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약속 9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11.22 '천일의 약속' 결혼 허락한 김해숙, 시청자 울게 만든 한마디 (27)
  2. 2011.11.15 '천일의 약속' 김해숙, 시청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배우 (19)
2011.11.22 09:09




참 많이 울었습니다. 김수현작가의 개인적인 걱정도 보였고, 하고 싶은 말도 들었고, 그런데도 한없이 작은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울어야 했습니다.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건 책을 보건 통째로 모든 내용이 남지는 않지요. 절절하게 감동으로 전해지는 한마디, 혹은 한 구절이 그 드라마나 책을 두고두고 기억하게 하는데, 천일의 약속 또한 그러합니다. 아무리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작가의 글이라고 해도 모든 대사들이 가슴을 울리거나 남지는 않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11회를 보면서 김수현 작가의 개인적인 걱정과 바람, 그리고 강수정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말을 보고 배웠는데요, 노작가에게 결례가 되는 생각일 지는 모르겠지만, 서연 고모부의 대사를 통해 잠시 김수현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 약한 모습과 바람까지도 본 듯해서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서연의 고모는 3년전에 암수술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번회 고모부가 아들 장재민(이상우)와 고모의 정기검진에 관한 대화를 나눴지요. "2년 남았어. 얼른 5년이 지났으면 좋겠어". 대부분 암은 발병후 5년 이내에 재발되지 않으면, 완치가 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기에 고모부의 말을 듣는 순간, 김수현작가의 바람을 고모부를 통해 말한 것은 아닌가 싶더군요. 2008년 유방암 수술을 받았던 김수현 작가, 조기발견이었고 간단한 수술이었기에 예후도 좋다고 김수현 작가가 직접 밝히면서, 김수현 작가의 유방암 수술소식이 큰뉴스가 되었던 것이 생각나서 말이지요. 수술 후 '엄마가 뿔났다'를 집필을 하고, 이후 '인생은 아름다워'에 이어 '천일의 사랑'까지 노작가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는데, 모쪼록 재발되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또 다른 작품도 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출판사 직원들과의 회식자리를 뒤로하고 먼저 나온 서연, 옷속을 파고드는 추위가 몸을 움추리게 합니다. 시도때도없이 떠오르는 지형과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서연을 더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섭게 만들지요. 운전중 서연은 길을 잃고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지요.
처음 보는 듯한 도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방향감각을 잃은 서연은 빵빵거리는 크락션 소리에 차를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지요. 생각나는 것은 그 사람의 전화번호뿐, 머리를 쥐어박아도 그 사람의 번호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서연이었지요.
서연의 전화를 받은 지형은 급히 택시를 타고 서연을 찾아오고, 눈물로 범벅이 되어 멍해져 있는 서연을 보지요. 겨우 진정된 서연은 긴장감을 풀고 차에서 그대로 잠이들고, 그런 서연을 바라보는 지형의 가슴은 아파옵니다.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까지 모든 것을 사랑하고픈 이 여자, 가슴을 꽁꽁 싸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이 여자는 지형의 모든 것입니다. 행복이고, 기쁨이고, 아픔이고, 고통이고, 과거이고, 오늘이고, 내일입니다.
"부탁한다 서연아, 니 인생에 들어가게 해줘". 서연은 지형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요. "왜 꼭 거부해야해? 나 때문에 결혼도 깨버린 사람인데...각오도 벌써 끝낸 사람인데. 그냥 기대버리자"고, 마음 속에서는 지형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지형의 어머니에게 걱정하는 것처럼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차마 약속을 깰 수 없다고 고백하지요.
"넌 내 엄마가 아니야. 넌 내 여자만 하면 돼", 지형의 확고한 말에 무너지는 서연입니다. "나도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죽을 힘을 다해 사랑하고 싶어". 오늘보다 내일을 더 사랑한다고 날마다 약속해달라며 지형을 꼭 끌어안는 서연, 이제는 이 사람을 놓지 않을 겁니다. 놓아달라고 해도 놓지 않을 겁니다. 도망갈 기회를 줬는데도 가지 않았던 것은 이 사람입니다. 그렇게 서연은 그 누군가를 향해 용서를 구하고, 밀어내려던 자기 자신을 설득합니다.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어줘. 날 맡아줘. 날 지켜줘".
지형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 서연은 밝아졌지요. 다가올 미래따위는 걱정하지 않고 싶은 서연입니다. 알츠하이머 그 놈은 그 놈대로 서연은 서연대로 자기 방식대로 살다 가겠노라고, 가는 날까지 주어진 시간 내내 행복하게만 살겠노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시간도 모자라는 서연,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조금은 뻔뻔하게 욕심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덜 허락된 시간이니 그 정도는 봐달라는 듯 말입니다. 

차안에서 겁에 질려 당황해 하고, 길을 잃은 상태에서 오직 그 사람만 생각나는 자신을 쥐어박는 모습은,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는 이서연이라는 인물의 내면심리를 잘 표현한 장면이었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서연이 그 순간 얼마나 공포심을 느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 오더군요.
마치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듯한 자동차들처럼, 서연의 뇌세포를 갉아먹는 알츠하이머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서연의 기억들을 삼켜버리고 있는 듯한 공포심과 놓을 수 없는 지형에 대한 감정, 의지하고 싶은 마음까지 잘 전달되었지요. 그래서 지형에게 자신을 맡아달라고, 지켜달라고 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수현 작가가 정통멜로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노작가의 인간심리를 꿰뚫어 보는 깊이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이 이 대사를 통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주길 바라는 인간적인 바람이, 지금 서연이의 상태에서 더 간절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지형에게 함께 있어달라고, 지켜달라고 우는 서연과 그런 서연의 흔들리지 않는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박지형의 모습이, 아름답다기 보다는 참 아프고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앞으로 두 사람이 견여야 할 난관들이 산더미같은데, 그 가시밭길이 너무 뻔히 보여서 말이지요. 부모의 반대, 향기네 집의 반응,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심지어는 멍청한 선택이라는 비웃음까지 지형이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지형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들이 아닐 거예요. 하루가 천금같은 시간, 서연의 죽음이 하루하루 앞당겨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연이 지워져가는 기억과 함께 죽어간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아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는 어머니는 세상천지에 없겠지요. 그런데 김수현 작가는 말합니다. 없을 것같은 세상이지만, 또 없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강수정이라는 인물은 드라마속에서 창조된 비현실적인 인물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입니다. 김수현 작가는 전작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동성애자 아들을 끌어안는 부모를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그 시선이 얼마나 따뜻하고 뭉클했었는지,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 이성애자들과는 다를 뿐이라고, 다른 구조를 가졌을 뿐이라고 말했었지요.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말은 성적소수자를 보는 사회의 시선 모두를 바꾸지는 못했겠지만, 그러나 조금은 달라지게 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연과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한 지형, 인력으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정은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지요. 엄마의 마음이 어떻든 상관없는 것이냐고 물어도, 지형의 대답은 죄송하다는 말뿐입니다. 거품물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대도 지형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는 강수정, 아들 지형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이미 수정도 각오했던 일입니다.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강수정이지요.
"어쩌겠니, 널 쇠사슬에 묶어 토굴에 가둬둘 수도 없고...".
강수정은 침착하고 담담하게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말했지만, 모든 어머니의 결론이었을 겁니다. 앞길 창창한 서른밖에 안된 여자가 치매라니....서연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난 후 강수정은 인간적인 마음과 엄마의 마음 두 가지 속에서 싸우고 또 싸웠노라고 고백하지요. "그 아이가 내 딸이라면, 어느 집 아들이 지금 너처럼 내 자식 맡아준다고 나서면 얼마나 고마울까. 백번 천번 절할 일이지. 그런데 결국 결론은 남의 아들은 몰라도 내 아들은 안된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참 싫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강수정은 말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명치끝가 아려오는 것이, 그냥 먹먹해지면서도 고맙고, 드라마 속 캐릭터지만 존경스럽고 그러더군요. 결혼식은 2~3개월 후에 하겠다는 지형에게 하는 강수정의 말이 믿기지가 않더군요. 그동안 달라질 게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강수정은 결혼을 빨리하라고 하지요.
"그 아이의 하루는 건강한 사람 하루와 달라. 시간 낭비하지마". 쿵! 하고 뭔가가 가슴을 치며 올라오는데, 이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복잡한 감정들이 제 안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김수현 작가에게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조금은 밀고 당기고, 속된 말로 지지고 볶고 울고 싸우고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간단하게 강수정이 결론을 내려버리더군요. "그 아이의 하루는 건강한 사람 하루와 달라, 시간 낭비하지마"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강수정을 보면서 가슴이 복잡하게 엉켜버린 이유는 김수현 작가의 통속의 틀을 깨는 사랑의 깊이때문이었어요. 사실 강수정은 아들 지형의 사랑에 두손 두발 든게 아니었어요. 여전히 그녀는 아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해는 하지만, 마음을 열고 응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바꾼 것은 이서연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그리고 꾾임없이 자신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이기심에 대한 양심고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라도 더 서연이 사랑받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생각에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작가는 강수정을 아들 지형이 아닌 서연의 짧은 삶을 두고 더 많은 고민을 하게 합니다. 그 진실된 사랑에 감동해 두손들었다 어쩌고 저쩌고가 아니고 말이지요. 그래서 두 남녀의 사랑의 힘보다는 강수정이라는 인물이 서연을 배려하고 보듬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낭비하지마"에 생략된 강수정의 마음은 '짧은 시간밖에 허락되지 않은 이서연을 더 많이 사랑해주고 아껴주라'는 것이었지요. 순간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면서, 끝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고 말았네요.
욕실에서 혼자 앉아 오열하는 강수정처럼, 자식을 둔 어머니라면 어머니로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렇게 울었을 듯합니다. 강수정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다 이해시키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도, 강수정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반문하게 합니다. 그리고 한없이 작은 제 모습을 발견하게도 합니다.
강수정을 보면서 내 아들이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 아니 그러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던 것도 그 때문인 듯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김수현 작가의 힘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동성애자의 사랑에 대해 마음의 벽을 쉽게 허물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드라마를 보며 김해숙의 연기에 매번 감동을 하면서도, 강수정이라는 인물을 자꾸 제자신과 대입시켜 보는 습관이 생겨버렸습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큰 소망을 품으면서 말입니다. 드라마 속 강수정이라는 인물은 작은 바람만으로는 따라하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지요. 그런데도 마음은 아닌데, 머리로는 정답이다를 외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김해숙이라는 배우의 명연기와 함께, 남녀간의 사랑을 넘어 보편적인 인간의 사랑을 묻는 작가의 화두가 가슴을 움직이기 때문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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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5 07:38




서연은 지형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납니다. 알츠하이머라는 것을 알고 결혼식을 깨버리고 함께 곁에 있겠다는 남자, 그 바보같은 남자의 사랑이 한없이 고맙고, 그래서 더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그를 밀어내야 하는 신파극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이 행복하고 슬픈 서연입니다.
"결혼하자"는 지형의 프로포즈, 수백번도 상상해 봤던 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수천번도 더 대답을 준비해 봤던 서연이었지요. "싫어", "까짓 것 하자". 천사와 악마가 서연을 하루에도 수천번씩 서연의 속에서 싸웠고, 힘들게 그 사람을 내려놨지만, 결혼을 깼다는 말에 서연도 흔들렸습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운명이라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운명적이 사랑이라고 모른 척 받아들였을 지도 모릅니다. 지형이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참을 수 없기에, 빈껍데기가 되어가는 자신을 짐짝처럼 지형에게 맡기기 싫어서, 서연은 그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애써 붙잡고 있었지요.
"다른 사람한테 허락된 몇십년이 우린 안된대. 그러니까 빨리 합쳐 하루하루를 천금같이 쓰자". 지형의 진심을,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서연은 모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서연이 마음이 그러하니까요. 하루만이라도 내 사람으로 마음껏 사랑하고 죽어버린다고 해도 서연은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형이 자신의 삶을 저당잡히고 늪에 빠져 망가지는 것은 죽어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서연입니다. 바보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서연이기에, 점점 심해지는 치매증세에 동생 문권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처럼, 그 사람도 그렇게 매시간을 매순간을 애타게 지켜봐야 할 것임을 알 것같기에, 서연은 지형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이것으로 됐어. 고마워. 행복해. 당신을 기억하는 날까지 행복해 할게. 날 버려, 그리고 잊어. 하늘도 이해할 거야". 
서연에게 시간이란 조금씩 조금씩 보이지 않게 갉아먹는 낡은 옷장 속 좀벌레와 같습니다. 지형의 프로포즈를 받고 흔들리고 싶은 마음을 잠재우고 싶어 와인을 찾으며 화를 내는 서연, 술을 잔뜩 마시고 일어나면 그냥 갑작스런 쓰나미가 일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 아무 것도 기억못한 채로 눈을 뜨고 싶은 서연이었지요. 지형도 잊어버리고, 결혼하자는 그의 말에 슬픔도 기쁨도 기대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그를 놓아주고 싶은 서연입니다. 
서연의 머리를 갉아먹고 있는 알츠하이머란 놈은 고모부의 티눈과도 같이 자라나기만 합니다. 고모부의 티눈이 한없이 부러운 서연이었을 겁니다. 파내버리면 그만인 티눈, 그러나 서연의 머리를 파먹고 자라고 있는 망각이라는 병은 잘라낼 수가 없는 티눈입니다. 머리를 갈라 뇌세포를 갉아먹고 있는 티눈을 빼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병원으로 향하는 고모부를 바라보는 서연의 텅빈 눈이 그런 바람을 표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연의 머리에서 커지고 있는 것이 고모부의 발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티눈과 같은 것이라면, 파내버리기만 하면 그만인 티눈같은 그런 가시라면 얼마나 좋을까....그런 간절함....
서연을 만나러 온 지형엄마 강수정(김해숙), 임신한 것 아니냐고 묻는 지형엄마의 말에 서연은 힘들게 고백합니다. "그 사람이 어머니 설득하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사람 고집 말도 안되는 것이에요. 저 그럴 수 없습니다.....저 알츠하이머 환자에요. 어머님". 차주전자를 잡은 서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알츠하이머라는 말에 할말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강수정, 순간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있는 듯한 김해숙의 표정을 보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감탄스럽더군요. 아들 지형을 생각해서라면 분노했어야 했고, 인간 이서연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난감함과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보고는 역시 김해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간이란 동물이 워낙 감정이 복잡해서 사실 하나의 표정에도 많은 감정들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연기자에게서는 스토리나 극본 속 지문에 따라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설정에 의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김해숙의 표정에서는 극본 속에 있을 법한 지문도, 연기자로서의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냥 어머니의 표정이랄까, 사람의 표정이랄까, 아무튼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중년의 김해숙, 그녀에게는 시청자를 끄는 힘이 있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와 설득력있는 눈빛으로도 대사 이상의 감정을 전달해낸다는 점이지요. 평범한 대사도 김해숙이라는 배우에게서 나오면 힘을 가지고, 마음을 흔들고, 감성을 일깨우고, 마치 언제나 옳은 말을 해주는 어머니를 느끼게 합니다.
김수현작가의 전작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자 아들을 그녀의 가슴으로 품는 모습으로 눈시울을 적셨지요. 몸으로 낳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 품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으로 자식을 낳는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천일의 사랑에서는 아들 박지형이 향기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고백에, 그 아들의 사랑을 엄마이기에 앞서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려는 모습을 보여줬지요. 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우아하고 교양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서연의 말대로 부러운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드라마속 강수정이라는 인물처럼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품성, 인격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초라함 같은 것 말입니다. 

향기를 버린 아들 지형에게 "향기한테 이게 무슨 못할 짓이야. 향기는 너밖에 없는데, 향기 전부는 넌데, 그 죄를 어떻게 다 받을려고 그래. 마음 찢어놓은 상처는 눈에 안보인다고 죄 아닌 줄 알아?"라는 대사는 나쁜 놈이라고 소리지르고, 따귀를 때리고, 흥분하는 것보다 훨씬 아프고 무게있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향기에 대한 연민, 미안함, 아들에 대한 야속함, 인간적인 실망감을 이처럼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형의 십자가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이서연이 아니라, 착한 노향기를 버린 죄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더 무거울 겁니다. 아들이 평생을 업보처럼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을 그렇게 잔인한 말로 해야 하는 강수정(김해숙), 내 자식보다는 남의 자식 아픔을 더 고통스러워 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자식의 일이기에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자식의 모든 일에 덤덤하게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기 어려운 입장이 부모일 겁니다.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품위있는 강수정 역시 마찬가지지요. 아들을 내쳐 버리는 남편이 야속하고, 말없이 짐을 싸서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강수정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향기와 향기부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들의 사랑을 혼자서라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결혼식을 깨버리자 마자 서연과 결혼을 하겠다는 지형의 결정에 강수정은 실망이 크고, 절대로 안된다고 못을 박지요. 시간을 조금 번 다음에 결혼을 하든, 아버지를 설득을 시키든 하자는 것이었지요. 시간이 아깝다는 지형의 말에 서연이 임신을 했다고 오해하는 강수정은 서연을 만나 임신여부를 확인하지요. 지금 당장 결혼식을 하는 것이 무리라는 말을 하려던 강수정은 차라리 듣지않았으면 좋을 말을 듣게 되지요. "저 알츠하이머 환자에요". 
천일의 사랑은 지형과 서연, 그리고 지형을 해바라기하는 노향기의 사랑만큼이나 무게감있는 사랑이 있죠. 바로 강수정이 보여주고 있는 자식을 소유물이 아니라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대하고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지형이 향기를 버리고 이서연을 택하겠다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아버지에게 내쫓기던 날, 말없이 지형을 안아주고 볼을 쓰다듬어 주던 김해숙, 그 장면 하나로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전달해 주었던지, 서연을 두고 고민하는 김래원보다 그들의 사랑을 이해시켰던 장면이었어요. 김해숙의 표정에는 어머니가 있었고, 너무도 성숙한 인간미가 있었고, 따스함이 있었지요.
이서연으로부터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말을 듣는 김해숙의 표정에도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들어있어서, 지형의 어머니인지, 서연의 어머니인지, 그저 잘아는 중년의 사모님이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 여자의 아픔을 듣고 있는지 조차 구분이 안가는 그런 모습이었죠.
향기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서연에 대한 사랑을 속이고 싶지않음이었고, 서둘러 결혼을 하려는 이유가 이서연의 알츠하이머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 강수정, 아무리 아들 지형의 사랑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려고 해도, 아들이 시한부 인생을, 그것도 망각의 병을 앓고 죽어가는 여자를 지키겠다는 것에 찬성을 해줄 부모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극중 강수정이라는 캐릭터를 보니, 누구보다 서연과 함께 아파해 주고, 보듬어 주고 싶어할 것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김래원보다 더 이서연을 사랑할 것 같은 그런 느낌말입니다. 그 사랑의 색깔은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드라마지만, 드라마보다 깊이있는 사랑을 보여줄 것같은 어머니 김해숙,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이런 감정을 부담없이 전달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겠지요. 대사가 전달하려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고, 위로해 주고, 따뜻하게 하는 능력말입니다. 김해숙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참 좋은 연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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