎팍이 깨져 울고 있는데, 내 일 아니라고 그냥 지나치면 참 찝찝하고 찜찜하고 후회스럽겠지요. 하물며 모르는 아이가 다쳐도 그러할텐데, 사랑한 사람이 아픈데 나몰라라 할 수 있을 강심장이 얼마나 있을까요?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 물론 태산같고 버겁겠지요.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이런 계산이 앞서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아닐까 싶어요.
천일의 약속 10회는 드라마 전반부가 끝나고 후반부의 이야기 사랑이라는 주제로 넘어가는 교차점이었습니다. 전반부가 이서연의 병과 지지리도 복없는 과거와 가난, 그리고 태산을 찌르는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후반부는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곁을 지키는 박지형이라는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겠지요. 또한 서연의 생모인 듯한 여인이 등장한 것도 주목해야 겠지요. 서연이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해가는지도 중요한 줄거리가 될 듯합니다.
그럼에도 김래원이 박지형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해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박지형은 강수정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크면서 부모 속 한 번도 썩히지 않은 아이입니다. 부모 말에 순응하고, 지극히 모범적인 인물이죠.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자 한 마디 대꾸도 안하고 묵묵히 가방을 싸서 나올 정도로, 부모나 어른들 앞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반항하는 인물도 아니었지요. 비록 사랑하는 서연이를 택하겠다고 결혼 이틀 전까지 미적거리다 결혼을 깬 우유부단한 나쁜놈이 되어야 했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성격마저 훼까닥 바뀔 수는 없는 인물이지요. 그런 모습이 지형의 캐릭터를 답답하게도 보이게 했지만, 몸에 배인 태도나 성격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사랑을 말이나 감정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오히려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래원은 박지형이라는 캐릭터의 성격만큼이나 그의 사랑도 감정을 폭발해 내는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았지요. 박지형의 사랑을 가장 잘 이해시킨 장면이 있었어요. 강수정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가장 절박하고 간절하게 감정을 담았던 장면을, 강수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손에 얼굴을 묻고 애절하게 바라보던 것을 꼽고 싶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신이 모든 사람에게 갈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마치 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기도하는 모습처럼, 어머니에게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간절하고, 절박하게 간구하는 모습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왜 그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지, 얼마나 원하는 지를 '엄마'라는 말에 모든 것을 담아 전해주더군요.
드라마 속 박지형의 사랑은 기교가 없기 때문이에요. 박지형이라는 인물의 가볍지 않은 성격만큼이나, 그 사랑에 솔직하고 진지하고 진심인 것이 지형이 하는 사랑입니다. 물론 향기는 두고두고 지형에게는 미안한 사람으로 남겠지만, 지형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서연을 택한 이유도 그의 사랑이 진중해서 입니다. 계산이 아니라 심장이 움직이는 사랑, 이성이 아니라 가슴이 움직이는 사랑, 울렁이고 두근거리고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체온같은 사랑....심장이 멎어야만 끝나는 사랑, 체온이 식어야만 멈출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서연을 향한 지형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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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i 2011.11.16 17:42
네, 지형의 말문이 트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도 그동안 지형에게 감정이입이 잘 안되서 답답했던 한 사람으로써
9회에서 서연이 사촌오빠가 전화기에 대고 "정신차려 이자식아!" 할때는
정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래 이자식아!" 하고 따라 소리치기까지 했죠.
그런데 그가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 보듯..
처음으로 절절하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에 한동안 멍하니 가슴이 찡해지더라구요.
지형의 너무도 큰 사랑에 서연이 언제쯤 그만 항복(?)하게 될지 무척 기대되면서도,
지형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금방 먹먹해져오네요ㅜㅜ
정성이 듬뿍 들어간 초록누리님 리뷰 덕에 오늘도 눈이 호강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