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환'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11.11.16 '천일의 약속' 말문 트인 김래원, 마침내 사랑을 말하다 (10)
  2. 2011.11.15 '천일의 약속' 김해숙, 시청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배우 (19)
  3. 2011.11.09 '천일의 약속' 노향기의 사랑, 통속과 명품을 가른 보석 (6)
  4. 2011.11.02 '천일의 약속' 김래원, 두 여자 농락한 나쁜남자라고? (12)
  5. 2011.11.01 '천일의 약속' 수애, 시청자 울린 한마디 "아직 아냐" (8)
2011.11.16 11:01




서연이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강수정(김해숙), 복잡한 심경에 지형의 친구 알렉스를 찾아가지만, 지형의 완고한 의지만을 확인했을 뿐이지요. 서연이 마음에 들면서도 알츠하이머임을 알고는, 아들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지요. 그러나 너무도 미안해 하는 마음이 전해져서 서연도, 시청자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안그러겠어요. 백이면 백 모두 강수정과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제 마음이 어머님 마음과 같습니다", 서연이 지형을 놓으려고 하는 마음 역시 누구나 같았을 거고요.
서연과 헤어지기 전 손 한번 잡아보면 안되겠냐고 손을 내미는 강수정,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리고 기운내라는 말을, 힘내라는 말을 그렇게 체온으로 전달해 주는 강수정이었지요. '그 사람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저에게 일년만 허락해 주십시오',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는 서연의 방백이 어찌나 가슴을 아프게 하던지요. 이렇게 따뜻한 어머니기에, 그렇게 훌륭한 어머니라면 눈물로 청하면 허락해 주실 것같아, 서연은 잠시 욕심을 부려보고 싶었던 자신을 단도리합니다. 그 사람에게 못할 짓임을 알기에, 그 사람에게 얼마나 버거운 짐이 될 것임을 알기에, 하마터면 지형을 발목잡을 뻔했다고, 스스로를 다잡는 서연이었지요.
싱가폴에 다녀 온 오현아(이미숙)를 보러 향기네 집에 들른 강수정은, 지형에게 딴 여자있었던 것 아니냐고 묻는 말에 당황하지만, 전부터 그런 마음이었나 보더라고 말을 얼버무리지요. 향기에게도 서연을 만났다는 말을 해주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형의 오피스텔로 달려온 강수정은 지형에게 눈물로 안된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지만, 지형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너무나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반듯한 아이, 지형은 수정의 자랑거리였고, 자부심이었고, 목숨같은 아이였습니다. 돈이 부럽지 않았던 아이였지요. 향기가 심성이 곱고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병원 이사장의 딸이라고 해도, 친구 딸이라고 해도 지형과 향기를 맺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형이 향기에게 잘해줬던 것이 향기가 부잣집딸이어서가 아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강수정입니다. 그래서 지형이 서연을 사랑하는 것이 단순한 관심이나 연민이 아님 또한 잘 아는 강수정이지요. 
 진지하고 진중한 아들, 속 한번 썩히지 않았던 지형이 사랑을 택하겠다고, 그것도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서연을 택하겠다고 하니, 지형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것을 더 잘 아는 강수정입니다. 그럼에도 강수정은 엄마로서 아들이 험한 길을 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을 때만 사랑은 사랑 아닌 것 알아. 평생 아픈 남편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세상엔 많아. 그런 것 보면서 난 늘 감탄하고 감동해. 그런데 내 아들이 이리 되니까 그럴 수 없어. 너한테 그아이가 그토록 소중한 것만큼 나도 네가 그래. 나 못해".
지형의 대답은 확고부동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래도 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 지형을 보는 강수정은 억장이 무너지지요. 지형도 울고 수정도 울고, 서로 자신의 사랑을 이해해 달라고 우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던지요. 자식의 앞날이 험난 한 것을 못겠다는 엄마의 사랑을 이해해 달라고 하고, 자식은 감히 엄마보다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그러니 그 사랑을 이해해 달라고 용서를 구하고....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이 있지만, 저는 강수정의 모성을 그런 것에 견주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강수정은 지형의 편이 돼주겠지만, 그것을 지형에게 졌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사랑에 대한 이해라고 보고 싶습니다. 아들을 떠나 한 남자로서 책임감있는 모습, 자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는 아름다운 사람 중 한사람이 자신의 아들 지형이라고, 그 사랑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지형의 오피스텔을 다녀와서도 강수정은 지형을 설득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요. 절대로 안된다고 으름장을 놔보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지형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일 뿐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 강수정에게 지형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그냥 놔버리라고, 자신을 버리라고 말하는 지형이었지요. "엄마, 저 평생 죄책감 껴안고,  미치게 후회하면서,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살길 바라세요? 그게 사는 걸까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기서 제가 아무 것도 못한채 손들면, 저 그 사람 죽는 날까지 못놔요. 꼭 필요할 때, 반드시 필요할 때 외면하고,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놔버려요...".
지형이 오피스텔에서도 강수정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요. 어머니한테 자신의 병을 드러내면서 까지 자기를 거절한 여자라고, 지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형을 위해서 놔준 거라고...
지형은 자신을 위해서 서연이 필요하다고 말하지요. 사랑하니까 같이 있고 싶고, 사랑하니까 그 사람을 돌봐야 하고, 사랑하니까 원한다고 말이지요. 동정이나 감상, 연민으로 자기의 사랑을 이해하지 말라면서 말이지요. 서연없이는 자신은 허수아비라며 우는 지형.
지형은 정말 허수아비가 되어가는 자신을 경험했습니다. 향기와의 결혼준비를 하면서 넋나간 사람처럼 아무 감정없이 웨딩화보를 찍고 있던 자신을 봐야했고, 하루종일 멍하니 서연이만 생각하는 자신을 봐야 했습니다. 그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냥 그렇게 허수아비처럼 사는 것이 서연을 책임지지 못한 죄값이라고 생각했던 지형이었지요. 그런데 서연이 정말로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형은 그제서야 얼마나 서연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지요.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보든 안보든 사랑하는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이지요. 장재민도 같은 말을 했지요. "보거나 못보거나 넌 이미 그 자식 심장에 들어가 있어. 보거나 못보거나 같을 거야". 그런 재민에게 서연은 "오빠 바보"라며 "그건 안같아"라고 합니다. 정답입니다. 어떻게 보는 것과 안보는 것이 같겠어요. 같이 있으면서 보고 만지고 사랑하는 것과 생각만 같이 있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어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살 날이 깨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겠지만, 서연과 지형에게는 허락된 시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죠. 그런 말은 단지 위안삼아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래요. 사랑이 쉬운 사람들에게는 그깟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똥오줌 수발 들어야 하는 치매환자를 결혼한 남편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지려 하는 것이 정상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형이 어떤 감정에 있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아이가 넘어져 무릎팍이 깨져 울고 있는데, 내 일 아니라고 그냥 지나치면 참 찝찝하고 찜찜하고 후회스럽겠지요. 하물며 모르는 아이가 다쳐도 그러할텐데, 사랑한 사람이 아픈데 나몰라라 할 수 있을 강심장이 얼마나 있을까요?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 물론 태산같고 버겁겠지요.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이런 계산이 앞서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아닐까 싶어요. 
그동안 답답하게 혼자 끙끙대던 박지형의 말문이 드디어 터지는 것을 보고는,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김래원의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불만도 상당수 있어왔고, 그 사랑에게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시청자의 원성도 있었지만, 김래원은 10회가 다되도록 이거다 싶은 감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지요. 저는 김래원의 문제이기 보다는 김수현 작가가 의도적으로 박지형을 죽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회가 다되도록 거의 핀트가 수애에게 맞춰져 있었고, 대사량도 엄청났지요. 이서연에게 진행되고 있는 알츠하이머와 병증에 대한 소개가 길다보니, 이서연의 분량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천일의 약속 10회는 드라마 전반부가 끝나고 후반부의 이야기 사랑이라는 주제로 넘어가는 교차점이었습니다. 전반부가 이서연의 병과 지지리도 복없는 과거와 가난, 그리고 태산을 찌르는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후반부는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곁을 지키는 박지형이라는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겠지요. 또한 서연의 생모인 듯한 여인이 등장한 것도 주목해야 겠지요. 서연이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해가는지도 중요한 줄거리가 될 듯합니다.
전환점이 되는 10회에 와서는 지형이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집을 부리고, 울며 어머니에게 매달려 이해를 구하는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묵묵하게 지형의 고뇌를 김래원이 자신의 방식으로 전달을 해왔지만, 답답했던 것은 사실이죠. 격앙된 감정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절절하게 감정을 내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어두운 방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으로 지형의 감정을 표현해 왔지요. 물론 김수현 작가가 김래원에게 지나치게 인색한 점도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대사는 단답형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감정선이 연결되는 부분은 고작 서연의 말을 생각하는 장면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김래원이 박지형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해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박지형은 강수정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크면서 부모 속 한 번도 썩히지 않은 아이입니다. 부모 말에 순응하고, 지극히 모범적인 인물이죠.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자 한 마디 대꾸도 안하고 묵묵히 가방을 싸서 나올 정도로, 부모나 어른들 앞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반항하는 인물도 아니었지요. 비록 사랑하는 서연이를 택하겠다고 결혼 이틀 전까지 미적거리다 결혼을 깬 우유부단한 나쁜놈이 되어야 했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성격마저 훼까닥 바뀔 수는 없는 인물이지요. 그런 모습이 지형의 캐릭터를 답답하게도 보이게 했지만, 몸에 배인 태도나 성격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사랑을 말이나 감정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오히려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래원은 박지형이라는 캐릭터의 성격만큼이나 그의 사랑도 감정을 폭발해 내는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았지요. 박지형의 사랑을 가장 잘 이해시킨 장면이 있었어요. 강수정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가장 절박하고 간절하게 감정을 담았던 장면을, 강수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손에 얼굴을 묻고 애절하게 바라보던 것을 꼽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병을 드러내면서 까지 저를 거절해요, 저를 위해서요. 그런데 전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서 그 사람을 원해요. 그 사람없이, 전 허수아비에요". 자기가 편하자고 그 여자를 원한다고, 그 여자 없이는 자기가 안된다고 허락을 구하며, 지형이 "어머니, 엄마..."라며, 어린아이처럼 강수정을 바라보던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신이 모든 사람에게 갈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마치 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기도하는 모습처럼, 어머니에게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간절하고, 절박하게 간구하는 모습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왜 그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지, 얼마나 원하는 지를 '엄마'라는 말에 모든 것을 담아 전해주더군요. 
김해숙과 호흡을 맞추는 김래원의 연기는 진중해서 좋았습니다. 극중 박지형이라는 인물의 감정을 과하지 않게 표현했고, 그래서 오히려 저는 더 믿음이 가더군요. 김래원은 박지형의 캐릭터에 멋을 내지 않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습니다. 소위 개멋부리는 것도 없습니다. 
드라마 속 박지형의 사랑은 기교가 없기 때문이에요. 박지형이라는 인물의 가볍지 않은 성격만큼이나, 그 사랑에 솔직하고 진지하고 진심인 것이 지형이 하는 사랑입니다. 물론 향기는 두고두고 지형에게는 미안한 사람으로 남겠지만, 지형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서연을 택한 이유도 그의 사랑이 진중해서 입니다. 계산이 아니라 심장이 움직이는 사랑, 이성이 아니라 가슴이 움직이는 사랑, 울렁이고 두근거리고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체온같은 사랑....심장이 멎어야만 끝나는 사랑, 체온이 식어야만 멈출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서연을 향한 지형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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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2 Comment 10
2011.11.15 07:38




서연은 지형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납니다. 알츠하이머라는 것을 알고 결혼식을 깨버리고 함께 곁에 있겠다는 남자, 그 바보같은 남자의 사랑이 한없이 고맙고, 그래서 더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그를 밀어내야 하는 신파극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이 행복하고 슬픈 서연입니다.
"결혼하자"는 지형의 프로포즈, 수백번도 상상해 봤던 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수천번도 더 대답을 준비해 봤던 서연이었지요. "싫어", "까짓 것 하자". 천사와 악마가 서연을 하루에도 수천번씩 서연의 속에서 싸웠고, 힘들게 그 사람을 내려놨지만, 결혼을 깼다는 말에 서연도 흔들렸습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운명이라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운명적이 사랑이라고 모른 척 받아들였을 지도 모릅니다. 지형이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참을 수 없기에, 빈껍데기가 되어가는 자신을 짐짝처럼 지형에게 맡기기 싫어서, 서연은 그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애써 붙잡고 있었지요.
"다른 사람한테 허락된 몇십년이 우린 안된대. 그러니까 빨리 합쳐 하루하루를 천금같이 쓰자". 지형의 진심을,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서연은 모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서연이 마음이 그러하니까요. 하루만이라도 내 사람으로 마음껏 사랑하고 죽어버린다고 해도 서연은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형이 자신의 삶을 저당잡히고 늪에 빠져 망가지는 것은 죽어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서연입니다. 바보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서연이기에, 점점 심해지는 치매증세에 동생 문권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처럼, 그 사람도 그렇게 매시간을 매순간을 애타게 지켜봐야 할 것임을 알 것같기에, 서연은 지형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이것으로 됐어. 고마워. 행복해. 당신을 기억하는 날까지 행복해 할게. 날 버려, 그리고 잊어. 하늘도 이해할 거야". 
서연에게 시간이란 조금씩 조금씩 보이지 않게 갉아먹는 낡은 옷장 속 좀벌레와 같습니다. 지형의 프로포즈를 받고 흔들리고 싶은 마음을 잠재우고 싶어 와인을 찾으며 화를 내는 서연, 술을 잔뜩 마시고 일어나면 그냥 갑작스런 쓰나미가 일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 아무 것도 기억못한 채로 눈을 뜨고 싶은 서연이었지요. 지형도 잊어버리고, 결혼하자는 그의 말에 슬픔도 기쁨도 기대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그를 놓아주고 싶은 서연입니다. 
서연의 머리를 갉아먹고 있는 알츠하이머란 놈은 고모부의 티눈과도 같이 자라나기만 합니다. 고모부의 티눈이 한없이 부러운 서연이었을 겁니다. 파내버리면 그만인 티눈, 그러나 서연의 머리를 파먹고 자라고 있는 망각이라는 병은 잘라낼 수가 없는 티눈입니다. 머리를 갈라 뇌세포를 갉아먹고 있는 티눈을 빼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병원으로 향하는 고모부를 바라보는 서연의 텅빈 눈이 그런 바람을 표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연의 머리에서 커지고 있는 것이 고모부의 발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티눈과 같은 것이라면, 파내버리기만 하면 그만인 티눈같은 그런 가시라면 얼마나 좋을까....그런 간절함....
서연을 만나러 온 지형엄마 강수정(김해숙), 임신한 것 아니냐고 묻는 지형엄마의 말에 서연은 힘들게 고백합니다. "그 사람이 어머니 설득하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사람 고집 말도 안되는 것이에요. 저 그럴 수 없습니다.....저 알츠하이머 환자에요. 어머님". 차주전자를 잡은 서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알츠하이머라는 말에 할말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강수정, 순간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있는 듯한 김해숙의 표정을 보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감탄스럽더군요. 아들 지형을 생각해서라면 분노했어야 했고, 인간 이서연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난감함과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보고는 역시 김해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간이란 동물이 워낙 감정이 복잡해서 사실 하나의 표정에도 많은 감정들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연기자에게서는 스토리나 극본 속 지문에 따라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설정에 의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김해숙의 표정에서는 극본 속에 있을 법한 지문도, 연기자로서의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냥 어머니의 표정이랄까, 사람의 표정이랄까, 아무튼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중년의 김해숙, 그녀에게는 시청자를 끄는 힘이 있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와 설득력있는 눈빛으로도 대사 이상의 감정을 전달해낸다는 점이지요. 평범한 대사도 김해숙이라는 배우에게서 나오면 힘을 가지고, 마음을 흔들고, 감성을 일깨우고, 마치 언제나 옳은 말을 해주는 어머니를 느끼게 합니다.
김수현작가의 전작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자 아들을 그녀의 가슴으로 품는 모습으로 눈시울을 적셨지요. 몸으로 낳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 품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으로 자식을 낳는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천일의 사랑에서는 아들 박지형이 향기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고백에, 그 아들의 사랑을 엄마이기에 앞서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려는 모습을 보여줬지요. 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우아하고 교양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서연의 말대로 부러운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드라마속 강수정이라는 인물처럼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품성, 인격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초라함 같은 것 말입니다. 

향기를 버린 아들 지형에게 "향기한테 이게 무슨 못할 짓이야. 향기는 너밖에 없는데, 향기 전부는 넌데, 그 죄를 어떻게 다 받을려고 그래. 마음 찢어놓은 상처는 눈에 안보인다고 죄 아닌 줄 알아?"라는 대사는 나쁜 놈이라고 소리지르고, 따귀를 때리고, 흥분하는 것보다 훨씬 아프고 무게있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향기에 대한 연민, 미안함, 아들에 대한 야속함, 인간적인 실망감을 이처럼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형의 십자가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이서연이 아니라, 착한 노향기를 버린 죄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더 무거울 겁니다. 아들이 평생을 업보처럼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을 그렇게 잔인한 말로 해야 하는 강수정(김해숙), 내 자식보다는 남의 자식 아픔을 더 고통스러워 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자식의 일이기에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자식의 모든 일에 덤덤하게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기 어려운 입장이 부모일 겁니다.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품위있는 강수정 역시 마찬가지지요. 아들을 내쳐 버리는 남편이 야속하고, 말없이 짐을 싸서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강수정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향기와 향기부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들의 사랑을 혼자서라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결혼식을 깨버리자 마자 서연과 결혼을 하겠다는 지형의 결정에 강수정은 실망이 크고, 절대로 안된다고 못을 박지요. 시간을 조금 번 다음에 결혼을 하든, 아버지를 설득을 시키든 하자는 것이었지요. 시간이 아깝다는 지형의 말에 서연이 임신을 했다고 오해하는 강수정은 서연을 만나 임신여부를 확인하지요. 지금 당장 결혼식을 하는 것이 무리라는 말을 하려던 강수정은 차라리 듣지않았으면 좋을 말을 듣게 되지요. "저 알츠하이머 환자에요". 
천일의 사랑은 지형과 서연, 그리고 지형을 해바라기하는 노향기의 사랑만큼이나 무게감있는 사랑이 있죠. 바로 강수정이 보여주고 있는 자식을 소유물이 아니라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대하고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지형이 향기를 버리고 이서연을 택하겠다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아버지에게 내쫓기던 날, 말없이 지형을 안아주고 볼을 쓰다듬어 주던 김해숙, 그 장면 하나로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전달해 주었던지, 서연을 두고 고민하는 김래원보다 그들의 사랑을 이해시켰던 장면이었어요. 김해숙의 표정에는 어머니가 있었고, 너무도 성숙한 인간미가 있었고, 따스함이 있었지요.
이서연으로부터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말을 듣는 김해숙의 표정에도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들어있어서, 지형의 어머니인지, 서연의 어머니인지, 그저 잘아는 중년의 사모님이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 여자의 아픔을 듣고 있는지 조차 구분이 안가는 그런 모습이었죠.
향기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서연에 대한 사랑을 속이고 싶지않음이었고, 서둘러 결혼을 하려는 이유가 이서연의 알츠하이머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 강수정, 아무리 아들 지형의 사랑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려고 해도, 아들이 시한부 인생을, 그것도 망각의 병을 앓고 죽어가는 여자를 지키겠다는 것에 찬성을 해줄 부모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극중 강수정이라는 캐릭터를 보니, 누구보다 서연과 함께 아파해 주고, 보듬어 주고 싶어할 것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김래원보다 더 이서연을 사랑할 것 같은 그런 느낌말입니다. 그 사랑의 색깔은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드라마지만, 드라마보다 깊이있는 사랑을 보여줄 것같은 어머니 김해숙,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이런 감정을 부담없이 전달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겠지요. 대사가 전달하려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고, 위로해 주고, 따뜻하게 하는 능력말입니다. 김해숙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참 좋은 연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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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1 Comment 19
2011.11.09 11:22




사실 8회는 중간중간 울컥 눈물도는 장면이 많아 지난 회들보다 더 우울하고 드라마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지만, 드라마 몰입도는 지금까지중 최고였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길게 침묵하고 있었네요. 눈물도 찔금찔금 흘려가면서요.

결국 결혼을 깨버린 지형, 서연이 눈물로 부탁하고 사정했어도 한 번 굳힌 지형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제발 집에 들어가 잘못했습니다 해. 내 마지막 부탁 소원으로 생각해 줘". 서연은 지형의 십자가가 될 수 없다며, 제발 모르는 척 해달라고 하지요. 망가져 가는 걸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을 이해해 달라면서 말이지요. "내가 자기까지 망쳐먹지 않았다는 위안은 갖고 있다 바보되게 해 줘". 엉엉 우는 서연과 지형과 함께 얼마나 울었던지...
지형에게 전화를 건 서연은 결국 화도 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버렸지요. "당신 마음을 보석이고 내마음은 똥이니? 내 문제만으로도 내 머리가 뭉개지려 하는데 나한테 당신 짐까지 짊어지라고!! 돌대가리, 깡통....". 지형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알았기에 서연도 힘을 풀어버리지요.
심해지는 증상, 늘 다니던 길이 생소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그 사람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할까 싶게 서연의 머리는 까맣게 기억들이 지워져 가고 있지요. 너무 급작스럽게 서연의 증세가 심해져서, 치매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심각한 병이라는 것에 뒷머리가 쭈뼛 서더군요. 뒤따라 온 재민의 품에 안겨, 무섭다고 엉엉 우는 서연을 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름과 주소를 적어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고, 집 주변을 사진으로 찍어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처해 가는 서연의 모습은 또 어땠고요.

수애의 3단분노, 소름끼치게 와닿은 '무서움'
길을 잃었다는 말을 전해들듣고 약을 먹자는 문권에게 나만큼 절박하냐고, 나만큼 절망스럽냐고, 나만큼 무섭냐고 불같이 화를 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이 장면은 그간 수애의 연기중 최고로 꼽고 싶은 장면이었습니다. 수애의 3단분노의 절정이었죠, 나만큼 무섭냐는 표정이 얼마나 슬프면서 소름끼치게 와닿던지, 순간 멍해졌습니다. 무서움....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든 세상과의 관계들이 단절돼 간다는 것, 무서움이라는 단어가 피부세포를 뚫고 전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공포라는 단어보다 무섭다라는 단어는 수애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3단분노 연기력때문에 더 소름끼치게 전달되었고요.
말라 비틀어가는 뇌세포처럼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향해 서연은 힘없이 말해봅니다. '당황하지마, 당황하면 바보짓 더할 거야. 아마 그럴 거야. 내가 맞을 거야'. 처음에는 내가 맞을 거야하는 수애의 방백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다음날 병원에 가서 재검을 하는 서연을 보고는, 그 말의 의미를 알겠더군요. 서연은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그렇게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에 주문을 걸며 부정하고 싶었던 거예요. 처음에는 엿먹어라 알츠하이머, 라며 거세게 반항했지만, 한줄기 빛처럼 아니라는 희망 한가닥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게지요.
재검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자 정신이 멍한 사람처럼 "네, 네" 대답만 하는 서연, 한줄기 빛, 희망따위는 없었습니다. 오진이었다는 한가닥 희망이 절망으로 확인되는 순간, 그녀는 말하지요. "나는 날마다 조금씩 바보가 되어가는 치매환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천일의 약속은 첫방송부터 지난 7회까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 있을지, 아닐 지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드라마 분위기가 너무나 우울하고 무거워서 말이지요. 캐릭터들이 사랑스럽지도 않고, 사랑하기에는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들 때문에 무조건 애정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박지형의 우유부단함에 두 여자가 상처를 받아야 했고, 이서연의 이기적인 사랑이 알츠하이머라는 이유로 용서되기는 어려웠고, 바보같은 해바라기 사랑을 하는 노향기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캐릭터들이었죠.
그런데 8회 그 캐릭터들이 통속 멜로극을 파괴하는, 얼마나 순도깊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화들짝 놀라, 그동안 드라마를 이리 건성으로 보고 있었나 반성하게 하더군요. 이서연과 박지형, 그리고 노향기가 사랑하는 방식이 통속을 깨버린 순도 100%의 명품사랑임을 확인하고는, 혼자 눈물을 펑펑 흘리고 가슴을 퍽퍽 치고 앉아 있게 하더군요. 
김수현, 그녀는 역시 대단한 작가입니다. 김수현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김수현은 언어의 연금술사, 감성을 일깨우는 최고의 마법사입니다. 그녀처럼 인간의 심리를 다양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섬세하고 예리하게 집어내는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준 캐릭터가 착한 대명사로 불리는 노향기(정유미)와 나쁜 남자 박지형입니다.

노향기의 사랑, 통속과 명품을 가르는 보석
드라마에서는 박지형에게 상처를 받아 시청자들로부터 전폭적인 동정과 연민을 받는 캐릭터지만, 노향기는 드라마 속 사랑에 실패한 비운의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제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명품보석같은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보석은 드라마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하더군요.
그간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향기같은 사랑은 없다는 듯이 성품, 성격을 못된 애로 순식간에 바꿔버리고, 시청자는 서브주인공=악역, 혹은 악녀라는 공식을 너무나 당연하게 대입시켜 왔지요. 통속적인 드라마의 삼각관계의 틀에서 노향기라는 캐릭터를 재단하려 들었기에, 천일의 사랑 속 삼각관계는 편한 마음으로 볼 수없는 특이한 관계였습니다. 
천방지축 부잣집딸이고,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자 복수를 하려들고, 이서연에 대한 갖은 모함과 음모를 만들고, 치매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지형의 부모님을 흔들려 했다면, 쉽게 지형과 서연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었겠지요. 향기의 캐릭터도 통속극 속의 캐릭터로 머물렀을 것이고요. 그러나 김수현 작가는 노향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라마에서 공식처럼 보여진 통속을 깬 파격을 단행했습니다. 처음 그 파격에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했지요. 미움을 받아야 할 서브여주인공이 실은 가장 불쌍하고, 착한 비련의 캐릭터가 되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8회를 보면서 그동안 답답함에 관심을 주지 않았던 노향기를 보니, 이런 아차 싶더군요. 노향기라는 캐릭터가 어쩌면 현실에서는 더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진심으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왔고, 사랑한다면, 결혼을 취소했다고 약혼자를 찾아가 울며불며 멱살을 잡을 여자는 드물 것이고, 아마 향기처럼 자기가 부족하고 모자라서였다고, 자신을 책망하는 여자가 더 많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그리고 작가에게 놀란 부분이 노향기의 절망감을 표현한 장면이었습니다. 지난회 강수정(김해숙)과의 전화통화에서 서연의 존재를 강수정도 알고 있는 것에, 향기는 "아줌마에게 까지 말했다면, 저는 가망이 없네요"라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던 장면입니다. 노향기는 결혼이 취소된 것보다, 지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보다, 지형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향기는 지형에 대한 배신감으로 연결을 시키지 않습니다. 계속 사랑해도 안될 것같은 불가능에 대한 절망감이 향기를 힘들게 합니다. 사랑이 진행중인 사람의 심리를 얼마나 섬세하게 풀어냈는지 놀랍습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적인 통속을 깨는 것들이 이런 점들이죠. 향기의 엄마 오현아(이미숙)처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바보 등신같겠지만, 당사자는 향기같은 반응을 하지않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고도, 끝내 결혼식이 무산되었어도, 여전히 노향기는 착하고 지고지순합니다. 도끼눈 한 번을 뜨지 않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준비했던 신혼여행 가방에서 잠옷을 꺼내들고, 지형의 마지막 문제 메시지를 보며 눈물을 뚝 흘리면서도, 지형의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오빠가 전화를 받아줘서 기쁘고 고맙다고" 말하는 바보, 그러나 이것이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의 감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아프게 느끼게 합니다.
시청자는 제 3자의 눈으로 노향기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런 노향기가 바보같고, 박지형 정말 나쁜 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하지만, 정말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노향기의 감정이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되었을 거예요.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줘서가 아니라,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사랑예찬론자들의 수많은 명언들이 그냥 글자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향기, 박지형의 사랑을 통해 다시 읽게 됩니다. 김수현 작가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이 얼마나 현실에 바탕이 되어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이죠.

노향기-박지형, 사랑을 묻는다
노향기가 이서연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속은 뭉그러지게 아프면서도 일찍 오빠를 놔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인간들의 기본적인 정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 그런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심리 말입니다. 김수현 작가의 섬세한 예리함이 바로 이런 것들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법하게 그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해줍니다.

향기의 감정은 외사랑이었든, 짝사랑이었든 배신에도 분노하지 못하는 한 길 순애보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했기에 배신당한 향기의 처지를 단순하게 '불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게 합니다. 향기의 지형을 향한 사랑은 이러저러한 상황이 되었으니, 무 자르듯이 싹둑 잘라내지는 가벼움이 아니지요. 배신에 쉽게 마음을 접어버리고, 도끼눈을 뜨고 복수하겠다거나, 철저히 '개무시 잊어주겠어' 한다면, 그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물론 증오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말을 하지만, 향기의 사랑색깔은 너무 투명하고 수정처럼 맑아서 증오하는 것이 더 힘든 아이입니다. 지형을 감싸고 그리워 하는 향기는 여전히 지형을 사랑하고 있고, 작가는 이것 역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집안이고, 착한 향기고 다 버리고 서연에게 가는 박지형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말이지요. 박지형의 사랑방식은 이전 글(김래원, 두 여자를 농락한 나쁜남자라고?)에서 한 번 정리를 했기에, 여기서는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악조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쁜 놈이 되어도, 자신이 사랑한 한 여자를 택하는 박지형의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응원하겠다고 했는데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치매라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여자를 지켜주겠다고 할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그 사랑이 숨막히게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의 색깔이었죠, 희생, 동정, 연민, 책임 등등 그 모든 것을 다 적용해도 이서연에 대한 사랑을 퇴색시키지는 못하는....
치매를 앓는 서연을 향한 지형의 지독한 순애보, 그런 지형을 사랑하는 바보같은 향기의 순애보, 과연 지형과 향기의 사랑에 돌을 던지거나, 불쌍하다거나 바보같다고 그만두라고 말릴 수 있을까요? 박지형의 사랑도, 노향기의 사랑도, 사랑이 쉬운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은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정혼자를 두고 다른 여자랑 시한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 여자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여자를 택한 남자, 결혼 이틀전에 파혼당하고 심지어 1년간 다른 여자를 만나왔다는 남자를 미워하지 못하고 계속 사랑하는 여자가 묻습니다. 멈추란다고 멈춰지고, 그만 두란다고 그만 둬지는 것이 사랑이냐고 말이지요. 절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늪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사랑이라고, 미워하고 증오해야 하는데 미련하게 더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사랑이라고 말이지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통속적 캐릭터를 깬 노향기로 인해 지형과 서연의 사랑을 노작가의 객기 쯤으로 치부하는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저는 향기도 지형도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손바닥 뒤집기 처럼 쉬운 것이 사랑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사랑을 정의하는 말들 중 가장 많이 들어온 것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박지형과 노향기의 사랑이 그러하죠. 향기를 몸도 마음도 지형에게 다 주고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라고 동정하지만, 노향기는 그것에 대한 상처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지형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함에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너무나 오랜시간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랑때문에 힘들어 하지요. 내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 너무 사랑하기에 아깝지 않은 사랑, 박지형과 노향기를 보며 김수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가벼운 감기몸살쯤으로 그려지는 사랑에 대해, 이런 사랑도 있노라고, 그래서 사랑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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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09:26




김수현 작가가 천일의 사랑을 시작하면서, "이거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 말이 생각나는데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번 6회를 보면서 이해가 되더군요. 그만큼 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시청자에게는 이해불가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골치아프게 꼬여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박지형과 이서연의 사랑은 불륜이었고, 이들의 사랑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힘든 설정들이 많지요. 
동정을 받아야 하는데 동정을 받을 수 없는 여자 이서연, 너무나 착한 여자 향기의 눈물을 쏟게 하는 것이기에 그 선택을 응원할 수 없게 만드는 박지형, 다른 여자에게 가겠다는 남자를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나쁜 행각을 해서 시청자가 조금은 미워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착한 노향기. 이들의 삼각관계는 여타의 드라마에서 보던 삼각관계의 기본틀에서 빗겨나 있지요. 사랑의 방해꾼 악역이 있으면, 얼마나 드라마를 편히 볼 수 있겠어요. 그런데 이런 구도를 깨버린 김수현 작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도 큰일났다고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래원, 아니 극중 남자주인공 박지형은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싼 인물입니다.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고,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현대판 열녀 노향기 뒤에서 딴 여자랑 연애를 한 녀석을 감싸줄 건덕지가 별로 없지요. 이서연을 사랑한다는 감정도, 서연을 버리고 노향기와 결혼을 감행하려 했던 것에서, 비겁한 놈으로 그 진정성이 퇴색되어 버렸고 말이지요. 결혼할 여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남의 남자 잠시 도둑질 좀해보자고, 맞불을 지핀 이서연 역시도, 동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지요.
게다가 낚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노향기의 심상치않아 보이는 임신 가능성은 도저히 박지형을 곱게 봐줄 수 없게 합니다. 임신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튼 잠자리까지 같이 한 여자(그것도 두 사람 모두와)를 결혼 이틀 전에 버리는 남자를 고운 시선으로 볼 수는 없지요. 노향기는 임신은 아닌 듯하지만, 만약 임신이라면 에고, 정말 머리에서 김이 폴폴 나오게 복잡해지겠네요.
박지형이라는 인물은 지형엄마와 향기의 말대로 정말 결혼생활을 한 자신이 없었고, 사랑이 아니었으면, 향기를 정리했어야 했습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우유부단하게 질질 끌고 오다, 결국은 이 사단을 만든 무책임한 남자가 맞아요. 지형을 위한 변명을 해줄 수 있다면, 양가 집안 사이에 얽혀있는 이해관계, 비슷한 집안끼리의 편한 결혼, 게다가 멸종 희귀종 같은 노향기의 지고지순한 사랑까지 겹쳐서, 지형이 사랑 하나만을 선택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겠지요. 그래서 어찌 어찌 살다보면 잊혀지겠지, 그냥 저냥 아이낳고 살아지겠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밍기적거리다 결혼 문턱까지 이르렀고요.
그런데 서연에게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넋나간 사람처럼 서연의 문제에만 골똘하더니, 결국 향기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털어놓고 결혼을 못하겠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지난 5회까지 서연을 중심으로 전개를 했다면, 이번 회는 지형의 파혼선언과 함께 박지형과 노향기를 둘러싼 인물들의 등장이 많았지요. 역시 내공의 중년배우들은 드라마를 꽉차게 했습니다. 이미숙, 박영규, 김해숙, 임채무 중년 4인방의 반란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드라마를 임팩트있게 끌고 나가더군요. 김수현 작가의 특징인 길고 강한 대사가 입에 착 달라붙어, 호흡마저 지문으로 소화시키는 중년배우들이었습니다.
특히 향기 엄마 오현아(이미숙)의 연기는 말이 필요없이 강렬했지요. 노향기의 엄마이자, 성깔 대단한 부자집 사모님의 캐릭터를 어쩌면 그렇게 실감나게 보여주는지, 그녀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와도, 나라도 저 상황에서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처럼 자연스럽더군요.
향기를 잘아는 엄마이기에 "내가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깨자고 했다"는 거짓말에 따귀를 올려붙이는 오현아, 정말 바보 등신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의 속터지는 심정을 그대로 보여줬지요. 씹어 물어뜰을 놈뿐이겠습니까? 빤스만 입혀서 광화문 네거리를 머리채를 잡고 열두바퀴를 돌고, 볼이 터지도록 귀싸대기를 맞아도 싼 놈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제부터 이 나쁜남자 박지형을 아껴주려고, 편을 들어주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제 글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표현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바람둥이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남자 박지형의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원을 해주려고 합니다.
박지형에게 노향기와의 결혼은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근사한 럭셔리 중형세단을 타고 달리는 인생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이틀을 앞두고 고속도로와 중형세단을 버리고, 가시밭길 맨발을 선택했습니다. 부모님의 결사반대에도, 향기의 지고지순한 외사랑에도 나쁜 자식, 나쁜 남자가 되려는 박지형, 어쩌면 서연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냥 서연에게 나쁜 놈이 되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결혼을 했을 지도 모르지요. 살다가 도저히 서연을 잊을 수 없어서 이혼을 하고, 서연을 다시 찾았을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고요.
결혼앨범 사진까지 찍고 청첩장까지 나왔는데, 정신 나간 미친놈 소리가 딱 어울리는 미친 짓을 하고야 마는 박지형을 보면서, 어쩌면 서연에게 이별통보를 했던 것보다, 향기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연은 지형의 사랑을 동정이라고, 극구 거부하리라는 것을 지형도 알고 있을 겁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서연이기에 지형의 미친 결정은 자신이 더 초라하고 비참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죠. 바보가 되어 가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약도 마다하는 서연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서연이, 바보가 되어 누군가의 짐이 된다는 것에 자존심 상하고, 아파하는 서연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아는 지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형은 서연을 택하려고 합니다.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그의 생활을 얼마나 힘들고, 흔들리게 하고, 자신의 선택에 회의를 느끼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치매가 어떤 병이라는 것쯤은 지형도 알고 있겠지요. 자식도 힘겨워 치매부모를 요양시설에 보내잖아요. 아, 물론 요양시설에 의탁하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도와 형편에 따라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그 가정의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이서연을 택할 남자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요? 제 자식이라도 솔직히 거품물고 뜯어 말리고 싶을 겁니다. 이 글을 읽는 분중에 미혼남성이 있다면, 지형의 입장에서 솔직히 서연의 곁을 지켜주겠다고, 결혼을 깰 수 있을까 자문해 보시면, 지형과 같은 선택을 하는 분은 많지 않을 듯합니다.
김수현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천일의 약속, 김수현 작가는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겠느냐고, 시청자들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아주 먼 옛날의 동화가 돼버린, 공룡화석처럼 오래된 이야기가 돼버린 사랑, 그 주체하지 못할 미친 감정을 박지형과 이서연을 통해 끄집어 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여자에게만 착한 남자가 되려는 박지형의 사랑을, 그래서 응원해 주려고 합니다. 가장 힘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을 잃어가며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박지형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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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09:15




지형과 재민, 그리고 동생 문권이 자신의 병을 알게 된 것에 자존심 상해하고 분노하는 서연. 무너지지 않으리라 덧셈 뺄셈을 반복하고, 심지어 주기도문까지 영어로 외우며 자신의 병을 부정하던 서연이 무너지는 모습에 함께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동안 치매라는 것에 대해 너무나 피상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려 했던 제 머리가 산산히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네요. 그리고 당해보지 않았기에, 경험하지 않았기에, 머리로만 치매를 이해하고 아파하려 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연의 고통은 그동안 막연하게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까지 미치지 못했고, 바보가 되어가는 것를 거부하는 몸부림이 먼저였지요. 비약보다는 단계적 심리묘사를 해가는 작가의 섬세함이 와닿더군요. 그래요, 만약 치매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면 '내가 바보가 된다고?'라는 반응이 먼저일 듯합니다. 기억이나 추억이 지워져간다는 것은 다음 고통일 듯합니다.
재검을 받고 치료를 하자는 지형과 재민의 권유를 뿌리치는 서연, "난 멍청이 돼가면서 느리게 죽어가는 것보다, 빨리빨리 끝내고 싶어. 주변사람한테 폐끼치면서 동정받으면서,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그렇게 무거운 보따리고 길게 끌고 싶은 생각없어. 텅텅 빈 껍데기로 사고나 치면서 가까운 사람 아까운 시간 갉아 먹으면서...". 
그래도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벌자는 지형에게 착한 "남자 흉내 그만내고 꺼지라"며 독설을 내뱉은 서연이었지요. 그리고 덧붙이는 서연의 말이 가슴을 후벼파더군요. "강요하지마, 지금 이대로 난 아니다 우기게 놔둬". 자신이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서연은 강한 자기부정과 최면을 걸며 버티고 있었지요. 메모장을 써가며 일일이 체크하고, 어려운 단어들만 골라가며 반복해서 외워보고, 다른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는 건망증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안간힘을 써가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알게 되자 정말 사실이 되는 것같아 더 두렵고, 화나는 서연입니다. 들키고 싶지않은 치부, 홀라당 벗겨져 자신의 머리속을 누군가 들여다 보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화나는 서연이지요. 증세가 심해져 누구나 다 알아채기 전까지는 정상이고 싶었던 서연입니다. 그때는, 그때는 자신이 바보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테니까요. 그래서 상할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고,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도 모르고, 동정을 받고 있는 것도 모른채, 심지어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른채, 텅빈 나무처럼 그렇게 멍하니 고통없이 그들의 눈을 마주할 수 있을 것같아서 말이지요.

죽을만큼 사랑했던 지형, 그래서 그 행복했던 어느 순간에는 이대로, 사랑하는고 행복한 상태로 그 시간이 정지되기를 바랐었고, 한 번쯤은 신이 그녀를 돌아다 봐주기를 바랐던 서연이었습니다.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그녀 인생에서 단 한번의 축복으로 허락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던 서연이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헛된 망상임을 알았을 때, 서연은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행복같은 것은 없다고, 신의 축복이나 선물따위는 그녀의 인생에 없다고, 아니 보란듯이 거절하겠다고, 그것이 이서연이 박지형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존심이었고, 신에 대항하는 무기라고 생각했던 서연이었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결혼 날짜가 잡혔다고 이별통보를 받고서도 서연은 무너지지 않았지요. 그 사람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남루한 인생을 두번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서연이 살고 싶다고, 아직은 아니라고 치매를 부정하며 무너져 우는 모습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하더군요.  

서연은 재민에게 자신의 병을 알린 문권에게 불같이 화를 내지요.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누나의 머리와 자기 머리를 바꾸고 싶다고,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죽겠다는 동생 문권(박유환)의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문권의 말이 정말 제가 동생이어도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가슴 짠하게 울려오더군요. 이 드라마 왜 이리 슬퍼요?ㅠㅠ
죽을 날짜 받아 놓은 사람처럼,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진단을 받은 서연에게, 지금 그 누가 무슨 말을 한다한들 위로도, 병을 없애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머리를 대신 바꾸고 싶다는 동생 문권이나,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서연이나 가슴만 답답하고 힘들 뿐이죠. 매순간 절망이 가슴을 숨도 쉬지 못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것을, 서연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다 알지 못하겠지요. 
동생에게 불같이 화를 쏟아붓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배달전화번호를 찾아 만두국을 시키려는 서연, 그러나 가방을 회사에 두고 왔다는 문권의 말은 그녀의 가슴을 쿵!하고 내려치지요. 대신 전화를 걸겠다는 문권에게 "바보 취급하지마. 아직 아냐"라며, 만두국을 시키는 서연은 그렇게 바보가 되어 가는 자신과 마주하기를 겁내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을 잃어가며, 바보가 되어가면서 느껴야 하는 서연, "아직 아냐"라는 단 네글자의 짧은 말이 이렇게 가슴을 아리게 하다니, 드라마가 끝나고서도 한동안 멍해져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형(김래원)의 넋나간 표정처럼 그렇게 말이에요.
아직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 걸까? 서연은 아직은 바보가 되지 않았다고 언제까지 말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금 이대로 멈춰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겹치니 펑펑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연은 그 시간이라는 놈이 제트기처럼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랐을 겁니다. 지형을 떠올려도 가슴 아프지 않게, 그래서 어느날 백화점에서 배가 불러 만나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며 지나갈 수 있게 말이지요. 5년 후에는 아빠가 된 지형, 10년 후에는 40대 아저씨가 된 지형을 만나도, 그저 덤덤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누렇게 희미해진 옛날 사진처럼, 내려놓은 지도 모르게 내려놓았다가, 언젠가는 공룡시대 화석처럼 그렇게 잊혀질 수 있게, 아니 잊을 수 있게 말이지요.
도로의 자동차들처럼 시간이 그렇게 휙휙 지나가 주길 바랐던 서연은, 이제는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 멈출 수 있으면 멈춰달라고, 아직은 아니고 싶다고 빌어보는 서연입니다.
비로소 혼자 감당하고자 하는 서연의 마음이 읽혀지기 시작하더군요. "자존심...너무 아프다. 나는, 내 인생은 마지막까지 이렇게 남루해야 되는 거니!...". 그동안 안간힘을 쓰고 서있던 서연이 맥이 풀려 쓰러져 버리고, 재민에게 "오빠, 나 좀 집에 데려다 줘"라며 오열하는데, 서연의 말이, "오빠 살려줘, 살고 싶어"처럼 들리면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아직은 살고 싶다고, 아직은 이서연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고 말이지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덤덤하게 이별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병을 부정하던 서연이 장재민에게 안겨 엉엉 우는 장면은, 그냥 서연에게 투영되어 있는 수애의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듯이, 살고 싶다고 아프게 우는데, 가슴을 먹먹하게 하더이다.
그동안 수애가 맡은 서연이라는 캐릭터가 대사의 부담감과 사랑, 이별,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 등 너무나 많은 감정선들이 얽혀있어서, 무엇이 그녀의 주된 고통인지 애매모호한 감이 있었는데, 그 혼재된 모든 감정들을 목놓아 우는 오열로 정리를 해주더군요. 아마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서연때문에 많이 아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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