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학사들에 이어 글자때문에 아들마저 잃은 세종은 급기야 정신을 놓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정말 정신을 놓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광기를 누르지 못하는 세종을 보면서, 한석규의 연기력에 감탄하고, 한글에 자부심을 느끼고,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세종대왕에 감사했습니다.
1. 글자의 기능, 글자란 무엇인가?
"우리 글자를 통해 백성들이 쉽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글자의 길(字路)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이는 백성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보기 위함이다. 백성과 소통하려 하는 것이 삼봉의 뜻이기도 하고, 성리학의 이상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터인데 어찌 반대를 하는가. 반대하는 이유가 중화에 위배된다거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이냐?"
"내 장담하건데 훗날 사대부는 기득권으로 굳어지고 결국 썩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대부가 썩지 않도록 그 욕망을 누가 견제할 수 있겠느냐? 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역할을 하게 하려한다. 백성이 힘을 가지고 그 권력을 나눠가지게 되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새로운 균형, 세로운 질서, 세로운 조화다. 나의 글자는 그런 새로운 세상의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
토론의 핵심: 하늘과 땅이 있고, 음양이 있으며, 물이 위에서 흐르듯이 우주만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질서가 이뤄지고 조화로운 것이다. 그것이 성리학의 이상이다. 그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글자이다라는 것이 정기준이 생각하는 글자입니다. 이에 세종은 글자를 독점한 사대부가 권력이 되고, 권력을 가지면 지키고자 하고,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커지면, 부패하기 시작한다. 사대부는 부패할 것이다. 하여 모든 사람들이 글자를 아는 세상, 힘있는 백성들을 만들어 그 부패를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반박했지요.
2. 글자의 역할, 글자가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
사대분의 욕망에 대한 세종의 반론과 비판에 정기준은 중요환 화두를 던집니다.
"백성이 글을 배워 삼강오륜을 안다면, 사람의 도리를 알고 성리학적 이상에 더 가까이 갈수있다. 근데 어찌 그것이 지옥이냐?".
"백성이 글을 알면 읽고 쓰게 될 것이며 그 즐거움을 알면 그들은 지혜를 가지게 된다. 사람이 지혜를 가지면 쓰고 싶어한다. 무엇에? 욕망이다. 욕망이란 결국 정치를 향하게 돼 있어. 국가의 정책에 관혀하려 들테고, 나아가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려 들 것이다". (음,,,,정기준 허벌나게 똑똑하구만...)
토론의 핵심-사람들 모두가 글자를 알고 지혜를 가지게 되면 권력을 가지고 싶어한다. 사회는 혼란이 오고 결국 조선은 권력싸움으로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3. 역사적 책임, 새로운 질서(혼란)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세종의 백성이 지도자를 스스로 뽑으려고 할 것이다라는 정기준의 청천벽력같은 궤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맞받아 치지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세종은 생각했을 겁니다. 백성이 임금 혹은 재상을 뽑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테니까요. 그럼에도 세종은 정기준 못지않게 미래를 내다보는 투시안이 있었죠. "백성이 지도자를 뽑는 세상이 왜 지옥이냐?".
"동서고금에 그런 무책임한 제도가 어찌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 정치는 책임이다. 유사이래 정치의 본질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 정치는 오직 책임이야(정기준 참 옳은 말했다, 암 책임이지. 오늘날 정치인들도 좀 들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뽑았을 때 그 지도자가 실정을 하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그 지도자를 뽑은 백성을 모두 죽여야 하나?".
정기준의 독설이 상당히 무섭게 들렸지요. 지도자를 잘못 뽑은 결과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우리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체 너는 백성에 대한 신뢰가 어찌 그리도 없단 말이냐? 도대체 어찌 그리된 것이야 정기준!!".
"내가 백성으로 살았으니까..저들에겐 희망이 없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건 저 무지몽매하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군중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몇몇이다".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정말 측은한 일이구나". 세종은 정기준이 너무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래설레 젓기까지 하죠.
이 대목에서는 저는 정기준이 측은하기보다는 패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논리에 오류도 보였고 말입니다. 정기준의 오류란 해보지도 않고 불신부터 했다는 겁니다. 백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어떻게 그들이 변하는지 보지도 않고, 체념과 비관부터 했다는 겁니다.
무지하기에 백성들에게는 논리가 부족했고, 무지하기에 힘 역시 가지지 못할 것이라 체념했던 것이고, 굴복과 복종을 했던 것이었죠. 그것이 백성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요. 이방지의 말처럼 백성은 자기의 기쁨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없는 존재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정기준에게 백성은 그런 노예근성에 찌든 사람일 뿐이었죠.
흔들리는 세종과 정기준, 그러나 화해의 가능성은 깨지고..
그런데 세종의 측은하다는 말에 정기준이 더 강하게 세종을 흔들어 버리죠. "글자를 몰라 이유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었다면, 이제는 글자로 인해 이유를 알고도 억울하게 죽게 될 것이다. 글을 만들어 나눠주고 글을 아니까 이제부터 스스로 구원하라는 것이 임금의 태도인가? 백성은 오직 보살피고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다. 주상의 본심은 이제 백성이 귀찮은 것이다. 넌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귀찮아 하는 것이다. 이제 글을 알았으니 스스로 해결해라, 이러고도 불행하다면 그건 다 니놈들 책임이야. 이게 너의 본심이다".
한마디로 책임을 백성에게 전가하기 위해 글자를 만들었고, 그것은 백성을 보살피는 일이 귀찮아져서, '옛다, 글자를 줄테니 니들끼리 해결하고 살아라', 였다는 겁니다.
백성을 사랑하느냐 미워했느냐에 대한 질문에 세종은 평정심을 잃고 흔들려 버리고 말았지요. 세종 스스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보다 사랑해 버린 글자, 조선보다, 임금이란 자리보다, 세상 모든 것의 가장 위에 둔 것이 글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대의가 곧 글자였으니 말입니다.
정륜암에서의 토론은 세종에게도 정기준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서로를 인정하기도 하고 되돌아 보기도 했습니다. 정기준은 세종의 말대로 글자가 백성들에게 삼강오륜을 쉽게 가르쳐서 백성들을 더 효율적으로 교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성리학적인 이상과 가까운 것아닐까 생각하고, 세종은 자신의 글자가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군주의 도리에 의한 강박관념에서 만들었고, 스스로 만든 것이라 글자 자체가 자신의 사랑이 돼버렸다는 것을 고백하기에 이르지요.
무엇보다 세종은 정기준이 경고했던 글자의 책임론에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만든 이 글자들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크기의 것이 아니다. 헌데 왕이...정치를 하는 자가 백성을 놓고 책임지지도 못할 시험을 해도 되는 것인가?". 글자반포를 앞두고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은체 혼란에 빠져버린 세종이었지요. 흔들리는 세종을 보는 소이와 정인지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고요.
울음바다 만든 한석규의 미소와 아들잃은 아버지의 오열
광평대군의 죽음과 아들잃은 아비의 오열을 써내려 가야하는데 자신이 없네요. 눈물부터 줄줄 흘러내려서..ㅠㅠ
버선발로 땅인지 허공을 밟는지 조차 모르고 나간 세종, 세종의 버선발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꽉 매여오는데 이후 장면은 무슨 정신으로 봤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가, 내아들아. 실없는 정인지 놈이 농담을 했던 거겠지, 어디 보자. 그렇지. 잠든 게로구나. 피곤했을 터이니. 봐라, 광평이 살아있지 않느냐'. 소이를 돌아보고 웃는 세종, 믿고 싶지 않았겠지요. 아니 믿을 수가 없었겠지요. 한석규의 미소는 광평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아비의 마음, 그저 곤해서 잠든 것뿐이라고, 그런 것이라고 간절하게 믿고 싶은 마음었지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이것이 꿈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애원의 웃음이라는 것을 알기에,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임금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임금이 하늘을 보고 원망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왜 내 아들이냐고....
"그래,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됐다. 난 처음부터 불순한 의로로 시작했어. 백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워했다. 난 백성을 사랑한게 아니라, 글자를 사랑한 것이야" 오열하는 세종,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세종이었지요. 오직 자식을 죽인 자신을 원망하며, 자식보다 글자를 사랑한 자신을 원망하며 자책하는 세종이었지요. 아니 아버지였습니다.
채윤의 지랄하고 있다는 말에 광기로 눈이 뒤집히는 세종, 무휼의 칼을 빼서 채윤을 당장 쳐버릴 기세였지요. '너 때문이다. 네 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 그날 지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난 똘복이 네 놈을 몰랐을테고, 글자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을테고, 광평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네 놈때문이야'.
그때도 흔들리는 세종을 잡아준 이는 똘복이 강채윤이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이 죽어나가고, 이도 네가 가는 길이 틀렸다고 말했을 때, 망령들이 세종을 괴롭혔습니다. 아버지 이방원과 아버지에게 맞섰던 젊은 이도, "권력의 독은 안으로 감추고 오직 문으로 치세를 하겠다고? 잘난 네 놈의 그 한심하고 잘란 결심이 네 사람들을 죽였다. 이방원이 왜 이방원인가, 이도가 왜 이도인가? 그것밖에 안되니까 이도인 게지".
칼을 떨구고 비틀비틀 주저앉아 목놓아 오열하는 세종, '그랬더냐 광평아, 그리 말했더냐 광평아'. 그래도 오늘만은 울고 싶구나. 통곡하고 싶구나. 오늘만은 내 아들 광평에게 부끄러운 애비이고 싶구나. 자식을 잃고도 울지도 못하는 아비가 아비더냐. 내 오늘만은 임금이고 싶지 않구나. 오늘이 지나면 내 다시는 울지 않으리'..
**긴글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여러분의 인내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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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아저씨 2011.12.08 11:26
ㅎㅎㅎ 자고로 여자말 듣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둘~셋~~
이상하게 궁궐가서 군사 데리고 오라던 놈은 왜 안왔는지? 고것이 상당히 궁금하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