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1.11.30 '천일의 약속' 수애, 너무나 잔인해서 슬펐던 절규 (12)
  2. 2011.11.29 '천일의 약속' 수애의 임신가능성, 사실로? (21)
  3. 2011.11.16 '천일의 약속' 말문 트인 김래원, 마침내 사랑을 말하다 (10)
  4. 2011.11.15 '천일의 약속' 김해숙, 시청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배우 (19)
  5. 2011.11.09 '천일의 약속' 노향기의 사랑, 통속과 명품을 가른 보석 (6)
2011.11.30 09:13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대한 감상평의 특징을 든다면, 대부분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게 한다는 점일 겁니다. 소재의 파격, 특유의 어법 등을 들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 진하게 묻어나오는 그녀의 생각이 사회를 향해 던지는 날카로운 화두가 되기 때문인 듯 합니다. 동성애라는 화두 역시 그러했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주인공의 사랑을 빌어 던진 낙태에 대한 화두는, 신파를 넘어 생명의 문제까지 자극할 만큼 신랄합니다.
천일의 약속을 단순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륜마저도 미화한 통속멜로극이라 하기에는 그 사랑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통속과 진부, 신파를 거부하는 힘을 가집니다.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여인,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겠느냐?고 묻는 작가의 질문은 잔인하기 까지 합니다.
신혼집을 찾아온 시어머니 강수정, 훌륭한 어머니상의 모범답안 같은 강수정(김해숙)은 이번회도 심금을 울렸지요. "넌 어떤 불행보다 더 큰 불행과 어떤 여자도 쉽게 얻을 수 없는 행복을 동시에 가졌다는 것 잊어버리지 마라. 에미로서 내 자식 아깝고 안타까운 것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사람으로서 너랑 같은 여자로서 나는 내 자식이 싫지가 않다. 너한테 주어진 시간들을 잘 관리하면서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고, 즐거울 수 있을 때 다 즐거워하고....너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내 아들 행복하게 해주기 바란다". 
지형의 곁에 하루라도 더 오래있어 주는 것이 서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서연 역시 기억이 다 사라져 갈 때까지 지형만은 기억하며 사는 것이 행복일 겁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서연이 중요하다는 지형,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하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서연이지만, 서연에게 내일이란 어느 날 뚝 끊겨버린 필름처럼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서연은 오늘만 죽도록 사랑하고 싶어하는 여자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서연은 누구보다 삶에 대한 집착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서연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가면서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드라마라는 것을 감안하고 더욱이나 김수현 작가의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결코 가볍게 그리지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도 혹시나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의 당혹감이란, 극중 강수정의 대사처럼 "이를 어쩌나"라는 말밖에 안나오게 하더군요. 임신 8주진단을 받은 서연, 결국에는 서연이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을 피울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지형이 서연을 볼 수있을 시간, 그리고 서연의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에 가슴에 바위덩어리가 얹힌 느낌입니다.
신혼여행을 떠난 비행기 안에서부터 서연의 행동이 이상스러웠지요. 머리만 기댔다 하면 잠이 들고 피곤을 호소하는 서연, 급기야 헛구역질까지 힘들어 했지요. 약부작용이라고 생각했던 서연은 약국에서 사온 임신테스트기로 임신했음을 확인합니다.
서울로 올라 온 서연과 지형은 산부인과 진료를 받고 임신임을 확인하고, 담당의사와 면담하지만 약물부작용으로 기형아 출산에 대한 우려와 함께, 아이를 낳으려면 약을 중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서연의 임신에 기뻐하고, 당연히 낳아야 한다고 했던 지형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지형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하지요.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때 서연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지형이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크다고 거부했지만, 서연은 아이의 심장박동소리를 듣고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면서, 지형과 서연의 갈등은 서로의 생각을 너무나 잘알기에 더욱 힘들게 하지요.
지형을 위해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지만, 자기를 위해서 낳겠다는 서연의 말이 얼마나 가슴 아프게 들려오던지요. 아이 보고 눈 마주치고 웃고 싶다는 서연, 서연의 선택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많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서연이 했던 말처럼, 아이를 베란다에서 던져 버릴 수도 있고, 목욕을 시키다가 물에 빠뜨려 죽일 수도 있는 끔찍한 비극이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말입니다. 서연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대소변도 못가리는 엄마인 게 아이한테 할 짓이냐"고 했을 때는, 도대체 작가가 왜 이런 힘든 설정까지 넣어서 시청자를 괴롭히는지 야속하기까지 했네요.
세상천지에 서연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지형,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살아있는 아이를 지울 수 있느냐며, 잔인한 사람보다는 바보엄마이고 싶다는 서연, 나오는 것은 한숨이고 꺼지는 것은 땅이라더니, 지금 제 심정이 딱 그렇습니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이를 낳으려면 서연의 생명이 줄어들 것이고, 치매증상도 더 심해질 것인데, 그렇다고 살아있는 생명을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저는 제 신앙적인 이유만으로도 낙태반대 입장이기에 서연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따른 부작용들이 고민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말 그대로 기형아 출산에 대한 불안, 혹이라도, 만에 하나 그렇다면 혼자 남아 아이를 키워야 하는 지형의 인생은 또 얼마나 참담하고 힘들 것인지....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머리가 지끈 아파오기까지 합니다. 저 사실 너무 머리가 아파서 두통약까지 먹었다네요.

미국에서 뇌종양에 걸린 임산부가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사는 스테이시 크림이라는 여자는 지난 3월에 임신을 하고, 7월에 두경부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크림은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결국 의식을 잃어 심장박동이 멈춘 상황에서 제왕절개로 딸아이를 출산했고, 겨우 의식을 회복하고 아이를 한 번 안아보고는 3일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기를 안아볼 수있도록 오래살고 싶다며, 혹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를 부탁한다는 문자를 오빠에게 남겼다고 하는데, 그 기사를 읽는 순간 극중 이서연이 생각나더군요.

모성이라는 것,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부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연이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아니면 포기를 해야 옳은 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낳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신앙때문만은 아니에요. 생명만큼 존귀한 것도 없다는 당연한 말때문만도 아니에요. 서연과 지형을 위해서 입니다. 서연이 떠나고 난후 지형이 서연이 분신으로 남긴 아이를 끝까지 돌보며,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신파적인 이유때문도 아니에요.
"심장이 뛰고 있었단 말이야, 이 벽창호야" 라는 서연의 절규때문이에요. 서연이라고 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겠어요.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연의 트라우마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요. 서연은 생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강한 여자지요. 그런데 서연도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엄마와 다를 바가 없다고 깨닫습니다.
'서연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 모성애다' vs '모성애가 있다면 아이가 자라면서 받을 힘겨움을 생각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헌데 잘 생각해보자고요. 없는 아이에 대한 모성애가 과연 있는 것이며, 아이를 죽이는 것을 모성애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 여기서 서연의 모성애는 인류 여성의 보편적인 모성애와는 별개에요. 만약 아이를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지형에게 짐을 떠안기고 싶지않은 미안함때문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아이에 대한 모성애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기형아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은 두려움이고, 그 아이가 받을 고통에 대한 걱정이며, 생명을 지웠다는 엄밀히 말하자면 죄책감입니다.
모성애는 서연이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에라야 모성애며,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단까지 감행하게 하는 힘이 모성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김수현 작가가 설마 그렇게 잔인하게 지형과 서연에게 슬픔을 안겨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임신 8주라는 시기, 사실 이 시기는 좀 애매하고 불안한 요소가 많지만, 임신초기에 약물복용이 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그에 대한 학술자료들을 찾아봤습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5주 이내에 모르고 복용한 약은 기형아 출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태아의 기관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5주이후이며, 장기가 형성되는 임신 12주 즉,3-4개월까지는 약물복용이 태아의 기형유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이때는 약물 복용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서연의 경우는 애매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서연이 약을 먹기 시작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으면서 읽은 놀라운 사실은 임신초기에 모르고 먹은 감기약 등으로 인해 유산을 쉽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대책’ 자료에 의하면, 연간 34만 건의 임신중절 중 12.6%가 약물복용으로 인한 기형아 출산 걱정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유명한 산부인과에서 임산부 200여명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임신 중 약물을 복용한 경우 임산부 약 50%가 주위에서 중절을 권유했고, 임산부 43%가 기형아를 낳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약을 복용한 초기 임산부 12.6%가 중절을 한다는 통계자료는 충격적이더군요. 물론 건강하고 이상없는 아이를 어느 엄마인들 바라지 않겠습니까만, 기형인지 아닌지 판단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또 임산부의 두려움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저 역시 두 아이를 낳으면서 손발가락 10개씩 다 있나를 걱정했으니까요.

지형을 위해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서연이 아이 심장박동소리를 듣고는 마음을 그리 쉽게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어요. 저 역시 여자이고,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엄마이기에, 초음파로 아이의 심장박동수를 들었던 그 순간, 내 안에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경외감과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경험했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랑의 열매라느니 하는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어요. 신비롭고 신기한 생각이 더 먼저 들었거든요. 서연이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랬겠지 싶습니다. 임신을 원하지 않았던, 원했던, 생명이 살아있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 경우는 뭐랄까, 심장이 두근거리며 쿵하고 울리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던데, 임신을 경험했던 다른 분들은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천일의 약속 14회를 보면서 저는 엉뚱한 장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서연과 지형이 서연의 목숨과 아이를 두고 갈등하는 장면도 아니었고, 뜬금없게도 신혼여행가서 찍은 사진을 보고서였습니다. 저 사진들이, 어느 순간 지형만이 그리워할 서연의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 쓸쓸한 슬픔에 눈물이 나오는 겁니다.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슬픈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하겠다고 말해달라는 서연과 오버랩이 되더군요. 서연은 지형에게 자신을 잊으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늘 기억해 달라고, 자신이 기억하지 못해도 기억해 달라고 하지요. 그리고 아이까지 덜컥 낳아서 지형에게 맡기고 가려합니다. 이기적일 수도 있어요. 혹자는 평생 지형의 발목을 잡고, 죽어서까지 지형의 발목을 잡을 물귀신같은 여자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사랑한다면 놔줘야 했었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서연도 때때로 자신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이 남자한테 뭐하는 짓이야"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서연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에게 태어날 권리를 주는 모습때문이었어요. 그것도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가면서 말입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자를 사랑하는 지형의 사랑,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 까지 아이를 지키는 사랑, 결코 쉬운 선택도, 감당하기 쉬운 사랑도 아니지요. 그래서 비현실적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울리는 여운은 드라마를 넘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까지 던지게 합니다. 가족들도 힘겨워 하는 치매, 고통이 더 심해질 것을 알면서도, 수명이 단축될 것임을 알면서도 약복용을 중단하고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모성애는, 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를 떠나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작가는 강수정의 입을 통해 그 울림의 정체에 대해 말합니다. "사랑이야"라고요.....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큰 무게로 다가오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생명에 대한 사랑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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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9 09:33




지형과 서연이 마침내 결혼을 하고, 향기네 집에서도 서연의 치매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식 당일 새벽에 서연이 우두커니 거실에 앉아 순간순간 행복을 느낄 때 엄청 많이 행복한 척 연기를 한다는 독백이 가슴을 찌르더군요. 지형과 함께 할 시간, 그것이 달콤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서연은 자신이 서연인 동안에는 행복한 모습만을 보이려고 애를 써왔던 것이지요.
치매환자라는 것이 서연에게는 한시도 잊혀지지 않는 악몽인데, 애써 행복한 척 연기했다는 서연이었습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고도 지형에게 힌트를 달라고 태연한 척하지만, 힘든 지형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연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그사람을 더 아프게 할까 말이지요.
잠시 서연의 독백을 들으며 지형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 서연의 진심을 생각해 봤습니다. 서연이는 지형이 어머니 강수정만큼 박지형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요. 강수정(김해숙)이 남편 박창주(임채무)에게 지형의 결혼사실과 서연이 알츠하이머라고 밝히며, 그래도 말릴 수 없었던 이유가 아들이 어떻게 할지를 너무도 잘알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말이지요. 지형의 아버지는 서연이 어딘가로 숨어서 살아야 했었지 않느냐고 원망했지만, 강수정은 지형이 그 아이를 찾아다니며 폐인되었을 거라고 했지요. 서연도 지형이 폐인이 되어 서연을 찾아 다녔을 거라는 것을 짐작했을 듯 싶더군요.
그럼에도 이번회 서연의 대사중 마음에 썩 들지 않은 장면이 있어서, 잠시 서연이라는 인물이 혼란스러워 지기도 했네요. 지형은 원래 자기 꺼였다며, 축하한다는 향기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장면이 걸리더군요. "미안해 해야 하는 건가? 미안해 해야겠지..."라는 서연의 말에는 잠시 머리가 띵해지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동안 남자주인공 김래원에게 쏟아진 비호감의 비난이 무엇때문인지를 작가가 염두하고 있지 않은 듯해서 아쉽더군요. 사실 여자로서 서연이 가장 미안해야 할 사람이 향기일텐데,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서연의 속마음을 역설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서연이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자고 정말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리송하기 까지 했네요.
"부러우면 내 알츠하이머 가져가라고 해, 그러면 박지형까지 덤으로 준다"고 하는 대사는, 서연의 절망적인 상황이 더 아프게 와닿기보다는, 그런말은 하는게 아닌데 싶어서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대사 하나에 서연의 내면이 담기는데, 너무 무감정하고도 황당스런 말을 내뱉는 바람에, 서연의 감정이 제대로 읽히지가 않더군요. 아무리 서연의 처지가 딱하고, 그 사랑이 하늘도 갈라놓을 수 없는 순애보라 할지라도, 향기에게 미안한 마음을 진심으로 가지지 않았다면, 서연이라는 인물이 참 비호감일세~ 였답니다.

지형과 서연의 결혼식이 다음날로 다가오자 강수정은 남편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향기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지요. 오현아(이미숙)이 그것보라며, 딴 여자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고, 새됐다고 친구도 끝이고 ,지형의 아버지에게는 병원 그만두라고 까지 분노합니다. 오현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날 일이었고, 뒷통수를 맞아도 그렇게 더럽게 맞았는지, 분통터질 일이겠지요.
"형편없는 자식, 나쁜 자식, 더러운 자식", 세상에서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다해주고 싶었을 오현아입니다. 지형과 결혼할 상대가 알츠하이머라는 것을 알고는 더더구나 열뻗치는 오현아였지요. "그러니까 치매환자한테 우리 향기가 까였다는 거니? 치매환자때문에 우릴 개떡으로 만들었다는 거야?". 오현아의 육두문자와도 같았던 분노도 공감되고, 한편으로는 뭔지 모를 시원함까지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향기네 집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반응이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복창터지는 향기의 반응에 오현아는 거의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표정이었지요. 서연이 치매환자라는 사실에 충격받은 향기, 향기 엄마가 그 자식 또라이라며, 정신 나간 놈이라고 욕을 하는데도 착한 향기는 두 사람이 가엽다고 눈물을 쏟고 앉아 있으니 말입니다. 천사강림! 
지형과 서연의 결혼식은 조촐하게 치뤄졌습니다. 지형 부모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은 생각처럼 우울모드는 아니어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지형과 서연이 너무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의 연기표현이 좀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도 남더군요. 그저 아름다운 화보 한장면을 찍는 장면으로 보여서 말이지요. 지형의 마음도, 서연의 속도 행복만이 아닐텐데, 세상 걱정없는 듯한 신랑신부의 모습이 살짝 괘씸스럽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저만 그랬나 싶네요. 
뭐랄까 주인공들이 주변사람들과 드라마속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감정선의 끊김같은 것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속감정까지 꼭 일일이 표현해야 하느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감정이란 게,  그렇게 흑백으로 선이 그어지는 것은 아닌 듯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서연이 잠깐씩 행복한 순간에 행복한 척 연기를 한다는 나레이션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천일의 약속은 참 희안하게도 주인공 당사자들 보다 중견연기자의 대사 하나하나, 연기가 이 드라마를 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연의 결혼식을 앞두고 잠이 오지 않은 고모가 혼자 소주를 마시며 우는 장면에서는 함께 울었네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니새끼 시집간다고 혼백이 있거든 니새끼 잘 살피라고 넋두리인 듯, 기도인듯 중얼거리며 우는데, 서연의 치매사실을 알면 고모는 아마 열두번도 더 까무라칠 듯합니다.
눈칫밥 먹는 설움 안주려고 딴에는 명희보다 잘해줬지만, 그래도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그 어린 것한테 집안 일을 시켜야 했노라고, 서연남매에 대한 미안함과 딸자식 시집보내는 듯한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고모(오미연)였지요. 
오미연이 소주를 마시며, "이제라도 두다리 뻗고 잘살아라 서연아"하는 대목에서는 서연이 행복해야 할 모든 이유마저 설명이 돼 버렸지요. 향기 눈에 눈물 쏟게 한 서연인데도, 지지리도 복없는 서연이 이제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천일의 약속에 흐르는 사랑을 그야말로 명품연기로 설득시키는 강수정 역의 김해숙은 또 어떻고요. 서연이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강수정에게 전화를 걸자, 강수정은 오히려 서연을 다독였지요. "내 아이의 선택인데 어쩌겠어. 서연이한테 섭섭한 마음 없어"라면서 말이지요.
따지고 들면 지형의 선택을 받아들인 서연이 가장 야속했을텐데도 아들의 선택이었다고, 부담갖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어머니가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해요. 자식의 일에는 이성적일 수가 없는 것이 어머니인데도, 강수정의 이성은 지성을 겸비해 더욱 빛나고 아름답기까지 하지요.
지형에게 당부하는 말을 듣고는, 지형과 함께 울고 말았네요. 축하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며, "그렇지만 너 끝까지 최선을 다해, 지금 마음 그대로 변치말고 그 아이 슬프게 만들지마. 같이 시간 많이 보내주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끝없이 사랑해".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서연도 지형도 힘들어서 안된다며, 지형에게 마음 굳건히 가지라는 말은 숭고하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그건 그렇고 서연과 지형이 마침내 결혼을 해서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는데요, 그 행복했던 웃음도 그들의 짧은 신혼여행만큼이나 짧게 끝나버리는 듯하더군요.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지형과 서연의 결혼생활에서의 갈등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갈등이 아니기에, 더 슬프고 우울함이 덮쳐옵니다.
예고편을 보니 서연에게 큰 문제가 발생한듯 보이더군요.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서연의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듯한데, 서연은 약 부작용이라고 하고, 지형이 약때문이라고 화를 내는 모습도 나왔지요. 신혼여행에 가서는 서연이 화장실에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나오는 모습도 보였고요.
그래서 추측컨데 서연이 구토증상을 일으켰던 것은 아닌가 싶고, 서연이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약을 먹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지형이 서연이 깜빡증이 심해져가는 이유를 서연이 약을 먹지 않은 고집때문이라고 화를 내는 장면이었다면, 앞뒤가 맞는 추측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서연이 알츠하이머이고 계속해서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임신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만약 서연이 임신을 할 수도 있다면, 정말 머리가 무거워지네요. 아이를 위해서 서연이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지형은 그런 서연을 극구 말리려고 할테고, 어느 생명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까지 연결될 듯해서 말입니다. 만약 이런 설정이 들어있다면 김수현 작가, 사람 피를 말리실 작정을 한 모양이에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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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2 Comment 21
2011.11.16 11:01




서연이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강수정(김해숙), 복잡한 심경에 지형의 친구 알렉스를 찾아가지만, 지형의 완고한 의지만을 확인했을 뿐이지요. 서연이 마음에 들면서도 알츠하이머임을 알고는, 아들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지요. 그러나 너무도 미안해 하는 마음이 전해져서 서연도, 시청자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안그러겠어요. 백이면 백 모두 강수정과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제 마음이 어머님 마음과 같습니다", 서연이 지형을 놓으려고 하는 마음 역시 누구나 같았을 거고요.
서연과 헤어지기 전 손 한번 잡아보면 안되겠냐고 손을 내미는 강수정,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리고 기운내라는 말을, 힘내라는 말을 그렇게 체온으로 전달해 주는 강수정이었지요. '그 사람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저에게 일년만 허락해 주십시오',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는 서연의 방백이 어찌나 가슴을 아프게 하던지요. 이렇게 따뜻한 어머니기에, 그렇게 훌륭한 어머니라면 눈물로 청하면 허락해 주실 것같아, 서연은 잠시 욕심을 부려보고 싶었던 자신을 단도리합니다. 그 사람에게 못할 짓임을 알기에, 그 사람에게 얼마나 버거운 짐이 될 것임을 알기에, 하마터면 지형을 발목잡을 뻔했다고, 스스로를 다잡는 서연이었지요.
싱가폴에 다녀 온 오현아(이미숙)를 보러 향기네 집에 들른 강수정은, 지형에게 딴 여자있었던 것 아니냐고 묻는 말에 당황하지만, 전부터 그런 마음이었나 보더라고 말을 얼버무리지요. 향기에게도 서연을 만났다는 말을 해주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형의 오피스텔로 달려온 강수정은 지형에게 눈물로 안된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지만, 지형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너무나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반듯한 아이, 지형은 수정의 자랑거리였고, 자부심이었고, 목숨같은 아이였습니다. 돈이 부럽지 않았던 아이였지요. 향기가 심성이 곱고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병원 이사장의 딸이라고 해도, 친구 딸이라고 해도 지형과 향기를 맺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형이 향기에게 잘해줬던 것이 향기가 부잣집딸이어서가 아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강수정입니다. 그래서 지형이 서연을 사랑하는 것이 단순한 관심이나 연민이 아님 또한 잘 아는 강수정이지요. 
 진지하고 진중한 아들, 속 한번 썩히지 않았던 지형이 사랑을 택하겠다고, 그것도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서연을 택하겠다고 하니, 지형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것을 더 잘 아는 강수정입니다. 그럼에도 강수정은 엄마로서 아들이 험한 길을 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을 때만 사랑은 사랑 아닌 것 알아. 평생 아픈 남편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세상엔 많아. 그런 것 보면서 난 늘 감탄하고 감동해. 그런데 내 아들이 이리 되니까 그럴 수 없어. 너한테 그아이가 그토록 소중한 것만큼 나도 네가 그래. 나 못해".
지형의 대답은 확고부동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래도 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 지형을 보는 강수정은 억장이 무너지지요. 지형도 울고 수정도 울고, 서로 자신의 사랑을 이해해 달라고 우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던지요. 자식의 앞날이 험난 한 것을 못겠다는 엄마의 사랑을 이해해 달라고 하고, 자식은 감히 엄마보다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그러니 그 사랑을 이해해 달라고 용서를 구하고....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이 있지만, 저는 강수정의 모성을 그런 것에 견주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강수정은 지형의 편이 돼주겠지만, 그것을 지형에게 졌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사랑에 대한 이해라고 보고 싶습니다. 아들을 떠나 한 남자로서 책임감있는 모습, 자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는 아름다운 사람 중 한사람이 자신의 아들 지형이라고, 그 사랑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지형의 오피스텔을 다녀와서도 강수정은 지형을 설득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요. 절대로 안된다고 으름장을 놔보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지형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일 뿐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 강수정에게 지형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그냥 놔버리라고, 자신을 버리라고 말하는 지형이었지요. "엄마, 저 평생 죄책감 껴안고,  미치게 후회하면서,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살길 바라세요? 그게 사는 걸까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기서 제가 아무 것도 못한채 손들면, 저 그 사람 죽는 날까지 못놔요. 꼭 필요할 때, 반드시 필요할 때 외면하고,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놔버려요...".
지형이 오피스텔에서도 강수정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요. 어머니한테 자신의 병을 드러내면서 까지 자기를 거절한 여자라고, 지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형을 위해서 놔준 거라고...
지형은 자신을 위해서 서연이 필요하다고 말하지요. 사랑하니까 같이 있고 싶고, 사랑하니까 그 사람을 돌봐야 하고, 사랑하니까 원한다고 말이지요. 동정이나 감상, 연민으로 자기의 사랑을 이해하지 말라면서 말이지요. 서연없이는 자신은 허수아비라며 우는 지형.
지형은 정말 허수아비가 되어가는 자신을 경험했습니다. 향기와의 결혼준비를 하면서 넋나간 사람처럼 아무 감정없이 웨딩화보를 찍고 있던 자신을 봐야했고, 하루종일 멍하니 서연이만 생각하는 자신을 봐야 했습니다. 그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냥 그렇게 허수아비처럼 사는 것이 서연을 책임지지 못한 죄값이라고 생각했던 지형이었지요. 그런데 서연이 정말로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형은 그제서야 얼마나 서연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지요.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보든 안보든 사랑하는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이지요. 장재민도 같은 말을 했지요. "보거나 못보거나 넌 이미 그 자식 심장에 들어가 있어. 보거나 못보거나 같을 거야". 그런 재민에게 서연은 "오빠 바보"라며 "그건 안같아"라고 합니다. 정답입니다. 어떻게 보는 것과 안보는 것이 같겠어요. 같이 있으면서 보고 만지고 사랑하는 것과 생각만 같이 있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어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살 날이 깨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겠지만, 서연과 지형에게는 허락된 시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죠. 그런 말은 단지 위안삼아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래요. 사랑이 쉬운 사람들에게는 그깟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똥오줌 수발 들어야 하는 치매환자를 결혼한 남편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지려 하는 것이 정상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형이 어떤 감정에 있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아이가 넘어져 무릎팍이 깨져 울고 있는데, 내 일 아니라고 그냥 지나치면 참 찝찝하고 찜찜하고 후회스럽겠지요. 하물며 모르는 아이가 다쳐도 그러할텐데, 사랑한 사람이 아픈데 나몰라라 할 수 있을 강심장이 얼마나 있을까요?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 물론 태산같고 버겁겠지요.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이런 계산이 앞서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아닐까 싶어요. 
그동안 답답하게 혼자 끙끙대던 박지형의 말문이 드디어 터지는 것을 보고는,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김래원의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불만도 상당수 있어왔고, 그 사랑에게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시청자의 원성도 있었지만, 김래원은 10회가 다되도록 이거다 싶은 감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지요. 저는 김래원의 문제이기 보다는 김수현 작가가 의도적으로 박지형을 죽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회가 다되도록 거의 핀트가 수애에게 맞춰져 있었고, 대사량도 엄청났지요. 이서연에게 진행되고 있는 알츠하이머와 병증에 대한 소개가 길다보니, 이서연의 분량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천일의 약속 10회는 드라마 전반부가 끝나고 후반부의 이야기 사랑이라는 주제로 넘어가는 교차점이었습니다. 전반부가 이서연의 병과 지지리도 복없는 과거와 가난, 그리고 태산을 찌르는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후반부는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곁을 지키는 박지형이라는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겠지요. 또한 서연의 생모인 듯한 여인이 등장한 것도 주목해야 겠지요. 서연이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해가는지도 중요한 줄거리가 될 듯합니다.
전환점이 되는 10회에 와서는 지형이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집을 부리고, 울며 어머니에게 매달려 이해를 구하는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묵묵하게 지형의 고뇌를 김래원이 자신의 방식으로 전달을 해왔지만, 답답했던 것은 사실이죠. 격앙된 감정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절절하게 감정을 내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어두운 방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으로 지형의 감정을 표현해 왔지요. 물론 김수현 작가가 김래원에게 지나치게 인색한 점도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대사는 단답형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감정선이 연결되는 부분은 고작 서연의 말을 생각하는 장면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김래원이 박지형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해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박지형은 강수정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크면서 부모 속 한 번도 썩히지 않은 아이입니다. 부모 말에 순응하고, 지극히 모범적인 인물이죠.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자 한 마디 대꾸도 안하고 묵묵히 가방을 싸서 나올 정도로, 부모나 어른들 앞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반항하는 인물도 아니었지요. 비록 사랑하는 서연이를 택하겠다고 결혼 이틀 전까지 미적거리다 결혼을 깬 우유부단한 나쁜놈이 되어야 했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성격마저 훼까닥 바뀔 수는 없는 인물이지요. 그런 모습이 지형의 캐릭터를 답답하게도 보이게 했지만, 몸에 배인 태도나 성격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사랑을 말이나 감정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오히려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래원은 박지형이라는 캐릭터의 성격만큼이나 그의 사랑도 감정을 폭발해 내는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았지요. 박지형의 사랑을 가장 잘 이해시킨 장면이 있었어요. 강수정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가장 절박하고 간절하게 감정을 담았던 장면을, 강수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손에 얼굴을 묻고 애절하게 바라보던 것을 꼽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병을 드러내면서 까지 저를 거절해요, 저를 위해서요. 그런데 전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서 그 사람을 원해요. 그 사람없이, 전 허수아비에요". 자기가 편하자고 그 여자를 원한다고, 그 여자 없이는 자기가 안된다고 허락을 구하며, 지형이 "어머니, 엄마..."라며, 어린아이처럼 강수정을 바라보던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신이 모든 사람에게 갈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마치 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기도하는 모습처럼, 어머니에게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간절하고, 절박하게 간구하는 모습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왜 그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지, 얼마나 원하는 지를 '엄마'라는 말에 모든 것을 담아 전해주더군요. 
김해숙과 호흡을 맞추는 김래원의 연기는 진중해서 좋았습니다. 극중 박지형이라는 인물의 감정을 과하지 않게 표현했고, 그래서 오히려 저는 더 믿음이 가더군요. 김래원은 박지형의 캐릭터에 멋을 내지 않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습니다. 소위 개멋부리는 것도 없습니다. 
드라마 속 박지형의 사랑은 기교가 없기 때문이에요. 박지형이라는 인물의 가볍지 않은 성격만큼이나, 그 사랑에 솔직하고 진지하고 진심인 것이 지형이 하는 사랑입니다. 물론 향기는 두고두고 지형에게는 미안한 사람으로 남겠지만, 지형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서연을 택한 이유도 그의 사랑이 진중해서 입니다. 계산이 아니라 심장이 움직이는 사랑, 이성이 아니라 가슴이 움직이는 사랑, 울렁이고 두근거리고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체온같은 사랑....심장이 멎어야만 끝나는 사랑, 체온이 식어야만 멈출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서연을 향한 지형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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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5 07:38




서연은 지형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납니다. 알츠하이머라는 것을 알고 결혼식을 깨버리고 함께 곁에 있겠다는 남자, 그 바보같은 남자의 사랑이 한없이 고맙고, 그래서 더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그를 밀어내야 하는 신파극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이 행복하고 슬픈 서연입니다.
"결혼하자"는 지형의 프로포즈, 수백번도 상상해 봤던 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수천번도 더 대답을 준비해 봤던 서연이었지요. "싫어", "까짓 것 하자". 천사와 악마가 서연을 하루에도 수천번씩 서연의 속에서 싸웠고, 힘들게 그 사람을 내려놨지만, 결혼을 깼다는 말에 서연도 흔들렸습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운명이라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운명적이 사랑이라고 모른 척 받아들였을 지도 모릅니다. 지형이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참을 수 없기에, 빈껍데기가 되어가는 자신을 짐짝처럼 지형에게 맡기기 싫어서, 서연은 그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애써 붙잡고 있었지요.
"다른 사람한테 허락된 몇십년이 우린 안된대. 그러니까 빨리 합쳐 하루하루를 천금같이 쓰자". 지형의 진심을,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서연은 모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서연이 마음이 그러하니까요. 하루만이라도 내 사람으로 마음껏 사랑하고 죽어버린다고 해도 서연은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형이 자신의 삶을 저당잡히고 늪에 빠져 망가지는 것은 죽어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서연입니다. 바보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서연이기에, 점점 심해지는 치매증세에 동생 문권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처럼, 그 사람도 그렇게 매시간을 매순간을 애타게 지켜봐야 할 것임을 알 것같기에, 서연은 지형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이것으로 됐어. 고마워. 행복해. 당신을 기억하는 날까지 행복해 할게. 날 버려, 그리고 잊어. 하늘도 이해할 거야". 
서연에게 시간이란 조금씩 조금씩 보이지 않게 갉아먹는 낡은 옷장 속 좀벌레와 같습니다. 지형의 프로포즈를 받고 흔들리고 싶은 마음을 잠재우고 싶어 와인을 찾으며 화를 내는 서연, 술을 잔뜩 마시고 일어나면 그냥 갑작스런 쓰나미가 일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 아무 것도 기억못한 채로 눈을 뜨고 싶은 서연이었지요. 지형도 잊어버리고, 결혼하자는 그의 말에 슬픔도 기쁨도 기대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그를 놓아주고 싶은 서연입니다. 
서연의 머리를 갉아먹고 있는 알츠하이머란 놈은 고모부의 티눈과도 같이 자라나기만 합니다. 고모부의 티눈이 한없이 부러운 서연이었을 겁니다. 파내버리면 그만인 티눈, 그러나 서연의 머리를 파먹고 자라고 있는 망각이라는 병은 잘라낼 수가 없는 티눈입니다. 머리를 갈라 뇌세포를 갉아먹고 있는 티눈을 빼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병원으로 향하는 고모부를 바라보는 서연의 텅빈 눈이 그런 바람을 표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연의 머리에서 커지고 있는 것이 고모부의 발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티눈과 같은 것이라면, 파내버리기만 하면 그만인 티눈같은 그런 가시라면 얼마나 좋을까....그런 간절함....
서연을 만나러 온 지형엄마 강수정(김해숙), 임신한 것 아니냐고 묻는 지형엄마의 말에 서연은 힘들게 고백합니다. "그 사람이 어머니 설득하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사람 고집 말도 안되는 것이에요. 저 그럴 수 없습니다.....저 알츠하이머 환자에요. 어머님". 차주전자를 잡은 서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알츠하이머라는 말에 할말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강수정, 순간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있는 듯한 김해숙의 표정을 보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감탄스럽더군요. 아들 지형을 생각해서라면 분노했어야 했고, 인간 이서연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난감함과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보고는 역시 김해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간이란 동물이 워낙 감정이 복잡해서 사실 하나의 표정에도 많은 감정들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연기자에게서는 스토리나 극본 속 지문에 따라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설정에 의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김해숙의 표정에서는 극본 속에 있을 법한 지문도, 연기자로서의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냥 어머니의 표정이랄까, 사람의 표정이랄까, 아무튼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중년의 김해숙, 그녀에게는 시청자를 끄는 힘이 있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와 설득력있는 눈빛으로도 대사 이상의 감정을 전달해낸다는 점이지요. 평범한 대사도 김해숙이라는 배우에게서 나오면 힘을 가지고, 마음을 흔들고, 감성을 일깨우고, 마치 언제나 옳은 말을 해주는 어머니를 느끼게 합니다.
김수현작가의 전작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자 아들을 그녀의 가슴으로 품는 모습으로 눈시울을 적셨지요. 몸으로 낳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 품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으로 자식을 낳는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천일의 사랑에서는 아들 박지형이 향기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고백에, 그 아들의 사랑을 엄마이기에 앞서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려는 모습을 보여줬지요. 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우아하고 교양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서연의 말대로 부러운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드라마속 강수정이라는 인물처럼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품성, 인격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초라함 같은 것 말입니다. 

향기를 버린 아들 지형에게 "향기한테 이게 무슨 못할 짓이야. 향기는 너밖에 없는데, 향기 전부는 넌데, 그 죄를 어떻게 다 받을려고 그래. 마음 찢어놓은 상처는 눈에 안보인다고 죄 아닌 줄 알아?"라는 대사는 나쁜 놈이라고 소리지르고, 따귀를 때리고, 흥분하는 것보다 훨씬 아프고 무게있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향기에 대한 연민, 미안함, 아들에 대한 야속함, 인간적인 실망감을 이처럼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형의 십자가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이서연이 아니라, 착한 노향기를 버린 죄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더 무거울 겁니다. 아들이 평생을 업보처럼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을 그렇게 잔인한 말로 해야 하는 강수정(김해숙), 내 자식보다는 남의 자식 아픔을 더 고통스러워 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자식의 일이기에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자식의 모든 일에 덤덤하게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기 어려운 입장이 부모일 겁니다.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품위있는 강수정 역시 마찬가지지요. 아들을 내쳐 버리는 남편이 야속하고, 말없이 짐을 싸서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강수정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향기와 향기부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들의 사랑을 혼자서라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결혼식을 깨버리자 마자 서연과 결혼을 하겠다는 지형의 결정에 강수정은 실망이 크고, 절대로 안된다고 못을 박지요. 시간을 조금 번 다음에 결혼을 하든, 아버지를 설득을 시키든 하자는 것이었지요. 시간이 아깝다는 지형의 말에 서연이 임신을 했다고 오해하는 강수정은 서연을 만나 임신여부를 확인하지요. 지금 당장 결혼식을 하는 것이 무리라는 말을 하려던 강수정은 차라리 듣지않았으면 좋을 말을 듣게 되지요. "저 알츠하이머 환자에요". 
천일의 사랑은 지형과 서연, 그리고 지형을 해바라기하는 노향기의 사랑만큼이나 무게감있는 사랑이 있죠. 바로 강수정이 보여주고 있는 자식을 소유물이 아니라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대하고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지형이 향기를 버리고 이서연을 택하겠다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아버지에게 내쫓기던 날, 말없이 지형을 안아주고 볼을 쓰다듬어 주던 김해숙, 그 장면 하나로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전달해 주었던지, 서연을 두고 고민하는 김래원보다 그들의 사랑을 이해시켰던 장면이었어요. 김해숙의 표정에는 어머니가 있었고, 너무도 성숙한 인간미가 있었고, 따스함이 있었지요.
이서연으로부터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말을 듣는 김해숙의 표정에도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들어있어서, 지형의 어머니인지, 서연의 어머니인지, 그저 잘아는 중년의 사모님이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 여자의 아픔을 듣고 있는지 조차 구분이 안가는 그런 모습이었죠.
향기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서연에 대한 사랑을 속이고 싶지않음이었고, 서둘러 결혼을 하려는 이유가 이서연의 알츠하이머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 강수정, 아무리 아들 지형의 사랑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려고 해도, 아들이 시한부 인생을, 그것도 망각의 병을 앓고 죽어가는 여자를 지키겠다는 것에 찬성을 해줄 부모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극중 강수정이라는 캐릭터를 보니, 누구보다 서연과 함께 아파해 주고, 보듬어 주고 싶어할 것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김래원보다 더 이서연을 사랑할 것 같은 그런 느낌말입니다. 그 사랑의 색깔은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드라마지만, 드라마보다 깊이있는 사랑을 보여줄 것같은 어머니 김해숙,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이런 감정을 부담없이 전달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겠지요. 대사가 전달하려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고, 위로해 주고, 따뜻하게 하는 능력말입니다. 김해숙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참 좋은 연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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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1 Comment 19
2011.11.09 11:22




사실 8회는 중간중간 울컥 눈물도는 장면이 많아 지난 회들보다 더 우울하고 드라마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지만, 드라마 몰입도는 지금까지중 최고였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길게 침묵하고 있었네요. 눈물도 찔금찔금 흘려가면서요.

결국 결혼을 깨버린 지형, 서연이 눈물로 부탁하고 사정했어도 한 번 굳힌 지형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제발 집에 들어가 잘못했습니다 해. 내 마지막 부탁 소원으로 생각해 줘". 서연은 지형의 십자가가 될 수 없다며, 제발 모르는 척 해달라고 하지요. 망가져 가는 걸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을 이해해 달라면서 말이지요. "내가 자기까지 망쳐먹지 않았다는 위안은 갖고 있다 바보되게 해 줘". 엉엉 우는 서연과 지형과 함께 얼마나 울었던지...
지형에게 전화를 건 서연은 결국 화도 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버렸지요. "당신 마음을 보석이고 내마음은 똥이니? 내 문제만으로도 내 머리가 뭉개지려 하는데 나한테 당신 짐까지 짊어지라고!! 돌대가리, 깡통....". 지형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알았기에 서연도 힘을 풀어버리지요.
심해지는 증상, 늘 다니던 길이 생소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그 사람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할까 싶게 서연의 머리는 까맣게 기억들이 지워져 가고 있지요. 너무 급작스럽게 서연의 증세가 심해져서, 치매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심각한 병이라는 것에 뒷머리가 쭈뼛 서더군요. 뒤따라 온 재민의 품에 안겨, 무섭다고 엉엉 우는 서연을 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름과 주소를 적어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고, 집 주변을 사진으로 찍어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처해 가는 서연의 모습은 또 어땠고요.

수애의 3단분노, 소름끼치게 와닿은 '무서움'
길을 잃었다는 말을 전해들듣고 약을 먹자는 문권에게 나만큼 절박하냐고, 나만큼 절망스럽냐고, 나만큼 무섭냐고 불같이 화를 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이 장면은 그간 수애의 연기중 최고로 꼽고 싶은 장면이었습니다. 수애의 3단분노의 절정이었죠, 나만큼 무섭냐는 표정이 얼마나 슬프면서 소름끼치게 와닿던지, 순간 멍해졌습니다. 무서움....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든 세상과의 관계들이 단절돼 간다는 것, 무서움이라는 단어가 피부세포를 뚫고 전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공포라는 단어보다 무섭다라는 단어는 수애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3단분노 연기력때문에 더 소름끼치게 전달되었고요.
말라 비틀어가는 뇌세포처럼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향해 서연은 힘없이 말해봅니다. '당황하지마, 당황하면 바보짓 더할 거야. 아마 그럴 거야. 내가 맞을 거야'. 처음에는 내가 맞을 거야하는 수애의 방백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다음날 병원에 가서 재검을 하는 서연을 보고는, 그 말의 의미를 알겠더군요. 서연은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그렇게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에 주문을 걸며 부정하고 싶었던 거예요. 처음에는 엿먹어라 알츠하이머, 라며 거세게 반항했지만, 한줄기 빛처럼 아니라는 희망 한가닥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게지요.
재검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자 정신이 멍한 사람처럼 "네, 네" 대답만 하는 서연, 한줄기 빛, 희망따위는 없었습니다. 오진이었다는 한가닥 희망이 절망으로 확인되는 순간, 그녀는 말하지요. "나는 날마다 조금씩 바보가 되어가는 치매환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천일의 약속은 첫방송부터 지난 7회까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 있을지, 아닐 지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드라마 분위기가 너무나 우울하고 무거워서 말이지요. 캐릭터들이 사랑스럽지도 않고, 사랑하기에는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들 때문에 무조건 애정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박지형의 우유부단함에 두 여자가 상처를 받아야 했고, 이서연의 이기적인 사랑이 알츠하이머라는 이유로 용서되기는 어려웠고, 바보같은 해바라기 사랑을 하는 노향기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캐릭터들이었죠.
그런데 8회 그 캐릭터들이 통속 멜로극을 파괴하는, 얼마나 순도깊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화들짝 놀라, 그동안 드라마를 이리 건성으로 보고 있었나 반성하게 하더군요. 이서연과 박지형, 그리고 노향기가 사랑하는 방식이 통속을 깨버린 순도 100%의 명품사랑임을 확인하고는, 혼자 눈물을 펑펑 흘리고 가슴을 퍽퍽 치고 앉아 있게 하더군요. 
김수현, 그녀는 역시 대단한 작가입니다. 김수현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김수현은 언어의 연금술사, 감성을 일깨우는 최고의 마법사입니다. 그녀처럼 인간의 심리를 다양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섬세하고 예리하게 집어내는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준 캐릭터가 착한 대명사로 불리는 노향기(정유미)와 나쁜 남자 박지형입니다.

노향기의 사랑, 통속과 명품을 가르는 보석
드라마에서는 박지형에게 상처를 받아 시청자들로부터 전폭적인 동정과 연민을 받는 캐릭터지만, 노향기는 드라마 속 사랑에 실패한 비운의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제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명품보석같은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보석은 드라마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하더군요.
그간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향기같은 사랑은 없다는 듯이 성품, 성격을 못된 애로 순식간에 바꿔버리고, 시청자는 서브주인공=악역, 혹은 악녀라는 공식을 너무나 당연하게 대입시켜 왔지요. 통속적인 드라마의 삼각관계의 틀에서 노향기라는 캐릭터를 재단하려 들었기에, 천일의 사랑 속 삼각관계는 편한 마음으로 볼 수없는 특이한 관계였습니다. 
천방지축 부잣집딸이고,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자 복수를 하려들고, 이서연에 대한 갖은 모함과 음모를 만들고, 치매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지형의 부모님을 흔들려 했다면, 쉽게 지형과 서연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었겠지요. 향기의 캐릭터도 통속극 속의 캐릭터로 머물렀을 것이고요. 그러나 김수현 작가는 노향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라마에서 공식처럼 보여진 통속을 깬 파격을 단행했습니다. 처음 그 파격에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했지요. 미움을 받아야 할 서브여주인공이 실은 가장 불쌍하고, 착한 비련의 캐릭터가 되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8회를 보면서 그동안 답답함에 관심을 주지 않았던 노향기를 보니, 이런 아차 싶더군요. 노향기라는 캐릭터가 어쩌면 현실에서는 더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진심으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왔고, 사랑한다면, 결혼을 취소했다고 약혼자를 찾아가 울며불며 멱살을 잡을 여자는 드물 것이고, 아마 향기처럼 자기가 부족하고 모자라서였다고, 자신을 책망하는 여자가 더 많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그리고 작가에게 놀란 부분이 노향기의 절망감을 표현한 장면이었습니다. 지난회 강수정(김해숙)과의 전화통화에서 서연의 존재를 강수정도 알고 있는 것에, 향기는 "아줌마에게 까지 말했다면, 저는 가망이 없네요"라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던 장면입니다. 노향기는 결혼이 취소된 것보다, 지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보다, 지형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향기는 지형에 대한 배신감으로 연결을 시키지 않습니다. 계속 사랑해도 안될 것같은 불가능에 대한 절망감이 향기를 힘들게 합니다. 사랑이 진행중인 사람의 심리를 얼마나 섬세하게 풀어냈는지 놀랍습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적인 통속을 깨는 것들이 이런 점들이죠. 향기의 엄마 오현아(이미숙)처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바보 등신같겠지만, 당사자는 향기같은 반응을 하지않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고도, 끝내 결혼식이 무산되었어도, 여전히 노향기는 착하고 지고지순합니다. 도끼눈 한 번을 뜨지 않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준비했던 신혼여행 가방에서 잠옷을 꺼내들고, 지형의 마지막 문제 메시지를 보며 눈물을 뚝 흘리면서도, 지형의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오빠가 전화를 받아줘서 기쁘고 고맙다고" 말하는 바보, 그러나 이것이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의 감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아프게 느끼게 합니다.
시청자는 제 3자의 눈으로 노향기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런 노향기가 바보같고, 박지형 정말 나쁜 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하지만, 정말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노향기의 감정이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되었을 거예요.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줘서가 아니라,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사랑예찬론자들의 수많은 명언들이 그냥 글자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향기, 박지형의 사랑을 통해 다시 읽게 됩니다. 김수현 작가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이 얼마나 현실에 바탕이 되어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이죠.

노향기-박지형, 사랑을 묻는다
노향기가 이서연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속은 뭉그러지게 아프면서도 일찍 오빠를 놔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인간들의 기본적인 정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 그런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심리 말입니다. 김수현 작가의 섬세한 예리함이 바로 이런 것들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법하게 그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해줍니다.

향기의 감정은 외사랑이었든, 짝사랑이었든 배신에도 분노하지 못하는 한 길 순애보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했기에 배신당한 향기의 처지를 단순하게 '불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게 합니다. 향기의 지형을 향한 사랑은 이러저러한 상황이 되었으니, 무 자르듯이 싹둑 잘라내지는 가벼움이 아니지요. 배신에 쉽게 마음을 접어버리고, 도끼눈을 뜨고 복수하겠다거나, 철저히 '개무시 잊어주겠어' 한다면, 그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물론 증오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말을 하지만, 향기의 사랑색깔은 너무 투명하고 수정처럼 맑아서 증오하는 것이 더 힘든 아이입니다. 지형을 감싸고 그리워 하는 향기는 여전히 지형을 사랑하고 있고, 작가는 이것 역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집안이고, 착한 향기고 다 버리고 서연에게 가는 박지형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말이지요. 박지형의 사랑방식은 이전 글(김래원, 두 여자를 농락한 나쁜남자라고?)에서 한 번 정리를 했기에, 여기서는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악조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쁜 놈이 되어도, 자신이 사랑한 한 여자를 택하는 박지형의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응원하겠다고 했는데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치매라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여자를 지켜주겠다고 할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그 사랑이 숨막히게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의 색깔이었죠, 희생, 동정, 연민, 책임 등등 그 모든 것을 다 적용해도 이서연에 대한 사랑을 퇴색시키지는 못하는....
치매를 앓는 서연을 향한 지형의 지독한 순애보, 그런 지형을 사랑하는 바보같은 향기의 순애보, 과연 지형과 향기의 사랑에 돌을 던지거나, 불쌍하다거나 바보같다고 그만두라고 말릴 수 있을까요? 박지형의 사랑도, 노향기의 사랑도, 사랑이 쉬운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은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정혼자를 두고 다른 여자랑 시한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 여자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여자를 택한 남자, 결혼 이틀전에 파혼당하고 심지어 1년간 다른 여자를 만나왔다는 남자를 미워하지 못하고 계속 사랑하는 여자가 묻습니다. 멈추란다고 멈춰지고, 그만 두란다고 그만 둬지는 것이 사랑이냐고 말이지요. 절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늪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사랑이라고, 미워하고 증오해야 하는데 미련하게 더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사랑이라고 말이지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통속적 캐릭터를 깬 노향기로 인해 지형과 서연의 사랑을 노작가의 객기 쯤으로 치부하는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저는 향기도 지형도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손바닥 뒤집기 처럼 쉬운 것이 사랑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사랑을 정의하는 말들 중 가장 많이 들어온 것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박지형과 노향기의 사랑이 그러하죠. 향기를 몸도 마음도 지형에게 다 주고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라고 동정하지만, 노향기는 그것에 대한 상처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지형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함에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너무나 오랜시간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랑때문에 힘들어 하지요. 내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 너무 사랑하기에 아깝지 않은 사랑, 박지형과 노향기를 보며 김수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가벼운 감기몸살쯤으로 그려지는 사랑에 대해, 이런 사랑도 있노라고, 그래서 사랑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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